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휴식
“흠…이렇게 많은 세력들이 한 자리에 모였는데, 정말 일을 치르려고?”
준의 곁에서 함께 줄을 서 있던 동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 선배님. 투황이 둘인데 이런 촌구석 가문 따위를 두려워 하시는겁니까?”
준이 태평한 표정으로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동해도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내가 나서야 하는건가?”
“하하, 아니요. 하지만 만일 필요해지면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그 전까지는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한 제국 10대 강자의 힘을 그리 쉽게 쓸 수는 없지요.”
담소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둘의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막 성안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경쾌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한 쌍의 남녀가 성안으로 달려왔다.
두 남녀 중 여자는 화려한 빨간 옷을 입고 있었고, 그들은 말을 탄채 사람들을 가르고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다그닥거리는 말굽 소리가 점차 멀어지자 사람들의 입에서 볼 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젠장. 그래봤자 문씨 문가의 둘째 딸이면서. 운남종이 배후에 있는 덕에 지금의 지위를 유지하는 거지, 문씨 가문이 뭐 대수라고…”
준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씨익 웃음을 지었다.
성안으로 들어서자 화려한 상점가와 함께 거리에 빼곡하게 들어선 사람들이 시야에 가득 찼다.
거리 안으로 들어가자 시끄러운 소음에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흠…숨도 고를 겸 주위에서 좀 쉬면서 정보라도 모아볼까요?”
“좋지.”
투황이라 할지라도 장시간의 비행은 상당한 염력을 필요로 하는 만큼 휴식이 필요했으니, 동해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보니, 이 거리에만 130개가 넘는 가게가 운영되고 있더군. 게다가 70개 이상은 문씨 가문 소유인 것 같아. 예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이제 정말로 문씨 가문이 소금성의 패자라고 할 수 있겠어.“
동해의 말에 이준은 불쾌하다는 듯 이마를 찌푸렸다.
“운남종을 등에 업었다고 이렇게까지 입지가 좋아지나요?”
“흠…운남종은 겉으로 보이는 것 보다 훨씬 위험한 세력일세. 운남종 문하에 있던 강자들이 가한제국 곳곳에 퍼져나가 새로운 세력을 만들어내니까. 운남종 자체는 크지 않지만, 거기서 뻗어 나온 가지는 가한제국 전체를 뒤덮을 정도라고 생각하면 될거야. 아마 그들을 잘못 건드리면 가한제국 황실의 어르신이라도 애를 좀 먹게 될걸?”
“쳇…”
준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자, 동해가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운남종과 뭔가 엮인 게 있나본데, 건드리지 않는 편을 권하네. 그야말로 벌집을 쑤시는 격이야.”
하지만 동해의 설득에도 준은 뜻을 굽힐 마음이 없어보였다.
“벌집을 쑤실만한 이유가 있어서요.”
동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봐 동생,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니란 것은 자네도 알지 않는가.”
“아뇨 선배님, 제 뜻은 확고합니다. 투황으로 안되면 투종, 투종으로도 안되면 투성이나 투제가 돼서라도 운남종을 박살내 줄겁니다.”
너무나 단호한 태도에 오히려 동해가 움찔할 지경이었다.
“헌데 선배님, 가한 제국 황실의 어르신이라니…그게 누굽니까?”
준의 질문에 동해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늙은 괴물, 완전히 괴물이야. 나중에 황실에 갈 일이 생기면 한번 찾아가보게. 지금쯤은 더 괴물이 돼있겠군. 벌써 못 본지도 10년은 더 됐으니까. 옛날에 그자와 메두사가 한번 붙었던 적이 있었는데…상처 하나 입지 않았어.”
메두사와 결투를 벌여 상처 하나 입지 않을 정도라면 최소 6성 이상의 투성이었다는 의미였다.
그런 사람이 그 후로 10년 이상 수련을 했다면…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바로 화려한 불빛이 번쩍이는 커다란 여관 하나가 둘의 눈앞에 들어왔다.
“저기로 가볼까요?”
“흠…좋아.”
곧이어 두 사람은 호화로운 여관 안으로 들어갔는데, 안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문씨 가문 장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온 듯 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을 향해 늘씬한 시녀 하나가 걸어와 정중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혹시 초대장이 있으신지요?”
“초대장이요? 그런 게 필요한가요?”
“죄송합니다. 요 며칠간 소금성의 여관들 대부분을 문씨 가문에서 대여했기 때문에…초대장이 없다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시녀의 말을 들은 준은 대놓고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 아주 미친놈들이군.”
처음 보는 소년의 입에서 소금성 최대 세력을 비난하는 소리가 나오자, 시녀는 난감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 이었다.
“너 어디서 온 촌놈이야? 감히 소금성에서 우리 문씨 가문을 욕해?”
소년의 왼편에는 어느 새 여자아이 하나가 다가와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준은 그녀를 보자마자 그녀가 바로 아까 성문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던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너! 뭐냐고 이 자식아!”
그러나 그녀가 소리를 지르건 말건 준은 눈꼽 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콧방귀를 뀔 뿐 이었다.
“이 자식이! 내가 누군줄 알고!”
쉬익!
소녀는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문씨 문중을 무시하고 자신을 본체만체하자, 대뜸 사내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펑!
하지만 그녀의 채찍이 준의 몸에 닿으려는 순간, 푸른 화염이 솟아나 채찍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고, 푸른 화염은 채찍을 불태운 뒤 곧장 여자 아이를 향해 날아갔다.
“아아아악!”
다행히도 불꽃을 그녀를 지나 반대편에 서있던 조각상과 부딪혔는데, 불꽃이 닿는 것과 거의 동시에 거대한 석상이 액체가 되어 흘러내렸다.
석상이 녹아내리는 것을 본 사람들이 겁에 질려 소리를 지르는 통에 여관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소란이 일어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한 중년의 사내가 나타나 이준의 앞을 막아섰다.
“죄송합니다. 방금 전은 이 아이가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저희 문씨 가문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화를 거두어 주시지요.”
“하…이런 조막만한 계집애까지 아무에게나 채찍을 휘두르게 둘 정도라니, 문씨 문중 수준도 알만하군요.”
소년의 따끔한 한마디에 여관안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얼어붙었지만, 누구도 문씨 가문을 위해 나서지는 않았다.
방금 전의 푸른 불꽃의 위력으로 미루어보아, 자리에 있던 모두는 준이 대단한 강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 돌아가면 이 아이를 따끔하게 혼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노여움을 거두어 주시지요.”
하지만 사내의 태도는 한결 같이 정중했다.
“저기…투사님, 방금 들으신 대로 소금성의 대부분의 여관은 저희 문씨 가문에서 빌려서 잠자리 구하기가 어려우실 텐데, 제가 사죄의 의미로 가장 좋은 방을 내어드릴 테니 쉬었다 가시지요.”
계속되는 사내의 겸손한 태도에 결국 준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잘 곳도 필요했으니, 괜한 소동을 일으키는 것 보다는 사내의 사과를 받는 편이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후…아닙니다. 이 정도 일로 어린 아이에게 화염을 쏜 저도 잘못이 있으니까요. 성의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
잠시 후, 중년의 사내와 준이 자리를 뜨자 남자들이 벌 떼 같이 몰려들어 훌쩍이는 소녀를 위로 했다.
“아까 그 자식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걱정 마, 내가 내일 너 대신 복수 해줄게!”
“미친놈! 대체 어느 집안 놈이길래 감히!”
바로 그 때, 바깥쪽에서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안, 왜 그렇게 서럽게 울어!”
시선을 돌리자 하얀 망토를 걸친 늘씬하고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천천히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설아 언니, 어떻게 왔어?”
흰색 망토를 걸친 여인이 안으로 들어오자 장내에 있던 모든 사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여인의 뒤에는 기품 있어 보이는 노인 하나가 서있었다.
“도담 스승님!”
“하하, 몇 년을 못 봤는데, 우리 리안이가 갈수록 예뻐지는구나!”
노인이 웃음을 터뜨리자, 리안은 신이 나서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설아 언니, 언니가 직접 올지 몰랐어. 아빠가 아신다면 엄청 기뻐하시겠다.”
“나도 지시를 받았을 뿐인 걸. 그렇지 않아도 집에 한 번 가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어. 그나저나 누구한테 괴롭힘이라도 당한 거야? 엄청 서러워 보이던데 말이야. 설마 소금성에서 너를 건드릴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이 있을 줄이야.”
하지만 리안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설아의 불같은 성격을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 거 아니야. 그냥 재밌는 사람 하나 만났어.”
그러나 나설아는 녹아내린 석고상을 발견하자마자 모든 상황을 한 눈에 파악해냈다.
‘불 속성 무투기를 다루는 강자와 시비가 붙었군.’
“설아 언니, 오늘 날도 어두워졌는데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는 거 어때? 여기 언니한테 맞는 특실이 있는데!”
“응, 그래야겠다. 부탁할게 리안아.”
설아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을 지었지만,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는 녹아내린 석상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더니…스승님 말대로네. 내려오자마자 재밌는 일을 만났어.’
잠시 후 리안과 나설아가 연회실에서 사라지자, 로비에는 다시 소란이 일었다.
“와, 생각치도 못했는데. 운남종 종주님이 직접 제자를 내려 보내 축하해주시다니. 문씨 가문도 기가 살겠구만.
“내말이. 젊고 예쁜데다 실력까지 빵빵하다니! 역시 운남종의 제자는 대단하구만!”
“아 어디 그뿐이야? 운남종의 종주이면서 나씨 가문의 딸인데!”
“어휴, 어릴 때부터 정혼자가 있다더니, 아주 복이 터진 놈이군!”
“언제적 얘기를 하는 거야. 3년 전에 아가씨가 찾아가서 강제로 파혼을 요구 했었어.”
“엥? 정말?”
“에잉,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구만. 그 일로 이씨 가문이 개망신을 당했다고!”
“거 참, 개뿔도 모르면서 헛소리 하네.”
바로 그 때, 구석에 앉아있던 사내 하나가 들으라는 식으로 입을 열었다.
“나설아 아가씨가 이씨 집안에 찾아간 건 사실인데…애초에 파혼 서약서 같은 걸 가져가지도 않았어. 되려 그쪽에서 받았지. 말하자면 이씨 쪽에서 결혼 약속을 파기한 거야.”
“뭐? 말도 안돼……”
* * *
한편, 특실에 들어선 준은 문씨 가문의 사내를 보낸 뒤 즉시 방문을 걸어잠궜다.
“흥, 돌아가면 우리 뒷조사부터 할게다.”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저자들 실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선배님과 저를 못 당합니다.”
준은 피곤한 표정으로 푸른 연화대를 꺼내 그 위에 올라앉았고,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빠른 속도로 염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 * *
동틀 무렵의 따스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바닥을 밝게 비추는 아침, 푸른 연화대 위에 앉아있던 준이 서서히 눈을 뜨자, 옅게 일렁이던 아름다운 불꽃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살며시 몸을 비틀며 상쾌한 새벽 공기를 깊게 들이쉬니 온 몸에 시원한 공기가 가득히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간의 휴식으로 준의 얼굴에 가득했던 피로는 이미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준은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방문을 열고 거실로 몸을 옮겼다. 거실에서는 먼저 일어난 동해가 아침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지금 상태를 보니 어제 회복이 잘 됐나보군?”
준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가죠. 오늘 문씨 가문이 정신없이 바쁜 틈을 타서 예린이를 먼저 찾아내고, 문승 그 놈에게 선물이라도 주고 오려구요.”
“살기가 득실거리는 표정을 보니 문씨 가문의 잔칫집도 초상집으로 변하겠구만.”
동해는 준의 표정이 의미하는 바를 눈치채고는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