제129화. 홀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은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주변 사람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인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뒤, 소년의 손가락이 미세하기 떨리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흡이 돌아오더니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속눈썹이 서서히 떨리며 눈꺼풀이 올라갔다.
은은한 불빛이 눈꺼풀을 지나 동공을 지나는 순간, 준은 온 힘을 다해 눈동자를 굴려 주위를 살폈다.
익숙한 곳, 일단 안심이었다. 준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자마자 그대로 누워 생각에 잠겼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후…아찔하군.’
은은한 나무향을 들이키며 자신의 몸을 들여다보니 몸속의 장기 중 어느 하나 멀쩡한 것이 없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살아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혈관도 모두 걸레짝이 되어있었고, 염력 회오리속의 파란 물방울도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던 준의 머리에 문득 더욱 중요한 것이 느껴졌다. 약로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 이다.
“스승님! 스승님!”
하지만 몇 분이나 쉬지 않고 불러대도 익숙한 스승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준은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 했던 수준의 불안을 느꼈다. 목숨을 건 혈투를 몇 번이나 뚫고 나온 그였지만, 이토록 불안해 본적은 처음이었다.
어떤 강자와 대적했을 때도, 심지어 대지의 불꽃을 구하기 위해 마그마 속으로 몸을 던졌을 때도 이렇게 불안하지는 않았다.
준은 몸을 돌리기도 어려운 상태의 몸으로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손을 들어올렸다. 다행히도 검은 반지는 아직 그의 손가락에 남아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반지를 보자 조금은 마음이 진정됐다. 반지가 있다면 약로도 아직 살아있을 것 같았다.
소년은 한참동안이나 스승의 목소리가 들리기를 조용히 기다리다가, 문득 반지에 영혼의 힘이 떨어졌을지 모른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약로가 처음 나타났을 때 오랫동안 자신의 염력을 흡수한 덕에 반지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했으니, 이번에도 그럴지도 몰랐다.
준은 제발 스승이 나타나기를 빌고 또 빌며 영혼의 힘을 쥐어짜내 검은 반지에 불어넣었다.
그리고…드디어 약로의 허상이 나타나는 순간, 준은 왈칵 눈물이 쏟고 말았다.
“녀석, 드디어 일어났구나.”
“스승님, 괜찮으시죠?”
“좋은 소식 하나, 나쁜 소식이 하나 있단다.”
약로는 준을 보며 평소처럼 인자하게 웃어보였지만, 그의 웃음에는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기색이 묻어나고 있었다.
“좋은 소식은 네가 두 개의 불꽃을 합쳐 새로운 불꽃을 만들어냈다는 것 이지. 허허허! 그 힘 앞에는 나조차도 입이 벌어지더구나. 네가 그 기술을 완전히 습득하기만 한다면 동일 계급 중에서는 네 적수가 없을 게야. 그리고 나쁜 소식은…네가 더 잘 알 테지?”
“네. 아주 심각하게요…”
“하하, 그래. 그래도 몸조리만 잘 한다면 천천히 회복할 수 있을게다. 내가 회복을 위한 과정을 다 세워 놨으니 내가 시키는 대로 따라 한다면 곧 최고조의 몸 상태를 회복할 수 있을게야.”
“그럼 선생님은요?”
“흠…이번 일로 내 영혼의 힘을 너무 많이 썼구나. 그 불꽃 파도 속에서 널 지키느라 거의 모든 영혼 에너지를 쓰고 말았다.”
약로는 최대한 담담하게 웃고 있었지만, 준의 눈에는 끊임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걱정 말거라. 영혼 에너지를 다 썼다고 회복이 불가능 한 건 아니니까. 다만 내가 예전처럼 잠시 깊은 잠에 들어야할 것 같구나. 앞으로는 내가 널 보호해주기 어려울 것 같으니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야할 것이야.”
“죄송해요, 선생님…제가…제가…”
“하하, 녀석, 답지 않게 질질 짜기는…걱정 말거라. 잠깐 어디 여행이라도 갔다 온다고 생각하면 될게야. 곧 돌아 올테니 열심히 수련하고. 제자가 성장했는데 화를 내는 스승이 세상에 어디있느냐. 이번 일은 지난 몇 년간 가장 큰 수확이어서 아주 기분이 좋구나. 뚝 그치거라…곧 다시 볼 수 있을게야. 그리고, 반지에 아직 얼음 불꽃의 정수가 남아있으니, 위급할 때 쓰거라.”
그렇게 약로의 허상은 그 말을 끝으로 세상에서 사라졌고, 준은 자리에 누운 채 한참을 울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깔끔하게 정돈된 방안, 침대에 누워있던 소년은 퉁퉁 부운 눈으로 눈을 떴다.
약로가 마지막으로 머릿속에 넣어준 정보가 그의 머릿속에 흘러넘치자, 다시 한번 눈물이 흘렀다.
‘안돼…내가 빨리 회복해서 강해져야 스승님도 더 빨리 돌아올 거야. 스승님이 돌아왔을 때 내가 발전이 없으면 얼마나 화를 내시겠어!’
준은 또 다시 한참을 울다가 간신히 마음을 다 잡고 스승이 남겨준 정보를 되뇌었다.
약로가 넘겨준 정보 중에는 ‘소생의 비약’의 조합표도 있었다. 아마도 약초를 꾸준히 모으면서 동해의 신뢰를 얻으라는 뜻인 듯 했다.
약로의 세심한 배려에 준은 또 다시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약로가 깊은 잠에 빠진 이상 그 어떤 상황에서든 오로지 스스로의 힘에만 의지해야만 했다.
물론 동해의 몸에는 아직 약로가 넣어둔 얼음 불꽃의 정수가 남아있었지만…이는 약로만이 사용할 수 있으니 사실상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5레벨 연금비약 또한 지금 준의 실력으로는 제조할 수 없으니, 어쩌면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할지도 몰랐다.
지금 준의 손으로 불러낼 수 있는 것은 대지의 불꽃이 전부였다. 비록 약로가 반지 안에 얼음불꽃의 정수를 남겨 놓았다고 하지만, 지금 실력으로 두 개의 불꽃을 결합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잃게 될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도 약로의 도움이 없었다면 확실히 목숨을 잃었을 것 이다.
준은 그렇게 바닥에 누워 한참이나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다.
우선은 동해에게 투황급의 힘을 불러낼 수 없다는 것과, 소생의 비약을 제조하지 못 한다는 것을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됐다.
다음으로는 영혼 에너지를 회복할 수 있는 물건을 찾아야 했다.
그렇게 한참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손목 언저리에서 서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깜짝 놀란 준이 이불을 걷어내자, 작고 귀여운 칠색 이무기가 보석처럼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준은 이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실로 며칠만에 처음 짓는 미소였다.
“이그…이쁜 것…”
약로의 말에 따르면 지금 칠색 이무기의 실력은 투왕급 강자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니 나름대로 의지할만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그 안에 있는 메두사가 깨어나면 동해보다 이 아이가 더 무서운 존재가 될 수도 있었지만…
준은 칠색 이무기의 비늘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다 저장반지에서 하늘 사자의 정수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칠색 이무기의 아름다운 보라색 눈동자가 더욱 반짝이며 입에서 쓰-쓰-하는 귀여운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소년은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 이무기의 입속에 보라색 액체를 흘려 넣은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신 몸을 뒤트는 아기 뱀을 베개 옆에 둔 채로 저장반지에서 상처 치료약을 꺼내 입안에 넣었다.
체내에 상처약이 스며들기 시작하자 온 몸 곳곳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바로 그 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사람 그림자 하나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둘째 형인 찬이었다.
“드디어 일어났군. 벌써 5일째 누워 있었어.”
“벌써 그렇게 됐구나…”
“몸은 좀 어때?”
“아직 죽으면 안 되니까.”
동생의 장난스런 대답에 이찬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녀석, 정말 속을 모르겠다니까. 진짜 문씨 가문까지 가서 한 바탕 하고 올 줄이야.”
“그건 어떻게…”
형의 말에 준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어느 새 방안으로 들어온 이정이 입을 열었다.
“동해 선생님이 얘기해주셨어. 걱정마,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이야기니까. 동해 선생님에게 꼭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거야. 의식을 잃은 널 여기까지 데려온 게 동해 선생님이니까.”
정의 말대로 준이 인사를 하려 몸을 일으키자, 동해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아닙니다. 감사는 무슨…그나저나 이준 동생, 정말 대단하더군. 그 날 자네가 만든 그거 말이야…내가 살다 살다 그런 건 처음 봤다고! 하하하! 정말 죽는 줄 알았어, 내 인생에서 제일 아찔한 순간이었다니까!”
동해는 뭐가 그렇게 신이 났는지 호탕하게 웃으며 엄지를 세웠다. 표정으로 보아 정말로 즐거운 것 같았다.
“하하…미친 짓이었죠.”
“상처는 좀 어때? 많이 심각한가?”
동해는 문득 당시 상황이 떠올랐는지 소년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하하, 간신히 목숨은 붙어있습니다. 제가 또 생명력 하나는 끝내주지 않습니까.”
“흠흠…그래 그래, 확실히 범상치 않은 생명력이지.”
준은 그 뒤로 동해와 몇 마디 쓰잘데기 없는 농담을 주고 받은 뒤 형들에게 약재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두 사람이 방을 나서자, 준은 또 다시 종이에 몇 개의 약재 이름을 적은 뒤 그것을 동해에게 건넸다.
“선배님, 이건 소생의 비약의 재료입니다. 이것만 모아다 주시면 바로 제조를 시작하죠. 나머지 재료는 제가 구할게요. 이번에 목숨을 구해주셨으니 은혜를 갚아야지요.”
동해는 잠깐 넋을 놓고 있다가 황급히 종이를 건네받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동생, 정말 고맙네. 내가 일 년간 지켜 주기로 했으니 그 약속은 꼭 지키도록 하겠어. 안심하고 몸 회복에만 집중하게! 설령 운남종이 찾아온다고 해도 내가 목숨 걸고 지켜주지!”
준은 동해의 표정을 보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약재 정보를 먼저 넘긴 것이 좋게 작용한 듯 했다.
‘이제 회복에 집중해야겠어. 나설아 그 계집애를 만날 때까지 두 달 밖에 안 남았으니까…’
준은 방의 한가운데 놓인 나무 대야에 들어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대야 속에는 비취색에 액체가 가득 고여 있었고, 정신을 집중하자 그 액체가 서서히 체내로 흘러들어가 준의 몸을 조금씩 회복시켜 주기 시작했다.
첨벙. 첨벙.
그 때, 자그마한 뱀 머리가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또 감췄다를 반복하며 열심히 물장구를 쳤다.
준은 몸을 적시는 액체가 바닥을 드러낼 때 쯤 눈을 떴다가 장난을 치느라 여념이 없는 이무기를 발견하고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역시 선생님이 알려주신 상처 치료약은 효과가 대단하네…겨우 3일만에 혈관이 어느 정도 회복됐어.’
정신을 차리고 난 뒤로부터 삼일, 준은 이정에게 부탁한 대량의 약재를 가지고 상처를 치료했다. 물론 첫째 날에는 몸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삼일 째부터는 꽤나 견딜만 했다.
상처 치료약을 모두 사용한 준은 대충 옷가지를 걸쳐 입은 뒤 저장반지에서 연화대를 꺼낸 뒤 그 위에 앉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준은 약로가 알려준 순서대로 몸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만 흘러간다면 한달이면 몸이 회복될 것 같았다.
* * *
몸을 회복하는 동안 무투기나 염력을 단련하는 것은 조금 어려웠지만, 대신 이정을 통해 매일 같이 대량의 약재를 사들여 연금비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제조술이 나날이 발전을 거듭했다.
지금의 준은 몇 번에 한번 정도는 3레벨의 연금 비약은 기력의 조각을 제조해내는데 성공할 수준까지 올라있었다.
아마도 대지의 불꽃과 얼음 불꽃의 정수를 합치는 미친 짓이 불꽃을 조절하는 능력을 기르는데 뭔가 대단한 영향을 미친 것 같았다.
그리고 약로가 사라진 그 날의 전투에서 준은 천지의 불꽃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불꽃을 조종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으로 깨달았다.
약로와 같은 불꽃을 써도, 약로처럼 불꽃을 조절하지 못 하는 한 그 전투력을 발끝만치도 따라갈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