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나설아
“사막의 칼날 용병단을 싹 쓸어버리라고 했다가 실패했으니 분명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뭔가 다른 수를 쓰려 하겠죠. 그 전에 치는게 나아요.”
“운남종이 그를 대신해 복수해올 게 두렵진 않나?”
동해의 질문에 준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운남종이 이런 촌구석 가문을 위해 투황 두 명과 대적하려 할까요?”
“투황 두 명? 괜히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라고. 왜 이래!”
‘두 명’이라는 말에 동해는 정색을 하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아, 설마 천하의 얼음왕이 운남종을 두려워 하는 것은 아니겠죠 선배님?”
“흥, 그런 뻔히 보이는 수법으로 자극하지 말아. 내가 운남종을 싫어하는 건 맞지만 무서워하지는 않으니까. 다만, 괜한 일로 척질만큼 만만한 세력이 아닌건 사실이지.”
동해가 자신의 도발에 넘어오지 않자, 준은 곧바로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흠, 선배님, 지금 몇 성 투황이시죠?“
“2성. 그건 왜?”
“하하, 그럼 봉인 전에는요?”
“5성.”
“5성 이라…그렇다면 아직 전성기 수준은 아니군요.”
소년의 말에 얼음왕은 다소 자존심이 상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몇 십 년 동안 봉인 되어있었으니 실력이 온전히 회복되기는 힘들지. 그렇지만… 4, 5년 정도면 다시 전성기 수준의 힘을 되찾을 수 있다구.”
동해의 퉁명스러운 답변을 듣자마자 준은 뜻모를 웃음을 지었다.
“헤헤, 제가 듣기로는 실력이 한번 떨어지면 예전 수준을 찾는데 더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하던데요?”
그렇게 준이 계속해서 자신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동해는 더욱 기분이 나빠진 듯 한껏 인상을 구겼다.
“그래서,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겐가?”
“하하, 아니요. 그냥 저한테 좋은 연금비약이 있어서요. 후유증 없이 1년이면 전성기로…쨔잔!”
1년이면 실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말에 동해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 말…정말인가?”
“혹시 ‘회령단’ 이라고 들어본 적 있으세요? 5레벨 연금비약인데…몸속의 상처를 완벽하게 치유해주는 비약이죠. 특히 여러 가지 이유로 실력이 떨어진 투사의 힘을 회복하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답니다.”
준의 설명에 동해의 눈에서 반짝반짝 빛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의 그로서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매력적인 물건이었다.
“말만 해. 뭘 원하지?”
얼음왕이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준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돌았다.
“음…회령단은 5레벨 연금비약이지만, 재료가 좀 귀해서요. 조금 시간이 필요해요. 재료는 제가 구할게요. 하지만, 재료를 구하기 전까지는 선배님이 저와 함께 다녀주셨으면 해요.”
“하…그러니까…나더러 자네의 호위 무사가 되어 달라?”
소년은 동해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가만히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천하의 ‘얼음왕’이 꼬맹이의 호위라니…동해 입장에서는 영 체면이 서지 않는 짓이었다.
“에이, 선배님…왜 이러세요. 좋은게 좋은거잖아요. 4,5년 이라고 말했지만 재수없으면 10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거, 선배님도 잘 아시잖아요. 그냥 귀여운 손주나 조카 돌봐준다 생각하고 1년만 참으면 안전하게 몇 년을 절약할 수 있는걸요. 선배님한테도 좋은 얘기라구요.”
말투는 얄미웠지만, 그 말대로였다. 결국 동해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딱 일년이야. 딱 일 년 안에 그 약을 줘야 하네. 할 수 있나?”
“헤헤, 감사합니다 선배님, 누구랑한 약속인데 어기겠어요!”
자신의 뜻대로 일이 풀리자, 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여차하면 동해의 몸 안에 심어둔 불꽃을 사용해 협박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준은 그 방법만은 택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풀리는 것이 가장 안전했고, 또 서로에게 좋았다.
첫 째로는 동해의 괴팍한 성격상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기 때문이고, 둘 째로는 그런 방식으로 사람을 부리면 반드시 원한을 사게 되어 그 끝이 나쁜 경우가 많은 까닭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준이 동해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준이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갑자기 동해가 자신의 저장반지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자네가 어젯밤 기력을 회복하고 있을 때 내가 돌아다니며 얻은 성과야. 문씨 가문의 지역을 알 수 있는 대략적인 지도지. 그 예린이라는 여자애를 찾는 데 도움이 될 것 같군.”
준은 뜻밖의 횡재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역시, 좋게 좋게 푸는게 최고라니까. 협박을 했으면 절대 이런걸 내놓지 않았겠지.’
“이야! 선배님, 언제 또 이런걸…!”
하지만 동해는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일 뿐 이었다.
곧이어 소년이 웃으며 방문을 열고 나서자, 동해도 할 수 없다는 듯 준을 따라 걸었다.
그리고 문을 열고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간 뒤 대문으로 걸음을 옮기려 던 순간…입구에 서 있던 흰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나설아. 나설아였다. 틀림없이 수 년전 자신과 이씨 가문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선사한 그녀였다.
준은 나설아를 발견하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윽고 그의 눈동자에서 불길이 일었고,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어이, 왜 그래?”
그 때, 준의 살기 등등한 표정을 감지한 동해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후…!”
준은 자신의 양볼을 거칠게 문지르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지금 이 자리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결코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동해가 준과 나설아의 관계를 알고 한 행동은 아니었겠지만, 그의 판단이 옳았다.
준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은 뒤 마음속으로 약로에게 말을 걸었다.
“스승님, 저 애 실력이 어느 정도죠?”
“그게…모르겠구나.”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스승님 실력으로 모르겠다니요…설마 저애가 투황급 이상이라는 말인가요?”
예상밖의 대답에 준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 하고 그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낼뻔했다.
“아니, 그런건 아니다. 다만 저 아이의 신체 표면에 뭔가 특수한 비술이 걸려있는 듯 하구나. 아마도 뭔가 도구를 썼겠지.”
“휴…”
스승의 말에 준은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동해는 혼자서 화를 냈다가 당황했다가 안도한 표정을 짓는 준을 바라보며 영문을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괜찮나? 왜 그래?”
“아, 아닙니다 선배님…가시죠.”
준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동해를 재촉해 잽싸게 자리를 떴다.
………
한편, 검은 망토를 걸친 두 사람을 발견한 나설아는 까닭없이 불쾌감을 느꼈다.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망토를 뒤집어 쓴 두 사람 중 하나가 묘하게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었다.
“리안, 저 두 사람이 혹시 널 괴롭힌 사람이니?”
나설아의 질문에 리안은 쭈뼛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도담 장로님, 저 두 사람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까요?”
“흠…어렵습니다. 다만 확실한건…저와는 까마득하게 실력차이가 나는 듯 합니다.”
도담의 답변에 나설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치켜떴다.
현재 도담의 실력은 2성 투령이었으니, 그 말이 사실이라면 눈 앞의 두 사람은 ‘최소한’ 5성 투령이라는 의미였다.
바로 그 때, 수려한 외모의 사내 하나가 싱글벙글 웃으며 설아를 향해 걸어왔다.
“나씨 가문이시군요. 하하. 정말 죄송합니다. 요새 저희 집안이 행사 준비로 워낙 바쁘다 보니 귀한 손님들을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내의 얼굴을 본 준은 또 다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 사내는 틀림없이 3년전 나설아와 함께 이씨 가문을 찾아왔던 그자였다.
‘하…미쳐버리겠군…’
“그렇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내가 고개를 숙이자 나설아가 한껏 우아한 말씨로 예의를 갖추었고, 이 광경을 본 준은 더욱 짜증이 났다.
“하하, 감사합니다. 아, 마침 제가 집으로 가는 길인데,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실까요?”
문려의 제안에 나설아는 한번 더 부드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운남종의 차기 종주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자,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만연했다.
잠시 후, 문려는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몸을 돌리다가 망토를 뒤집어 쓴 두 사내를 보고 더욱 환히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하, 안녕하세요. 저는 문씨 가문의 문려라고 합니다. 어젯밤에 어린 동생이 두 분을 불편하게 해드렸다고 들었는데 송구스럽기 그지없군요. 사죄의 뜻으로 두 분을 대접할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순간 문려는 두 사내 중 하나에게서 느껴지는 살기에 뭔가 실수를 한 것인가 싶어 정신이 아찔했다. 사내의 반응으로 보아,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행동한 것 같았다.
“초대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어차피 문씨 가문을 방문하기 위해 온 것이니, 굳이 초대 해주시지 않아도 조만간 얼굴 볼 일이 있을 겁니다.”
말을 마친 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즉시 문려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로 그 때, 나설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토를 뒤집어 쓴 준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뭐지…? 어딘가 낯익은 목소리인데…?’
사람들로 빽빽하게 들어찬 길거리를 간신히 빠져나온 준과 동해는 소금성을 한참이나 걷고 나서야 문씨 가문의 중심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준은 요새 마냥 굳게 닫힌 문씨 가문의 본거지를 바라보며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과연 동부 최고의 가문답게 경계가 삼엄해보였기 때문이다.
“허, 이렇게까지 빈틈없을 줄이야. 아무래도 조금 골치 아프게 됐군.”
동해가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젓자, 준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어디 가서 초청장이라도 구해오는게 낫지 않겠나?”
“음…하지만 선배님, 이 옷차림은 너무 수상하지 않나요? 초대장이 있다고 해도 이 꼴로는…”
준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연회장을 훑어보던 준이 외진 골목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리로 발걸음을 옮기자, 동해 역시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 골목은 상당히 구석진 곳이어서 인적이 드물 뿐 아니라 경계도 비교적 느슨했고, 준은 잠시 눈치를 보다가 벽 주위에서 경비를 서는 보초병들을 향해 푸른 불꽃을 내뿜었다.
“억…!”
곧이어 대지의 불꽃이 몸에 닿는 순간, 경비병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고 재가 되어 사라졌다.
깔끔하게 처리를 끝낸 준은 동해와 함께 신속히 벽을 넘었다. 생각보다 더욱 성공적인 잠입이었다.
“어떻게 찾을 생각인가? 이렇게 큰 가문에 밀실이 없다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방 마다 일일이 열어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걱정마세요 선배님. 제 영혼 탐지 능력으로 예린이가 어디있는지 대충은 알 수 있을거예요.”
연금술사의 영혼 탐지 능력은 일반적인 투사의 그것에 비할바가 아니니, 동해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약로의 영혼 탐지능력이 몸 안으로 흘러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이 어두운 표정으로 눈을 떴다.
“못 찾은 건가?”
“찾기 어려운 밀실이 몇 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동해는 잠시 준의 표정을 살피다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혹시… 놈들이 필요한 걸 이미 손에 넣어서 그 아이를…”
하지만 동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준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문씨 가문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될 겁니다.”
“내가 괜한 얘길했군…너무 걱정말게, 어떻게든 손을 써보자고.”
동해는 순식간에 살기를 피우는 준을 진정시킨 뒤 함께 몸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