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앞으로 돌진
“무투사와 대투사들이 갑자기 사막 용병단에 합류한 이유는?”
준의 질문에 정은 또 다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걸 모르겠어…다만 예린이의 실종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추측만 할 뿐 이야. 시기가 너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니까…”
“흠…좋아. 그럼 사라를 찾아가봐야겠군.”
하지만 정은 이번에도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모아줄게. 같이 가. 혼자서는 위험해. 그 쪽도 사람이 제법 될테니까.”
“흠…알았어.”
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뜻 밖에도 동해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있어봤자 지루하기만 하니 나도 가서 구경 좀 하지. 단, 도와줄거라고는 기대하지 말아. 기분 내키는대로 할테니까.”
준은 동해의 괴팍한 언행에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잠시 후…50여명의 용병들이 나타나고, 동해는 먼 발치에서 느긋하게 그들을 따라갔다.
* * *
오십 여명의 용병과 함께 골목을 통과해 10분 남짓 이동하니 사막 용병단의 본부가 눈에 들어왔다.
“이곳은 사막 용병단의 본부다! 웬 놈들이냐!”
용병단의 대문을 지키고 있던 용병 하나가 소리를 지르자, 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라 나오라고 해.”
하지만 사막 용병단의 대문을 지키던 경비병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안으로 사라를 부르러 가지도 않았다. 아마도 대투사를 쓰러뜨린 소년 투사에 대해 이미 소문이 퍼진 듯 했다.
“좋아. 그럼 내가 가지.”
서늘한 한마디와 함께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소년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사막 용병단의 단원들은 한걸음씩 뒷걸음질을 쳤다.
그 때, 겁먹은 사막 용병단의 단원들 사이로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 검은 망토 소년을 죽인 자에게 단장님이 포상금으로 500골드를 내리겠다고 하신다! 놈을 죽여!”
500골드라는 말을 듣자, 용병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탐욕이 공포를 밀어내기 시작한 것 이다.
“쯧쯧…”
그 모습을 보던 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차면서 가만히 손을 들었다.
쾅!
그러자 준의 손바닥에서 무시무시한 무형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강철로 된 대문을 무참히 박살냈고, 산산조각나 철문의 파편에 맞아 순식간에 수 십명의 사상자가 생겨났다.
그 순간, 준에게 대항하던 용병들의 머릿속에 뿌리칠 수 없는 공포가 자리잡았다.
“가죠.”
준이 가볍게 손짓을 하자 50여명의 용병들이 줄지어 뒤를 따랐고, 감히 누구도 그의 앞을 막지 못 했다.
……
대문을 통과해 사막 용병단의 본부 안으로 들어가자, 수백 명에 이르는 용병들이 무기를 들고 그들을 포위했다.
그러나…검은 망토를 두른 소년이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며 화염과 무형의 기운이 뿜어대자 사방에서 곡소리가 울려 퍼지며 길이 뚫렸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수 십명의 용병들이 쓸려나가자, 나머지 용병들은 겁에 질려 무기를 손에 들고 갈팡질팡 할 뿐 누구 하나 공격에 나서지 못 했다.
* * *
준이 파죽지세로 수 백명의 용병들 사이를 가로질러 걸음을 옮기는 사이…
굳게 닫힌 사막 용병단의 회의실은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그것 보시오. 내가 진작에 사막의 칼날 용병단의 두 단장이 문제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자가 문제라고 하지 않았소! 그 놈의 정체도, 실력도 끝을 알 수 없다고…이…이제 어쩔 거요!”
상석에 앉은 사라 곁을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은 하나 같이 사막 용병단의 단원이 아닌 듯, 복장도 제각각 이었고 사막 용병단의 표식조차 달고 있지 않았다.
“어허, 단장님. 너무 걱정이 많군요. 그 사내가 강한 건 사실이지만, 문영과의 전투에서 이미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게다가 최소한 투왕일 것 같다더니, 보고에 의하면 기껏해야 2,3 성 대투사 정도일 것 이라고 하더군요. 어쨌든…곧 장로님이 도착하실테니, 걱정하지 마시지요.”
우두머리로 보이는 건장한 남성이 웃으며 말했다.
“그럴리가요…놈의 속도는 분명 투령급 이상이었습니다.”
“그와 겨뤄 보신 적이 있나요?”
“없죠.”
“하하. 뭔가 속도를 올려주는 독특한 무투기라도 익혔나보지요. 하지만 레벨 차이가 심하다면 속도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단장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건장한 사내의 말에 사라는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좋습니다. 그럼 제가 한 번 나서서 대체 얼만큼 강한 녀석인지 직접 만나보도록 하죠.”
사라는 침을 꿀꺽 삼키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콰앙—
그러나 다음 순간, 굉음과 함께 단단히 닫혀있던 문이 산산조각 나며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소년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나보지? 끼리끼리 모여서 무슨 얘기들을 하셨나?”
소년의 얼음장 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회의실 안에 울려퍼지자 안에 있던 정체불명의 사내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고, 그의 모습을 발견한 이들은 곧바로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사라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네가 이준인가?”
잠시 후, 사라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흥, 갑자기 남의 용병단 본부에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다니…배짱이 대단하구나.”
“하하, 이런 시골 용병단 하나 박살내는데 배짱까지 필요해?”
준의 도발에 사라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입심이 제법이군. 어디 입심만큼 실력도 대단한지 보자!”
고함소리와 함께 회의실 안에 살기가 맴돌고, 갑작스레 밀려오는 압박감에 준은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곧이어 준의 몸에서도 무시무시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이 모습을 바라보던 동해의 눈빛에 놀란 기색이 어렸다.
‘허…어이가 없군. 이 녀석은 분명히 무투사인데…어째서 이런 느낌이 드는거지?’
준이 뿜어내는 기묘한 위압감은 투황인 동해조차도 놀랄 정도였으니, 자리에 있던 다른 이들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으으…”
사라 역시 겁을 먹은 듯 선뜻 선공을 취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는 잠시 눈치를 보며 망설이다가 그의 뒤에 서있던 정체불명의 무투사들과 자신의 부하들을 향해 명령을 내렸다.
“노…놈을 죽여 버려!”
그러자 회의실에 있던 무투사들이 먼저 염력 보호막을 두르고 무기를 꺼내들었고, 뒤이어 사막 용병단의 단원들도 무기를 빼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준의 뒤를 따르던 병사들이 막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동해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잠깐. 우리는 일단 구경을 좀 하지.”
동해의 기묘한 행동에 당황한 이찬은 준과 눈을 마주치며 동생의 의사를 확인했다.
준이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이찬이 손짓으로 부하들을 멈춰 세웠다.
……
잠시 후, 준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적들을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서서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준의 손바닥 위에 새하얀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너울너울 춤을 추며 작은 불꽃 구체로 변해 화살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백색 화살이 적들에게 적중하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십여 명의 용병들이 얼음 기둥으로 변해버렸다.
“허…”
이를 지켜보던 동해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얼음왕’이라는 별칭을 가진 그도 한 번에 저 정도의 인원을 산채로 얼리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방금 준이 사용한 염력은 분명히 얼음 속성의 염력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얼음속에 갇힌 용병단원들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하자, 동해는 더욱 당황했다.
‘이럴수가…얼음이 아니라 불이었어…? 결정화된 불꽃에 가둬두었다가 태워죽인 거란 말이야? 저런 수준의 불꽃 조종 능력은 난생처음 보는군…’
동해는 눈 앞에 서있는 소년의 진정한 실력 앞에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런 놈에게 싸움을 걸려했었다니…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순식간에 십여 명의 사람이 무참하게 사라지자 회의실 안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준의 불꽃 조종 능력은 자리에 있던 누구도 본적도 들은 적도 없는 수준의 것 이었다.
불을 결정화하는 것도 놀라운데, 결정화된 불꽃에 사람을 가뒀다가 원하는 순간에 태워죽이는 기술이라니…자리에 있던 자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지 오래였다.
준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넋이 나가있는 사라에게 다가갔다.
“후…왜 사람 말을 안듣지? 지난번에 분명히 경고했을텐데…”
사라는 손 끝을 덜덜 떨며 준을 바라봤다.
그를 바라보는 준의 눈빛은 도저히 소년의 그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싸늘했다.
“윽…”
바로 다음 순간, 소년이 사라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사라는 즉시 염력을 끌어올려 저항해보았지만, 그의 손을 뿌리치기는커녕 사지가 묶인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윽고 소년의 손바닥이 그의 가슴을 쓸어내리자, 대투사의 염력 갑옷이 거짓말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사…살…살려줘!”
자신의 염력 갑옷이 녹아내리는 것을 바라보던 사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이미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제 힘으로 서있을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예린이 어딨어?”
준이 싸늘한 음성으로 물었지만, 사라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준의 반대쪽 손바닥에서 하얀 불씨가 일렁이기 시작하자, 결국 그는 덜덜 떨며 입을 열고 말았다.
“아…알아.”
“하하. 그렇지? 알고 있구나?”
사라의 답변에 준은 즉시 친절하게 웃으며 그의 목덜미를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미친 살인마 같은 표정과 순수한 소년의 표정을 오가는 준의 얼굴에 더욱 큰 공포를 느꼈다.
“말해봐. 누가 너에게 쓸데없는 용기를 불어넣었는지… 괜히 또 사람하나 태워죽일 뻔 했잖아. 나라고 사람 태워죽이는 걸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준의 친절한 말투에 사라는 더욱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그러니까…사실 이 일은…모두 예린이라는…”
“사라! 지금 뭐하는 짓이야! 우리는 네가 모래바람성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사라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뒤에 서있던 무투사 하나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고, 준의 눈에 다시 살기가 감돌았다.
“호오…우리? 넌 또 뭐지? 이제 보니 사막 용병단 놈이 아니군. 사라, 내가 이 자를 뼈도 남기지 않고 태워버리면 당신이 입을 열기 쉬워질까?”
사라의 말을 가로막았던 사내는 소년의 싸늘한 한마디에 자기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저…저 사람들은…문씨 가문의 사람이야. 예린이라는 여자 아이를 데려오라고 한 것도 문씨 가문의 장로였어…우리가 모래바람성을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와줄 테니 예린이라는 아이를 잡아오라고…덤으로 사막의 칼날 용병단원들을 모두 죽여버리라고…”
“문씨 가문? 그건 또 어디서 굴러먹던 물건이야. 처음 듣는군.”
“문씨 문중은 가한제국 동부지역의 사대 가문 중 하나야. 나씨 가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동부에서는 따를 자가 없는 가문 중 하나지. 그런 거물이 왜?”
문씨 가문의 이름이 나오자, 이찬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질문을 던졌다.
“흠…그래? 문씨 가문의 실력은 어때 형?”
“문씨 가문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는 문승이라는 장로야, 물론 문씨 가문내에도 강자들이 많지. 아마 세 명의 대투사와 열 명 이상의 무투사를 데리고 있을거야. 그리고 문승은 ‘살인광’이라고 불릴 정도로 잔인하고 성격에 문제가 많다더군. 조심해야해. 그리고…”
이찬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젊었을 때는 운남종에 있었다고 하더라고. 운남종을 떠난 이후로도 매년 그곳에 선물을 보내며 좋은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 심지어 운남종에 안 좋은 일이 있거나 경사가 있을 때는 직접 찾아가기도 한다더군. 덕분에 운남종 종주의 속가 제자로 인정받고 있어. 머리도 좋다는 소리지.”
운남종의 이름이 나오자 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어지간히도 악연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