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푸른 옷의 여인
검은 망토의 사내는 피를 토하며 바닥을 기고 있는 문승을 향해 번개처럼 다가가더니 즉시 그의 목을 움켜쥐었고,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가한제국의 동북 지역을 완벽하게 장악하려던 문씨 가문의 대장로가 하찮은 벌레마냥 짓밟히는 모습에 장내의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곧이어 사내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문승의 얼굴이 새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사내가 한 번만 더 힘을 주면 문씨 가문의 대장로는 숨이 끊어질 것이 분명했다.
“이…이보시오! 뉘신 지는 모르겠으나 대화로 하면 안 되겠소?”
그 때, 도담이 떨리는 목소리로 정체불명의 사내를 말리려 들었다.
하지만 사내는 싸늘한 시선으로 도담을 한 번 바라본 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오른손을 휘둘렀다.
“크으으으으으…!”
다음 순간…문승의 오른손 팔꿈치 아래 부위가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하지만 목을 잡힌 문승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고 끔찍한 고통에 미친 듯이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잇따른 참극에 장내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소리조차 내지 못 하고 이 광경을 바라볼 뿐 이었다.
설아와 도담 역시 감히 나설 수 없었다. 운남종의 대리인 자격으로 왔다고는 하나, 그들의 실력으로 눈앞의 사내에게 달려들었다가는 한순간에 재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그 둘이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검은 망토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데려와. 지금 당장.”
말을 마친 사내는 문승의 대답을 듣기 위해 잠시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그러나, 문승의 입에서는 그가 기대했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날 죽이면! 그 계집애 목숨도 절대 무사치 못할 거야!”
“하하하…정말 어처구니가 없군.”
준은 문승의 대답을 듣자마자 당장이라도 그를 죽여버리고 싶었지만, 예린을 위해 가까스로 화를 눌러 참으며 문씨 가문의 호위 무사들을 바라봤다.
“후…더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마라. 너희들 중 누구라도 여자 아이를 데려와. 그렇지 않으면 이 자식의 온 몸을 방금 본 것처럼 잘근잘근 토막내주마. 그래도 예린이를 데리고 오지 않는다면…문씨 성을 가진 모든 놈들을 찾아 이놈을 죽인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죽여주지.”
그러나 문승은 준의 인내심을 확인하듯 다시 한번 그의 성질을 긁어놓았다.
“흥! 소용 없다. 우리 가문에서 내 명령을 어길 사람 따위는 없어.”
그리고 문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준의 온 몸에서 백색 화염이 치솟았다.
“한번만 더 입을 열면, 그 땐 혀를 뽑아주지. 부디 이번에도 내 협박에 굴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난 네 놈 혀를 뽑아버리고 싶어 안달이 나있거든.”
사내의 목소리에 묻어나는 진한 살기에 문승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바로 그 때, 화려하게 빼입은 중년의 사내 하나가 연회장에 가득한 사람들을 가로지르고 달려 나왔다.
“저는 문씨 가문의 가주 문림이라고 합니다. 혹시 저희 대장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이러시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는 잠시 말없이 문림을 바라보다가 예의 그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0분 주지. 예린이라는 여자 아이를 데려와라. 내가 해줄 말은 그것뿐이다.”
이윽고 사내의 발치 주위의 땅이 굉음과 함께 갈라지기 시작했고, 이 광경을 보는 순간, 도담과 설아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투황…?”
‘여자아이라면 장로님께서 데려온 그 애를 말하는 건가? 젠장…대체 그 이의 정체가 뭐길래…투황이 직접 찾아온거야?‘
문림 역시 눈앞의 사내가 투황이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정말로,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오늘이 문씨 가문의 마지막이 될 것이 분명했다.
“기..기다리시오! 제가 그 아이를 데려오겠습니다.”
그러나 문림이 몸을 돌리는 순간, 문승이 버럭 고함을 쳤다.
“멈춰! 문림! 누구 마…어억…!”
“꺄아아아악!”
그 때, 연회장 한가운데에 시뻘건 선혈이 솟구치고,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검은 망토의 사내가 약속을 지킨 것 이다.
곧이어 사내는 자신이 잘라낸 문승의 혀를 보란 듯이 연회장 중앙으로 집어던졌다.
“난 약속을 지킨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게 그 증거다.”
이윽고 바닥에 검붉은 살덩어리가 떨어지는 순간, 결국 도담이 입을 열었다.
“저희 운남종을 봐서라도 장로님을 놓아 주십시오!”
“……”
하지만 운남종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상대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도담이 이를 악물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도담의 공격이 일으킨 바람에 사내의 얼굴을 가린 망토가 살짝 들리는 순간, 도담은 자신의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무언가가 관통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쿵…!
사내가 가볍게 손을 한번 휘두르자 도담은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 마냥 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너…”
도담은 한 눈에 준을 알아봤다. 3년 전의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 이다.
하지만…3년 만에 투황이 되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세상 그 어떤 천재라 해도 3년 만에 투황이 될 수는 없었다.
“아저씨, 괜찮아요?”
잠시 후, 설아가 뱀 앞에 선 개구리 마냥 굳어버린 도담에게 달려갔다. 그녀는 멍하니 아무 말도 하지 못 하는 도담을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검은 망토의 사내를 노려봤다.
“지금 이건 운남종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
허나 투황급 강자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운남종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 뿐 이었다. 지금 그녀의 실력으로는 싸움을 걸어봤자 1초만에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운남종도 갈 때까지 갔군. 차기 종주라는게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게 운남종의 이름을 들먹이는 것 뿐인가? 맘대로 생각해라. 실력이 없으니 그딴 질문이나 하겠지.”
“이 자식…”
그러나 검은 망토의 모욕적인 말에도 설아는 주먹을 불끈쥐고 부들부들 떨 뿐, 감히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한심하긴…꺼져라. 아니면 오늘 운남종의 후계자도 이 꼴로 만들어주지.”
검은 망토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백색화염을 뿜어내며 문승을 향해 다가갔다.
“잠시만요! 예린이라는 여자 아이에게는 정말로 아무런 해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저희 장로님을 살려주십시오!”
바로 그 때, 문승이 무언가를 결심한 듯 이를 악물고 왼팔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손이 기이하게 뒤틀리며 거대하게 변했고, 시꺼멓게 물들었다가 이내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수의 팔이라니? 설마 장로님께서 5레벨 마수의 앞 다리를 직접 몸에 이식하셨던 말인가!’
문승의 팔이 거대하게 변하는 순간, 문씨 가문의 투사들조차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잠시 후, 검은 망토는 혀를 끌끌 차며 추악한 모습으로 변한 문승을 향해 새하얀 화염을 내뿜었다.
바로 다음 순간, 문승을 감싼 거대한 흰색 화염이 얼음 기둥으로 변화했고, 연회장에는 갑자기 마수의 팔을 가진 인간의 조각상 하나가 생겨났다.
쩌억……
곧이어 얼음 조각이 힘없이 갈라진 뒤 불타면서 문씨 가문의 대장로를 재조차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지워버렸다.
생전 처음 보는 기괴하고도 끔찍한 장면에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은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검은 망토는 공포에 질려있는 좌중을 가르고 발걸음을 옮기다가 나설아를 한번 힐끗 쳐다보고는 문림을 향해 다가갔다.
제 아무리 운남종의 차기 종주라도 감히 투황 강자에게 대적할 수는 없었으니, 나설아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사내의 시선을 느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이를 악물고 분을 삼킬 수 밖에 없었다.
“곧 있으면 10분이다. 내가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는지는 이미 눈으로 확인했으니 부디 예린이가 빨리 도착하기를 비는게 좋을거야.”
“네… 곧, 곧 올 겁니다.”
문림은 온 몸을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며 사내와 눈조차 마주치지 못 했다. 눈앞의 사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오늘 자신을 비롯해 문씨 성을 가진 모든 이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5분 남았군.”
그렇게 무거운 침묵 속에 1시간 같은 1초 1초가 흘렀고, 약속한 10분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을 때, 갑자기 준의 머릿속에 약로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조심하거라.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익숙한 냄새가 나는구나.”
“네? 무슨 뜻이죠?”
“방금 무언가 거대한 파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파동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해.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구나. 다만 예린이를 구하면 즉시 이곳을 떠나는게 좋을 것 같구나.”
준은 굳은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약로가 이렇게 경고할 정도라면 상대는 최소한 투황급 이상의 강자라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 가냘픈 여자 아이 하나가 연회장으로 들어왔고, 사람들은 여자 아이를 보자마자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동부 지역의 최강 가문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이유가 고작 이렇게 작은 여자 아이 때문이라니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 이다.
“보, 보십시오. 조금의 상처도 입지 않았습니다.”
문림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손을 덜덜 떨며 예린의 손을 잡고 준을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준이 막 손을 빧으려는 순간…
쾅!
엄청난 폭발음이 고막을 때리더니, 딱딱한 바닥이 갈라지면서 초록빛 나뭇잎과 가지들이 휘날리며 준을 휘감았다.
쉭!
다음 순간, 푸른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예린을 낚아채 하늘로 튀어 올랐고, 준은 즉시 백색화염을 내뿜어 자신을 에워 싼 방해물들을 모조리 재로 만든 뒤 갑자기 난입한 괴한을 쫓아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선배님!”
그 순간, 준이 황급히 날개를 펼치며 허공에서 대기하고 있던 동해를 불렀고,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백발의 노인이 나타나 괴한의 앞을 가로 막았다.
나설아와 도담을 비롯한 모든 사람의 시선이 순식간의 세 명의 투황으로 향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투황 한 명을 보는 것도 평생 있을까 말까한데, 한 자리에서 세 명이라니, 눈이 휘둥그레지지 않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호호, 걱정마. 이 아일 해칠 생각은 없으니까, 일이 이렇게 꼬일 줄 알았으면 진작에 움직이는건데 말이야. 문씨 가문의 이식술도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고…이런거였으면 굳이 몰래 배울 것 까지도 없었을텐데 말이야.”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의 입에서 이식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문림을 비롯한 문씨 가문 사람들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
“당신은 누구지? 예린이를 내놔.”
정체불명의 여인에게 다시 예린을 빼앗긴 준의 목소리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꼬마의 이름이 예린이야? 호호, 예쁘네.”
그녀는 준의 살기등등한 목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예린의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만족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나…정말로 뱀의 눈이네. 역시! 백아의 예상이 맞았어,”
여인의 태도로 보아 뱀의 눈을 노리는 것이 틀림없었다.
준은 그녀가 예린을 놔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몸에서 화염을 내뿜으며 여인을 향해 몸을 날렸고, 그와 동시에 동해에게서 날카로운 얼음 가시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이 녹색의 가시 넝쿨로 된 채찍을 꺼내들어 휘둘러 동해의 가시를 막아내고, 반대쪽 손으로 거대한 나무를 불러내 준의 공격을 방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