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고공전투
“가한제국 사람들이 무례한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포악할 줄이야…정말 너무하는군.”
공격을 막아낸 뒤, 여인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녹색의 염력을 끌어내 준을 후려쳤다.
“여기는 너희 구역이고, 너희랑 싸우고 싶지도 않아.”
푸른 옷의 여인은 순식간에 두 명의 투황을 떨쳐낸 뒤 자신만만한 태도로 입꼬리를 올렸다.
“걱정마. 여자아이한테 해를 입히진 않을거야. 문씨 가문의 역겨운 이식술 같은건 내 취향이 아니거든.”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녹색 날개를 퍼덕이며 자리를 뜨려했다.
동해가 그녀를 막기 위해 다시 한번 얼음을 날려보았지만, 아직 실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인 그로써는 푸른 옷의 여인을 막을 수 없었다.
“하하, 안녕! 다음에 보자구!”
동해의 얼음을 가볍게 떨쳐낸 여인이 쏜살같이 달아나자, 준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뒤를 쫓았다.
“어딜가!”
반면, 동해는 잠시 망설이며 인상을 구겼다. 그는 두 어번의 공방을 통해 여인의 실력이 자신이나 준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깨달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 동해의 머릿속에 준이 약속한 5레벨의 연금비약이 아른거렸다.
“후…”
동해는 한숨을 내쉬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소생의 비약을 포기할 수 없었으니, 결국 그도 날개를 펼칠 수 밖에 없었다.
……
세 투황의 교전으로 연회장은 순식간에 전쟁이라도 벌어진 듯 엉망이 되었고, 사람들은 풍비박산이 난 연회장에 서서 멍청하니 세 명의 투황이 향한 방향을 바라볼 뿐 이었다.
몇 분 뒤…멍한 표정으로 사람들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보던 나설아가 입을 열었다.
“도담 장로님, 가죠…이제 여기에 남아있을 필요도 없으니 빨리 돌아가서 스승님께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도담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빛은 아직도 귀신에 홀린 듯 초점을 잃은 상태였다.
‘어떻게 3년 만에 투황이 된 거지…?’
짙푸른 하늘 위에 세 개의 에너지가 화살처럼 공기를 뚫고 날아가자, 소금성이 발칵 뒤집혔다. 세 명의 투황이 벌이는 추격전이라니…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녹색 빛을 따라 흰 빛이, 그리고 다시 그 흰 빛을 따라 파란 빛이 꼬리를 물고 밤하늘을 가르는 광경은 사람들을 평범한 공포에 질리게 하기에 충분했고, 일부 용감한 투사들은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기도 했다.
동해는 푸른 날개를 힘차게 펄럭이면서 메마르고 주름진 손에 푸른 염력을 모아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잠시 후, 동해가 손을 내밀어 100미터 전방의 얼음 속성 에너지를 조종하기 시작하자, 허공에 은은하게 냉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
“가시 수정!”
이윽고 동해의 목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지자 여인과 십 여 미터 떨어진 지점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흰색 안개가 자욱하게 끼며 거대한 얼음 벽이 생겨났는데, 얼음벽의 표면에는 칼날같이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쳇!”
얼음벽을 발견한 여인은 왼손으로 의식을 잃은 예린을 안은 채 오른팔로 녹색의 염력을 내뿜어 거대한 넝쿨을 얽어내 거대한 주먹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여인이 만들어 낸 거인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무지막지한 굉음과 함께 얼음벽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하, 무시무시한 괴력이야……”
동해와 준은 여인이 만들어낸 거대한 주먹의 파괴력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바로 그 때, 거대한 주먹이 즉시 방향을 돌려 준을 향했다.
“이런 젠장!”
준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주먹에 대항해 즉시 백색화염을 끌어 올렸다.
쾅!
백색 화염과 녹색 염력이 부딪히며 일어난 거대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자, 동해가 만들어 낸 거대한 얼음벽이 산산조각 났다.
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여인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혼자였다면 널 당해낼 수 없었겠지만, 이쪽은 둘이야. 어서 예린이를 내놔.”
“미안하지만 그건 안되겠는데? 난 이미 몇 십년간 이 뱀의 눈을 찾아헤맸다고. 너희가 둘이 아니라 셋, 아니 열이라도 난 이 아이를 포기할 수 없어.”
의식을 잃은 예린을 보는 준의 눈에는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준이 다시 한번 전력을 다해 정체불명의 여인을 향해 돌진하는 순간, 반대 방향에서 동해 역시 여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흥, 사내들이 비겁하게…”
여인은 짜증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품에서 작은 피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삐이-
그리고 피리 소리가 울린지 불과 수 초 뒤, 숲속에서 커다란 굉음이 울리며 거대한 마수 하나가 날아올랐다. 거대한 체구의 마수는 기다란 몸체에 뱀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으며,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셋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마수는 방대한 몸집을 갖고 있었고, 전신이 칠흑같이 새카맣게 뒤덮여 있었는데 그 위로는 신비로운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또, 놈의 몸 몸 양쪽에는 여덟 개, 총 네 쌍의 짙은 보라색 날개가 펄럭이고 있었고, 머리 위엔 까만 뿔이 달려 있었는데,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모양새를 보니 맹독이 묻어 있는 듯 했다.
“설마…흑색 이무기?”
“선배님, 저 마수를 아세요?”
동해가 그 마수를 알아보자, 준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동해를 바라봤다. 척 보기에도 검은 마수는 투황급의 마수로 보였기 때문이다.
“흑색 이무기는 1격 마수야. 본래는 3레벨의 날개 뱀이지만, 한단계씩 승급할 때마다 날개가 늘어나지. 그리고 3번의 승급을 거쳐 8개의 날개를 갖게 되지…그리고 8개의 날개를 가진 날개 뱀은 ‘흑색 이무기’라고 부르네. 6레벨 마수야…”
드넓은 하늘 위에 네 개의 거대한 염력이 휘몰아치며 폭풍을 일으키자, 구름마저 산산이 찢겨 허공에 흩뿌려져 장관을 연출했고, 멀리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소금성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하하, 천하의 목연이 꽁무니를 빼다니, 별 일을 다 보겠군.”
한편, 허공에서는 두 명의 투황을 노려보던 흑색 이무기가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 멍청이가…지금 애 안고 있는거 안보여? 그리고 정말로 저 녀석들과 싸울 마음이 없다구.”
마수의 조롱에 여인은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그보다…정말 뱀의 눈이 맞아?”
“응. 네 탐지 능력도 꽤 쓸 만 하더라. 확실해.”
그러나 흑색 이무기가 진지한 목소리로 뱀의 눈에 대해 묻자, 목연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
여인의 대답에 뱀 형상의 마수는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며 다시 눈앞에 있는 두 명의 투황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뭔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뭔가 익숙한 기운인데?”
검은 마수의 말에 목연 역시 준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흠…너도 그렇다면 내가 잘못 느낀게 아닌가보네, 사실 저 자 때문에 모습을 드러낸 거거든…그런데 도통 누군지 모르겠단 말이야? 저렇게 특이한 불꽃을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잊을 리가 없는데 말이야.”
“저거 확실히 천지의 불꽃 맞지?”
마수는 준의 몸에서 일렁이는 하얀 불꽃에서 눈을 떼지 못 하고 있었다.
“응, 확실해. 붙어보니까 위력도 상당하고. ”
“호오…가한제국에 발을 들이지 않은지 몇 년이나 됐다고…겨우 그 몇 년 사이에 저런 놈이 나타났단 말이야?”
거대한 뱀이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거리자, 목연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됐어, 쓸데없는 생각하지마. 이렇게 소란 피우다가 운남종이나 황실에서 사람을 보내면 일만 커진다고.”
“네네, 잔소리꾼 마님. 그래도 조금 아쉽네. 메두사 여왕이랑 붙어보고 싶었는데…정말 진화에 실패한걸까?”
“푸하하, 웃기고 있네. 지난번에 메두사한테 그렇게 당해놓고는 무슨!”
마수의 말에 목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흥, 아니라니까. 다시 붙으면 이길 수 있어! 어쨌든…지금은 급하니까 그 꼬마 계집을 데리고 도망 가. 여긴 내가 맡을게. 십 분 뒤에 거기서 보자고.”
흑색 이무기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더니 갑자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치, 허세는…알았어! 어쨌든 조심해 두 놈 다 제법이니까!”
목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시커먼 형체가 득달같이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긴 어딜가! 예린이 내놓으라고!”
“하하, 네 상대는 나야.”
그러나 검은색의 거대한 마수가 즉시 소년을 막아서며 세차게 꼬리를 휘두르자, 준은 푸른 옷의 여인과 자신의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젠장! 선배님!”
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10미터도 넘는 얼음칼이 허공에 나타났다.
“동생, 피하게!”
동해가 이제껏 본 적 없던 살기 등등한 표정으로 거대한 얼음칼을 휘두르자, 거센 폭풍이 일며 서늘한 냉기가 사방에 휘몰아쳤다.
“하하! 제법이군. 하지만 나는 6성 투황이야! 기껏해야 2성 투황 주제에!”
흑색 이무기는 동해의 거대한 얼음칼을 보고도 당황하기는커녕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쳐들었고, 순식간에 그의 머리에 새까만 화염이 모여들었다.
쾅!
곧이어 시커먼 화염과 새하얀 얼음칼이 부딪히는 순간, 소름 끼치는 폭발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태초의 힘!”
바로 그 때, 짤막한 외침 소리와 함께 마수의 등 뒤에 백색 화염을 몸에 두른 이준이 나타났다.
퍽!
그러나 준의 주먹이 마수의 몸통에 꽂히려는 찰나 흑색 이무기가 허물을 벗었고, 결국 준의 주먹은 속 빈 강정같은 마수의 빈껍데기만 꿰뚫었을 뿐 이었다.
“아 뜨거!”
하지만 그 와중에 얼음 불꽃의 정수가 마수에게 조금 옮겨 붙은 상태였으니, 흑색 이무기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자식이!”
마수는 몸에 붙은 불이 자신의 살을 태우는 통증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며 즉시 꼬리를 휘둘러 준을 후려쳤다.
“컥!”
등 뒤로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에 소년은 실 끊어진 연처럼 날아가며 검붉은 피를 토했다.
‘윽. 내 힘이 아니니 아직 컨트롤하기 힘들군.’
준은 소매로 입가에 묻은 혈흔을 닦아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이 광경을 본 동해가 쏜살같이 준의 곁으로 날아왔다.
“동생!”
“괜찮습니다 선배님…그보다…!”
준은 손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내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나…이미 그의 눈이 닿는 어디에서도 예린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큰일이군…저 마수를 무시하고 그 여자를 쫓는 것은 어려울걸세. 저 놈이 우릴 그냥 가게 둘리가 없어. 게다가 놈의 비늘이 너무 단단해. 천지의 불꽃이 아니라면 자네와 내 힘으로는 비늘조차 뚫을 수 없을거야.”
동해의 말대로였다. 게다가 얼음 불꽃의 정수는 약로의 것이고, 지금 그가 사용하고 있는 영혼의 힘 역시 약로의 것이었으니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후…어떻게 해야 하지…?“
준은 입가를 따라 흐르는 선혈을 닦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태양검’ 뿐 이었지만, 그 역시 완전하지 않아 결과를 장담할 수 없었다.
‘별 수 없나…’
하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면 예린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몰랐으니, 준은 결국 이를 악물고 검은 송곳을 움켜잡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준의 손이 차가운 금속에 가 닿는 순간, 문득 그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