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소란
어두컴컴한 밀실…
“문석, 준비는 어떻게 돼가지?”
입을 연 것은 회색 망토를 걸치고 머리 위에 온통 서리가 내려 앉은 노인이었다.
“대장로님. ‘뱀의 눈’을 가진 아이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중년의 사내가 입을 열자, 노인의 눈꺼풀이 흥분으로 가늘게 떨렸다.
“우리 문씨 가문에 이런 운이 따라줄 줄이야. 전설 속에서만 보던 뱀의 눈을 가진 아이를 찾아내다니…그 눈동자만 얻으면 우린 더욱 성장할 수 있어. 그렇게만 된다면 운남종이고 뭐고 모두 우리 문씨 가문 앞에 무릎을 꿇게 될거야.”
노인은 잠시 차가운 웃음을 흘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참, 모래바람성 쪽으로 보낸 놈들에게서는 아직 소식이 없나? 사막의 칼날 용병단 녀석들은 말끔히 해치웠겠지? 그 놈들이 뱀의 눈에 숨겨진 비밀에 대해 알고 있을 수도 있으니 이야기가 퍼지기 전에 반드시 처리해야해.”
“아… 그게, 아직 소식은 없습니다만 문영 정도의 실력자라면…”
“중요한 일이니 확실히 처리해.”
“네…”
‘대장로’라 불린 백발의 노인은 혹시라도 일을 그르칠까 싶어 상당히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인 듯 했다.
“신분이 불분명하다는 두 놈은?”
“그게…조사를 해봤습니다만…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놈들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최대한 사람들을 붙여서 감시하게 해. 오늘 연회가 끝나면 뱀의 눈을 이식할테니 아주 작은 문제도 있어서는 안 된다.”
“네.”
그렇게 계속해서 보고가 이어졌다.
“아, 장로님 나설아도 왔습니다.”
“그래, 알고 있다. 문려와 나설아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더욱 신경 쓰도록. 아직은 운남종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려도 노력은 하고 있지만 생각처럼 쉽게 넘어오지 않는 모양입니다.”
“쯧… 일단 그건 문려 놈에게 맡겨라. 억지로 되는 문제는 아니니까, 너희들은 나머지 문제에 각별히 신경 쓰도록.”
“네!”
* * *
문씨 가문의 연회장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사방에서 떠들썩한 소음과 함께 축하 인사가 끊이질 않았다.
연회장의 높은 단상 위에 놓인 커다란 의자에는 백발의 노인이 웃음을 지으며 앉아 있었는데, 그 앞으로는 수많은 손님들이 선물을 들고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단상 위에 앉은 사내는 바로 문씨 가문의 대장로인 문승이었다.
“소금성의 주인이신 반야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잠시 후, 대문에서 큰 소리가 울리자 시끌벅적했던 연회장이 금새 조용해졌고, 사람들의 눈빛이 모두 대문 쪽을 향했다. 도시의 군주가 직접 연회장까지 방문하는 것은 매우 드문 광경이었으니, 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문씨 가문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하하, 문승 장로님 축하드립니다.”
이윽고 대문 쪽에서 몸에 화려한 장신구를 가득 두른 뚱뚱한 남성이 호탕하게 웃으며 연회장으로 입장했다.
“하하! 반야님, 직접 발걸음을 해주시다니…정말로 영광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그렇게 두 사람이 웃으며 몇 마디를 나누는 사이, 입구 쪽에서 또 다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유씨 집안의 주인이신 유총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야 때와는 달리 문승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유씨 가문은 동북 지역의 3대 가문 중 하나로, 문씨 가문만은 못 하지만 나름대로 세가 있는 가문이었고, 문씨 가문과는 상당히 관계가 좋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허허, 문승 장로님! 여전히 정정하시군요 우리 동북 지역 전체가 곧 장로님 손바닥 안으로 들어가겠어요!”
잠시 후, 핼쑥한 모습의 중년 남성이 웃으며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자, 문승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유씨 집안에서도 와주실 줄이야! 생각도 못 했군요! 감사합니다!”
그 뒤로도 끊임없이 각 지역의 수장들이 문승을 찾아와 축하 인사를 건넸고, 그야말로 문씨 가문의 행사는 각지에서 찾아든 방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리고 웬만한 가문의 인사들은 다 얼굴을 비췄다고 생각할 무렵…누군가의 방문을 알리는 목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이번 방문객에 대한 문승의 반응은 누가 봐도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자리에 앉아 인사를 받기만 하던 문승이 벌떡 일어나 손님을 맞이하러 달려나간 것 이다.
문이 열린 곳에는 아름답고 고고한 인상의 어린 미녀 하나가 서 있었다.
“하하, 나설아님! 이렇게 먼 곳까지 친히 와 주시다니! 이 문승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운남종의 제자 나설아라고?”
“흥분할 만도 하지. 엄청난 손님이 왔군!”
“운남종의 차기 종주가 직접 올 정도면 소문대로 정말 돈독한가봐.”
여인의 신분이 공식적으로 확인 되자 연회장의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운남종의 차기 종주이자, 나씨 가문의 여식. 확실히 인물은 인물이었다.
“부담 가지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도 스승님의 명을 받아서 오게 된 걸요.”
설아가 싱긋 웃으며 공손하게 답하자, 유총이 질투 어린 시선으로 나설아와 문승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그렇게 연회장의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을 때…대들보 위에는 망토를 걸친 이준이 이 광경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웃고 있었다.
“저 자식이 문씨 가문의 대장로겠군요.”
이준은 백발 노인을 턱짓으로 가리키자, 동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저 자가 문승이야. 이제 어쩔텐가?”
“흠…잔치가 열렸으니 분위기를 달궈 주는게 손님된 도리겠죠? 저 자가 정말 문씨 가문의 기둥 같은 존재라면, 저 사람을 혼내주는 편이 분위기가 달아오르겠네요.”
동해는 소년의 독사 같은 눈빛을 바라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장탄식을 내뱉었다.
“쯧쯧…어지간히도 재수 옴 붙은 놈이군…”
곧이어 문승이 대화를 마치고 걸음을 옮기며 박수를 몇 번 치니, 시끌벅적했던 장내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 앉았다.
“하하, 이 늙은이를 위해 여기까지 자리해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보낸 초청장에도 써 있었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과 아주 중대한 일에 대해 한번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문승의 한 마디에 모든 사람이 귀를 쫑긋 세우고 그를 바라봤다.
“최근 저희 문씨 가문 내부에서 상의를 거친 결과, 서로 우호적인 세력끼리 함께 뭉쳐 서로 이익을 주고받을 수 있는 조직을 만들고자 합니다. 이 연맹에 가입 하신다면 누구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저희 문씨 가문의 정보와 무력을 제공 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만일 관심이 있으시다면 저희의 계획에 힘을 보태어 주시지요.”
문승의 제안에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말로는 ‘조직’이니, ‘연맹’이니 했지만, 사실상 문씨 가문의 산하로 들어오라 이야기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잠시 후…비교적 세력이 약한 가문들이 손을 들고 나섰고, 그러자 눈치가 보인 나머지 세력들도 하나 둘 손을 들기 시작했다.
문승은 이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겸손한 척 입을 열었다.
“문씨 연맹이 아직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임시적으로 지휘할 사람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아무래도 이 연맹에 가입하신 분들의 의견에 따라…”
“당연히 문씨 가문의 장로님께서 맡으셔야지요.”
이번에도 문승의 예상대로, 그를 대표로 추대하겠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하, 그러시다면 일단 제가 문씨 연맹을 일시적으로 이끌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문승은 몇 몇 사람들이 손을 들자,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척 곧장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바로 그 때…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사내 하나가 연회장 중앙에 모습을 드러냈다.
“죄송하지만 장로님…당신은 그 연맹을 관리할 시간이 없으실 것 같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 사내의 언행에 모든 이목이 그에게로 집중됐다.
그의 존재에 놀란 것은 나설아와 도담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말 없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그가 바로 오늘 숙소에서 만났던 자인지를 확인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문승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망토를 뒤집어 쓴 준을 노려봤다.
“당신이 문승이죠? 내가 할 얘기가 좀 있어서 말이에요.”
하지만 정체 불명의 사내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은 듯 태연하게 할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제 생일인만큼 만나 뵈어야 할 분이 많으니 연회가 다 끝난 다음 이야기를 나누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문승은 끌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살기 가득한 억지 웃음이었다.
그러나…상대의 도발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만나 봐야할 사람이 많다고? 그래봤자 운남종을 졸졸 쫓는 개새끼 아니었나? 내가 보기에는 운남종의 후계자와 인사를 나눴으면 여기 있는 나머지 사람들은 다 안중에도 없을 것 같은데?”
사내의 계속되는 폭언과 무례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급속히 얼어붙기 시작했고, 이제 문승의 얼굴에서는 억지 웃음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
“제가 장로가 된지도 벌써 수 십년이 됐지만 이렇게 저희 가문의 안방까지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분은 처음이군요.”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요? 진짜 행패가 뭔지 한번 보여드릴까요?”
결국 준의 마지막 한마디에 문승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하하, 미친놈! 겁도 없구나!”
문승이 광기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염력을 폭발시키자 그로 인해 주변에 있던 탁자와 의자가 모두 산산조각 나버렸다.
“저희가 개입해야 할까요?”
한편, 나설아는 갑자기 벌어진 뜻 밖의 상황에 도담의 의견을 물었다. 이런 일에 대해서는 경험 많은 도담이 훨씬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기다려보지요. 망토 입은 사람의 정체를 알 수가 없으니 함부로 나서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요즘 들어 문씨 가문에서 도를 넘는 행동을 하는 것도 사실이니 분명 불만을 가진 사람도 많을테니까요.”
장내에 있던 사람들 중 대다수는 문승의 무시무시한 염력에 겁을 집어 먹었지만, 준은 그런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예린이를 내놔. 안 그러면 행패 정도로는 안 끝날테니까.”
소년의 말에 문승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하게 굳어갔다.
“저 놈을 죽여 버려!”
문승의 명령이 떨어지자, 문씨 가문의 투사들이 일제히 염력 갑옷을 걸친 뒤 무기를 손에 들고 달려나갔다.
그러나 검은 망토는 이 광경을 보고도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제자리에서 눈부신 백색 불꽃을 뿜어내 자신의 몸에 두를 뿐 이었다.
“헉…”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의 몸에서 타오르는 백색 불꽃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문씨 가문 무사들의 무기를 엿가락처럼 녹여버렸고, 심지어 사내의 가까이에 다가간 두 명의 무사는 비명조차 못지르고 잿더미가 되어버렸다.
불과 1~2초 사이에 벌어진 참극에 장내가 차갑게 얼어 붙었다.
도담과 설아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저건…이화인가?”
“굉장하군요…섣불리 나섰다면 무슨 화를 입었을지 모르겠어요…”
“넌 누구지? 설마 문씨 가문에 와서 이렇게 행패를 부리고도 무사할거라고…”
문승의 말에 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원한? 예린이를 내놓으라고 했을텐데? 내 입에서 다시 한번 같은 말이 나오는 순간이 문씨 가문이 멸문하는 날이야.”
하지만 문승은 여전히 예린을 포기할 마음이 없는 듯 준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군…”
다음 순간, 문승은 갑자기 염력을 끌어올리더니 염력을 응집한 손으로 맹수처럼 검은 망토를 두른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정체 불명의 사내가 가볍게 손을 휘두르는 순간, 문승의 몸뚱아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랐다가 굉음을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의 입에서는 붉은 선지 피가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정말 마지막이다. 예린이를 데려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