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합체
“으으…아니야…그건 미친 짓이야.”
준은 자기가 떠올린 생각이 무슨 결과를 불러올지 생각하자 자기도 모르게 온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성공만 한다면 파괴력은 태양의 검 이상일거야…’
한편, 동해는 말없이 혼자서 생각에 잠긴 준을 보며 내심 준이 예린이를 포기할거라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눈앞의 마수는 준이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 여자 아이가 아무리 소중하다 한들,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크크, 드디어 포기한 거야?”
흑색 이무기의 생각 역시 동해와 마찬가지인 듯 했다.
“포기해주면 고맙지. 괜히 힘 쓸 필요도 없고.”
준이 대답이 없자, 놈은 승리를 확신하며 고개를 돌려 목연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흠…목연의 속도라면 지금쯤 안전한 곳까지 잘 달아났겠지…?”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거대한 마수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좋아! 그럼 난 이제 가본다.”
말을 마친 이무기는 거대한 꼬리를 휘휘저으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때…소년이 갑자기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하하, 뭐야, 아직도 포기를 못한 거야? 천지의 불꽃을 갖고 있는건 이미 알고 있어! 하지만 아직 그 힘을 제대로 쓸 줄 모르잖아! 조금 더 연습하고 오라고! 다음에 만나면 제대로 놀아줄테니까!”
흑색 이무기는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고 싶은 듯 몇 번이나 웃음을 터뜨려댔다.
그러나 준은 마수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양손을 하늘로 치켜 들었고, 곧이어 흰색 화염이 더욱 뜨겁게 불타오르며 밤하늘에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다음 순간…
마수의 동공이 전에 없이 커졌다.
“마…말도 안돼, 두 종류의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다고?”
……
흑색 이무기의 말대로였다. 준의 오른손에는 하얀색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지만, 그의 왼손에는 푸른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동해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돼…이놈 완전 괴물이잖아…단왕 고하조차 하나도 구하지 못한 물건을 두 개나? 아니 그보다, 왜 두 개의 불꽃을 다룰 수 있지?’
가한제국 10대 강자 중 하나인 그조차 두 개의 천지의 불꽃을 다루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했었다.
게다가 그가 알기로는 천지의 불꽃은 서로 상충되기 때문에 천운이 따라 두 개의 불꽃을 구하더라도, 과욕을 부려 두 개를 모두 삼키는 순간 체내에서 불꽃들이 충돌을 일으켜 그대로 목숨을 잃게 된다고 했었다.
‘뭐야 이 괴물은…정말 신기한 놈이군. 아니지 아니지, 그것보다, 천지의 불꽃을 왜 동시에 꺼낸건데?’
동해는 이 신기하고도 놀라운 광경에서 눈을 떼지 못 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눈앞의 소년이 푸른 불꽃과 흰 불꽃을 합치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망할, 미친 자식! 분명 미친 자식이야 저건!”
“야 이 미친놈아! 무슨 짓이야!”
그 순간, 동해와 흑색 이무기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욕설이 터져나왔다. 반응을 보아하니 흑색 이무기도 천지의 불꽃이 만나면 무슨 결과가 벌어지는지 알고 있는 듯 했다.
치이이익…찌지지직…
백색의 불꽃과 청색의 불꽃이 가까워질수록 무언가가 타오르는 소리가 나다가, 그 소리가 기묘한 파열음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콰앙!
다음 순간…폭발음과 함께 소년의 손이 터지며 새빨간 피가 팔목을 타고 흘려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두 개의 손을 더욱 가깝게 맞붙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바라보는 흑색 이무기와 동해는 온 몸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마침내 두 개의 불꽃이 맞닿자, 소년의 왼눈과 오른 눈이 각각 푸른색과 백색으로 빛나며 그의 손에서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폭발했고, 엄청난 열기에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하하! 정말이지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 놈이야!”
“이준, 젠장할! 그만둬! 진짜 터질 거야!”
그러나 지금 준의 귀에 동해의 조언이 들어올리 만무했다.
‘헤헤…절대로 못 그만둬…이번에야말로 스승님의 도움 없이…진짜 강적을 물리칠거야.’
예린도 예린이었지만, 나설아를 만난 뒤 준의 마음속에는 강해지고 싶은 열망이 천지의 불꽃보다 더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 전투에서 약로에게 몸을 맡기지 않고 약로의 불꽃과 힘을 일부만 빌린 것 이다. 여기서 물러서면 더 이상 강해질 수 없다.
준은 강해질 수 없다면 차라리 이 자리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이 미친 짓을 하고 있었으니, 동해가 뭐라하든 포기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위험을 느낀 동해가 막 날개를 펼쳐 준과 떨어지려는 순간, 갑자기 소년의 손바닥 위에 머물던 두 개의 불꽃이 합쳐지며 하늘색의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말도 안돼! 어떻게…!”
목숨을 건 도박이 성공했다. 준 역시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단 두 개의 불꽃이 합쳐졌고, 지금 그의 손에서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이하고 강렬한 에너지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죽어라!”
곧이어 준의 손에서 하늘색 불꽃이 쏘아져나가고, 거대한 에너지가 폭발하며 주위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무시무시한 폭발음이 울려퍼졌다.
찬란한 청백색의 화염이 새파란 하늘 위를 수놓는 순간 천지가 용광로처럼 달아 올랐고, 그 순간 소금성에 운집한 수 많은 사람들의 몸에서 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이게 투황인가…어떻게 이렇게 먼 거리까지 열기가 전해지지?”
……
파란 하늘 위에 아름다운 불꽃이 물결치며 뿜어낸 에너지는 수 백 미터가 지나서야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불꽃이 서서히 사그라들 무렵…
단단한 비늘이 절반 이상 떨어져나간 흑색 이무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온 몸에서는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고, 심지어 등 쪽에는 얼핏 하얀 뼈가 드러나 있었다. 6레벨 마수임을 과시하듯 힘차게 펄럭이던 여섯 개의 날개는 어느새 세 개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야 이 미친놈아!”
혼신의 힘을 다해 얼음 방벽을 만들어내 간신히 목숨을 건진 동해는 자기도 모르게 준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얼음왕의 얼음벽을 일순간에 녹여낼만한 불꽃이라니…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위력이었다.
그러나 준 역시 타격이 심각했다. 그가 입고 있던 망토는 망토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였고, 은지에게 선물 받았던 귀한 갑옷이 박살나 그 파편이 우수수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 곳곳에는 화상 자국이 가득했다.
동해는 재빨리 날개를 펄럭여 준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정신 나간 자식. 어떻게 그런 짓을…”
생사를 오가는 이준의 상태를 본 동해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이놈이…약속은 지켜야지! 죽을 때 죽더라도 비약은 주고 가라고!”
하지만 얼음왕의 가슴속에서 소년을 향한 경외감이 피어오를 무렵, 반대편하늘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미친놈! 정신 나간 놈! 저 정신병자 새끼! 독한 새끼! 자살하고 싶으면 혼자해! 개자식! 야!”
흑색 이무기는 청백색의 불꽃이 조금만 더 자신에게 가까운 곳에서 터졌다면 목숨을 잃었을 것 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눈앞의 소년이 불꽃을 조금만 더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면, 그래서 조금만 더 가까이에서 불꽃이 터졌다면…자신은 비명도 지르지 못 하고 타죽고 말았을 것 이다.
“이런…!”
동해는 아직 흑색 이무기가 죽지 않을 것을 보자마자 즉시 남아있는 염력을 쥐어 짜냈다.
하지만 놈은 소리만 지를 뿐, 주춤거리며 다가오지 못 하다가 결국 욕설을 퍼부으며 등을 돌렸다.
“젠장! 미친놈은 피하는게 상책이랬어! 앞으로도 너랑은 안 싸울거야! 이 미친놈! 죽으려면 혼자 죽어! 에이 더러운 놈! 나쁜 놈! 이 정신병자 새끼!”
얼음왕은 욕설을 퍼부으며 달아나는 거대한 뱀을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껌뻑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반사적으로 염력을 끌어올리기는 했지만, 그 역시 도저히 전투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나름대로 견문이 넓다고 자부했는데…내가 살면서 만난 제일 대단하고 미친놈이 이렇게 어린 놈일 줄이야…”
동해는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정신을 잃은 준을 끌어 안은 채 날개를 펄럭여 자리를 떠났다.
……
잠시 후…그들이 떠난 자리에 노인 하나와 여자 하나가 나타났다.
노인은 평범해 보이는 노란 옷을 걸치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광채가 번쩍이고 있었다.
반면 화려한 보라색의 망토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위로는 눈부신 금빛으로 봉황이 새겨져 있었다.
“하하, 율희 종주, 몇 년 못 봤을 뿐인데 바람 속성 염력이 더 맑아진 것 같습니다. 이 속도라면 저조차 종주님의 발끝도 못 따라가겠군요.”
“하하…장로님처럼 산까지 뚫을 듯한 염력을 갖추신 분이 무슨 말씀을…멀리서부터 그 기운을 감지하고 기가 죽어서 올까말까 고민했는걸요.
“휴, 그래봤자 나이는 못 속입니다.”
장로라고 불린 노인은 겸손하게 고개를 저은 뒤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래도 우리가 좋은 구경거리를 놓친 것 같지요?”
“그러게요. 네 명의 투황이라니…예사롭지 않은 일이네요.”
“그 중 둘은 가한제국 사람은 아닌 것 같군요. 나머지 둘도 어느 지역강자인지 신원이 정확하지가 않고…그런데 아직까지 남아있는 이 강렬한 염력은 대체 뭘까요? 이 정도 힘이라면 이 노인네는 한방에 중상을 입고 말았을 겁니다.”
“가한제국 어디에 이런 강자가 있었는지 얼굴이라도 좀 보고 싶네요.”
율희는 노인의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갑자기 허공에 손을 뻗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손에 놓인 작은 금속 조각을 바라봤다.
“이건…바다의 갑옷 조각이잖아?”
율희는 자신의 손에 놓인 푸른 금속 조각을 몇 번이나 다시 둘러봤다.
아무리 봐도 바다의 갑옷이었다.
‘바다의 갑옷 조각이 어떻게 여기서 나타나지? 설마 그 녀석도 여기에 있었다는 거야? 바다의 갑옷까지 이렇게 부서질 정도면 엄청난 중상을 입었을 텐데. 어쩜 그 자식은 사건 사고마다 빠지지를 않지?‘
한편, 율희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하자, 노인이 그녀에게 다가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종주님, 뭐 재밌는거라도 발견하셨습니까?”
“하하, 아니에요.”
율희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여기 있던 자들의 신분을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타국의 투황이 이곳까지 왔다는건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테니까요.”
노인은 율희의 말을 듣자마자 무언가가 있음을 확신했다. 그가 아는 운남종의 종주는 이런 일에 흥미를 갖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까 그 금속 조각이 대체 뭐길래…’
하지만 이 자리에서 채근한다고 답할 것 이었다면 처음부터 숨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노인은 율희의 손에 쥐어진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아래는 소금성이에요. 문씨 가문 총본부도 저 곳에 위치하고 있으니 우선 정보부터 수집해보죠.”
율희가 씨익 웃으며 소금성을 향해 날아가자, 노인도 즉시 그녀의 뒤를 따랐다.
* * *
3일 후, 모래 바람성, 사막의 칼날 용병단 본부.
조용한 방 안에는 은은한 나무향이 감돌고 있었고, 방 한 구석 놓인 침대 위에는 소년 하나가 눈을 꼭 감은 채 누워있었다.
소년의 숨은 금방이라도 멈출 듯 가느다랗고 미약해 보는 사람이 다 가슴을 졸일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