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강제 합병
사라에게 소리를 질렀던 사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흥, 후회해도 늦었다! 하지만 지금 우릴 풀어주면 용서해주마!”
그러나 그의 말은 오히려 준의 화를 돋울 뿐 이었다.
“큭큭…열 받게 하지마라. 난 운남종이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야. 덕분에 그냥 보내주려던 놈들도 태워죽이고 싶어졌으니까 닥치고 있어.”
소년의 살기등등한 한마디에 문씨 가문의 수하들은 모두 분노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지만, 준의 손바닥에서 일렁이는 백색 화염을 보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나저나…왜 문씨 가문에서 우릴 노렸을까?”
이찬이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준은 즉시 고개를 돌려 사라를 바라봤다.
“그놈들이 예린이를 왜 노리는 거지?”
“그, 그건 나도 정말 몰라. 나는, 그…문영이라는 자가 시키는 대로 한 것 뿐이라고!”
그러자 준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까부터 계속해서 거슬렸던 남자를가리켰다.
“저 사람도 문씨 가문이야?”
“맞아.”
“호오…저기, 당신들이 예린이를 잡아간 목적을 좀 알아야겠는데?”
“우리는 명령에 따를 뿐 이다. 왜 인지는 알 필요도 없고, 알고 있지도 않다.”
사내가 단호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소년의 얼굴에 곧바로 짜증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당신, 아까부터 엄청 용감하군.”
하지만 준의 손바닥에서 백색화염이 이는 순간, 사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자신만만하던 표정이 공포로 물들었다.
“시간 낭비할 거 없어, 저들은 정말 모를 테니.”
그 때, 동해가 끼어들었다.
“문승이라는 놈은 교활한 놈이네. 그런 놈이 일을 꾸미는데 저런 말단들에게 정보를 줄 리가 없지.”
“선배님도 그 놈을 아세요?”
동해의 한마디에 준은 깜짝 놀라 즉시 그를 바라봤다.
“예전에…한 번 본적이 있지. 문씨 가문의 선조는 연금술사였지만 문승인지 하는 놈은 그쪽에 흥미가 없어 다른 연구를 한다더군. 마수족의 몸에서 발톱이나 뿔, 그딴 걸 뽑아서 사람 몸에 이식하는 게 취미인 미친 놈이야.”
“미친…”
“미친놈이지. 그런데 실력은 진짜일세. 그리고 그 미친 짓이 성과를 보여서 문씨 가문의 세력이 커진 것도 사실이고. 문승의 명령이라면 잡혀간 여자애가 뭔가 독특한 체질이거나, 그랬을 가능성이 높겠군.”
동해의 말을 듣자마자 준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뱀의 눈…인가.’
그리고 다음 순간, 갑자기 회의실 내에서 화염 기둥이 솟구쳐올라 자리에 있던 문씨 가문의 수하들을 불태워 버렸다.
순식간에 문씨 가문의 수하들이 재가 되어 사라지자, 사라는 감히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 하고 준의 눈치를 살폈다.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문씨 가문의 남자는 온 몸이 굳은 듯 제자리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었고,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손발을 덜덜 떨며 반쯤 실성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지, 지, 지금 이게 무, 무슨 짓이야! 가, 감히, 무…문씨 가문을…”
“개똥이나 처먹어. 문씨 가문은 오늘로 끝이니까. 널 살려둔 이유는 단 하나야. 지금 나를 데리고 문씨 가문으로 가든지, 아니면 재가 되든지.”
“무, 문씨 가문의 사내들에게…배, 배신이란…”
하지만 사내가 더듬더듬 내뱉는 말을 듣는 순간, 준은 더 이상 화를 참지 못 하고 그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문씨 가문의 본부는 제국 동부지역에 있는 소금성 안에 있어. 동부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야. 모래 바람 성에서 하루면 도착할 수 있고.”
이찬이 문씨 가문의 위치에 대해 설명해주자, 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사라를 바라봤다.
“어이, 단장. 이제 우리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를 좀 해볼까?”
“……”
사라는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지도 못 한 채 덜덜 떨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우리 사막 용병단에서 10만 골드를 배상하지…그, 그 정도면 추, 충분하지 않겠나?”
하지만 이준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 저을 뿐 이었다.
“그럼 20만?”
“30만?”
준이 계속해서 고개를 젓자, 사라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다.
“자네가 먼저 제시하게…최대한 요구조건에 맞춰보겠네.”
소년은 그제서야 맘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막 용병단을 사막의 칼날 용병단과 합쳐. 모두 올 필요는 없어. 7성 투사 이상만. 그 대신 그 이하의 단원들에게는 내가 보상을 지불하지.”
순간 회의실 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분명히 두 세력이 합쳐지기만 한다면, 단박에 모래바람성 최강의 세력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두 세력이 그렇게 쉽게 하나가 될 리도 만무했고, 최악의 경우 말이 좋아 사막 용병단이 이씨 형제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지 사실상 사막의 칼날 용병단이 사라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될 수도 있었다.
“흠…내 제안이 싫은가? 지난 일은 깨끗이 털어버리고 같은 배를 타자는 건데? 이렇게 좋은 제안이 어디 있다고…이게 아니면 너희들은 모두 죽어야 해. 난 일처리가 깔끔한 편이거든. 내 밑으로 들어와서 충성을 맹세하든지, 아니면 모두 재가 되든지. 선택은 자유야.”
잠시 후, 사라가 긴 한숨을 내쉬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승낙하지 않으면 사막 용병단은 즉시 해체 되는 건가?”
이준은 가만히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선택지는 없나?”
준은 고통스러운 듯 한숨을 내쉬는 사라를 바라보다가 그의 손바닥에 작은 약병 하나를 쥐어주었다. 약병을 살짝 기울이니, 빨간색의 연금비약 네 알이 또르르 굴러 나왔다.
“받아. 내가 너희를 바로 믿는다고 하면 너희들도 납득하지 못하겠지. 실제로 믿지 않기도 하고. 그러니 너무 서운해 하지 말고 받아. 독이 들어있는 연금비약이야. 해독약은 형에게 넘겨주지. 일정 기간마다 해독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독이 퍼질 거다. 장담하건데 너희들 중 이 독을 버텨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혹시라도 딴 생각하지 말고.”
“먹지 않을 순 없겠지…?”
손에 붉은 연금비약을 쥐어 든 사라는 입술을 깨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내가 주는 기회야. 당신도 알 텐데? 내가 마음만 먹으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다 저세상으로 가는 거야. 그렇다고 그냥 수하로 받아준다면 다른 사람들이 납득하기도 어려울 거고, 솔직히 말해 배신하기도 쉬우니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을 테지. 하지만 이 약을 먹으면 적어도 의심의 눈초리는 조금 줄어들겠지. 사막의 칼날 용병단의 다른 사람들과 신뢰를 쌓고 좋은 사이가 되는 것은 당신들 하기 나름이고. 덧붙이자면, 나는 정말로 당신들이 사막의 칼날 용병단의 일원이 되길 바라고 있어. 내 나름대로 고민 많이 한 방식이라고.”
준의 말이 끝나자, 사라는 몇 초 정도 더 망설이다가 연금 비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단장이 독약을 삼키니 다른 세 명의 용병단원들도 곧 연금비약을 집어삼켰다.
“좋아. 그럼 먼저 돌아가 합병을 준비해줘. 난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딴 생각하지 못 하게 잘 설득해줬으면 고맙겠군.”
준은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려 회의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준의 뒤를 따라왔던 사막의 칼날 용병단들은 모두 정신이 멍한 상태였다. 반나절도 되지 않아 모래바람성의 최강 용병단이 무너지고, 가장 거대한 두 개 세력의 합병이라니…그들은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 하고 있었다.
한편, 사라는 멀어져가는 준을 바라보며 의자에 걸터앉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후…단원들을 모아와.”
“단장님… 저희 정말 이렇게 사막의 칼날 용병단으로 들어가게 되는 겁니까?”
그러자, 그의 뒤에 있던 무투사 한 명이 씁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타죽든지… 애시 당초에 이준이라는 소년이 우릴 살려준 거나 다름없어. 죽이려면 죽였겠지. 그리고 어차피 용병 목숨이야 파리 목숨이니, 강한 사람을 따라가는 편이 나을지도…”
사라의 말에 사막 용병단의 세 무투사는 씁쓸하게 웃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조금 위험한 결정이긴 하지만…앞으로 사막의 칼날 용병단이 더 강해지기 위해 필요한 결정이야. 그리고 형들이라면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막내의 한마디에 이정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하하, 네가 이미 판은 다 깔아놨잖아. 걱정하지 마. 고맙다. 생각도 못한 방법이야. 덕분에 이번에 입은 피해를 복구하고도 남겠어.”
“그럼 다행이야. 이제 나는 문씨 가문에 가볼게.”
“소금성에 간다고?”
동생이 문씨 가문의 본거지로 간다는 말에 이찬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조심해야 할 거야. 문씨 가문은 소금성의 거물인데다 운남종과도 엮여있으니까.”
“알았어.”
준이 씨익 웃으며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자, 동해 역시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두 개의 그림자는 별똥별처럼 밤 하늘을 가르며 소금성으로 향했다.
“동생, 자네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말이야, 사실…자네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지?”
동해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준은 비행속도를 낮추며 그를 돌아봤다.
“무슨 소리시죠?”
“허허…자네 재능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야. 솔직히 지금까지 내가 본 모든 젊은이들 중 가장 뛰어나. 하지만 투황 수준은 아니란 말이야…게다가 자네 몸에서 나오는 백색 화염은 자네의 염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낌이 다르단 말이지…”
준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투황 수준의 강자라면 준과 약로의 기운을 어렴풋하게나마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이상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하…뭐, 따지고 보면 제 힘이 아니긴 하죠. 하지만 언제든지 그 힘을 이용해 투황 수준의 힘을 쓸 수 있는 건 맞으니까요.”
소년의 대답에 동해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보기에도 언제든 힘을 꺼내 쓸 수 있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어서 가죠. 날이 밝을 때쯤이면 소금성에 도착해야 할 거예요. 저는 길을 잘 모르니 선배님이 앞장 서주시죠.”
“허허. 나도 아직 가보지는 않았네. 다만 매일 지도를 그리면서 길을 익혀 둔 곳이라 아주 익숙하지. 걱정말게.”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다시 번개 같은 속도로 소금성을 향해 비행을 시작했다.
* * *
소금성은 가한제국 동쪽에 위치한 성으로, 제국의 대문 같은 역할을 하는 장소였다.
그리고 문씨 가문은 소금성의 6할 이상을 장악한 강력한 세력으로, 매해 성에서 들어오는 수익을 통해 그 힘을 더욱 키워나가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소금성의 패자라고 할 수 있었다.
* * *
꼬박 하루를 날아 두 사람은 소금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달이 지고 태양이 그 자리를 대신할 무렵, 소금성의 윤곽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소금성과 몇 백 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 착지해 잠시 휴식을 취했고, 새까만 망토를 꺼내 뒤집어썼다. 망토에는 커다란 모자가 달려있어 두 사람의 정체를 감추기에 제격이었다.
새까만 망토를 뒤집어 쓴 두 사람은 드넓은 대로를 따라 도시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문에 가까워지자, 성벽 양쪽으로 완전 무장한 병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뒤집어쓴 모자를 벗고 길게 늘어진 줄의 가장 끝에 서서 조용히 검문을 기다렸다.
“휴, 정말 줄도 길구만…역시 문씨 가문이야.”
준의 앞에 서있던 용병은 기다리다 지쳤는지 짜증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하하, 오늘은 문씨 가문 장로의 생일이니까. 제국 곳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지. 운남종에서도 사람을 보냈다던데?”
“오, 운남종에서도? 대단하네.”
“큭큭…매해 문씨 가문에서 갖다 바치는 돈이 얼마인데 인사 정도는 와야지.”
“킥킥, 틀린 말은 아니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번졌다.
‘날도 참 잘 맞췄군. 마침 그 망할 놈이 생일이라 이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