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대투사
“준이니?”
이정은 갑자기 나타난 막내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준이구나! 하하하! 드디어 우리 사막의 칼날 용병단에게도 희망이 보이는구나!”
단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자, 주위에 있던 병사들도 덩달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눈 앞에 있는 소년이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단장이 이렇게 기뻐하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
“형, 괜찮아?”
이준은 고개를 돌려 피를 철철 흘리는 이찬의 상태를 살피며 연금비약을 꺼내 형의 손에 쥐어주었다.
“쿨럭… 쿨럭…”
커다란 돌 위에 몸을 기대고 누워 숨을 헐떡이던 이찬은 또 다시 한 바탕 피를 토해내고는 간신히 동생이 손에 쥐어준 연금 비약을 들이켰다.
곧이어 약기운이 돌자, 그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큭큭…자식, 빨리도 오네. 조금만 더 늦었으면 무덤에 인사할 뻔 했어.”
“미안해, 너무 늦었지.”
다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너스레를 떠는 형을 보는 준의 눈에는 살기가 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찬은 막내 동생이 자신에게 미안해 할 때마다 동생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이런 농담을 던지곤 했던 것 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한 상태에서도 자신을 생각해주는 형이 피를 토하는 모습을 보자 준은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형, 걱정하지 마. 내가 저 자식을 죽여 버릴 거야.”
“쿨럭…저 녀석의 이름은 문영이야. 레벨은 1성 대투사…염력은 흙 속성…장기전에 강하고 방어에 능해…미안하다. 실력차가 심해서 형이 얻어낸 정보는 이게 다야…”
“걱정하지마 형…이쪽에서 쉬고 있어. 동생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줄게.”
준은 형을 안심시키기 위해 살짝 미소를 짓고는 이내 살벌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넌 누구지?”
노란 옷을 입은 중년은 팔을 털며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소년을 바라봤다.
하지만 소년은 그의 물음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몸 속에서 푸른 색의 염력을 끌어낼 뿐 이었다.
“꼬마야, 어서 꺼져라. 너 같은 핏덩이를 죽이면 꿈자리가 사나워. 누울 자리를 보고 드러누우란 말이야.”
준은 또 다시 문영의 말을 무시한 채 검은 송곳을 단단히 움켜 잡았다.
곧이어 굉음과 함께 준의 몸이 사라지더니, 무시무시한 속도로 문영을 향해 달려갔다.
“호오…”
문영은 생각보다 빠른 준의 속도를 보고는 굳은 표정으로 뾰족한 가시가 돋아있는 장갑을 꺼내 들었다.
쾅!
검은 송곳이 바람을 가르며 날아 드는 순간, 사내 역시 피하지 않고 주먹을 내질렀다.
그러자 묵직한 충돌음과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일며 불똥이 튀면서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한차례의 격돌 끝에 준은 반동에 밀려 서너 걸음을 뒷걸음질 쳤고, 문영은 반보 정도를 뒤로 물러났다가 중심을 잡았다.
하지만 준은 포기하지 않고 즉시 하늘로 뛰어올라 문영의 머리를 노렸다.
흙 속성의 염력을 연마한 자는 지구전에 강했지만, 속도는 느린 편에 속했으니, 준은 속도로 승부를 보려했다.
챙!챙!챙!
뒤이어 현란한 섬광이 허공을 수놓으며 눈 깜짝할 사이에 수 십 번의 금속성이 울려퍼졌다.
준의 공세가 반복되자, 문영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흥…꼬맹이 주제에 기세가 올랐군…”
다음 순간, 사내는 검은 송곳을 막아내는 동시에 몸을 옆으로 피하며 염력을 끌어올렸다.
“죽어라!”
고함 소리와 함께 적갈색의 염력이 미친 듯이 타올랐고, 사내의 손 끝에 뭉친 단단한 염력 덩어리가 그대로 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콰앙-!
갑작스레 터져나온 굉음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황급히 귀를 틀어막은 채 흙먼지가 솟아오르고 있는 훈련장의 중앙을 바라봤다.
잠시 후…검은 그림자 하나가 휘청거리며 흙먼지를 가르고 나타났다. 준이었다. 그러나 그의 손에는 마땅히 들려있어야 할 무기가 없었다.
“후…“
소년이 무기를 놓친 모습을 보자, 용병들은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한쪽 구석에서는 이미 승부가 결정된 것처럼 얼굴을 감싸며 괴로워하고 있는 자들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정과 이찬의 얼굴에는 오히려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 *
준은 잠시 서서 호흡을 가다듬으며 상대와 자신의 실력차를 가늠했다.
얼마 전까지 자신은 4성 무투사였지만, 대지의 불꽃덕인지 뭔지는 몰라도 현재는 5성 무투사에 더 가까웠다.
거기에 천지의 불꽃 덕분에 이미 자신의 수련법은 3격 상 수준까지 진화해있었고, 대지의 불꽃으로 인해 강인해진 신체 능력까지 모두 고려하면 아마도 왠만한 9성 무투사와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9성 무투사와 1성 대투사 사이에는 상당한 실력차가 있었지만…대지의 불꽃을 활용한 무투기까지 감안한다면 승산이 있고도 남았다.
“흥…꼬마야. 난 분명히 기회를 줬다. 네가 스스로 화를 자초했으니 너무 원망말거라.”
문영은 무기를 놓친 준을 바라보며 한껏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준은 이번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묵묵히 염력을 끌어올릴 뿐 이었다.
곧이어 준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열기와 함께 푸른 불꽃이 치솟자, 문영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건방진 놈…실력을 감추고 있었구나?”
쾅!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날아들었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영의 등 뒤에 주먹이 내리꽂혔다.
“흥, 꽤 빠르지만 아직 멀었다 애송아!”
문영은 준이 공격을 막으려는 생각조차 없는 듯 잽싸게 뛰어오르며 주먹을 휘둘렀다.
준 역시 문영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쾅!
“큭큭…염력 보호막이라…하지만 대투사의 염력 갑옷에 비할바는 못되지!”
무투사의 능력은 염력으로 보호막을 만드는데 그치지만, 대투사가 되고 나면 염력을 더욱 단단히 응집해 염력으로 갑옷을 만들 수 있었다. 준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면서도 준이 정면으로 공격을 주고 받는데는 노림수가 있었다.
“태초의 힘!”
그리고 마침내 준의 노림수가 적중하는 순간, 그의 몸을 둘러싼 염력이 날카롭게 변하며 폭발했다. 곧이어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문영의 적갈색 염력 갑옷이 쪼개지기 시작했고, 갑작스런 힘의 폭발 앞에 문영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애송이가!”
그는 고함을 지르며 상대의 손목을 낚아챈 뒤 있는 힘껏 염력을 끌어올려 준의 가슴팍을 내리쳤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준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하지만 있는 힘을 다해 발버둥쳐도 문영의 손가락은 갈고리처럼 그의 손목에 딱 달라붙어 도무지 놔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상대의 손을 뿌리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자, 준은 반대편 팔에 푸른 불꽃을 집중한 뒤 있는 힘껏 상대를 후려치기 시작했다.
* * *
쾅!
잠시 후, 준의 손바닥에서 푸른 화염이 폭발하자 결국 문영이 먼저 손을 놓고 말았다.
거리를 벌린 둘의 얼굴은 모두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먼저 피를 토한 것은 이준이었다.
“실패한 건가…?”
장내에 있던 누군가가 한숨을 쉬며 나지막한 소리로 읊조리자, 훈련장 전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 앉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영이 고꾸라졌다.
“으윽…”
피를 토하면서도 몸을 일으키던 준은 상대가 고꾸라지는 것을 보고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 앉았다.
……
“준아! 괜찮아?”
이정은 동생이 쓰러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몸을 날려 준을 부축했다.
준은 살짝 웃음을 지으며 입을 틀어막고 기침을 했고, 그의 손바닥에는 또 다시 붉은 피가 묻어나왔다.
“이거 덕에…목숨은 구했어.”
그리고 준이 망토를 벗어던지는 순간…청색의 갑옷이 은은한 빛을 발하며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녀석, 척 보기에도 귀한 물건인 것 같은데! 그런건 어디서 구한거야? 그것보다 대투사를 쓰러뜨리다니…! 정말이지 내 동생이지만 대단한 놈이야!”
“하하…칭찬 고마워 형…”
이준은 웃으며 형을 안심시키고는 저장반지에서 기력의 조각과 상처 치료약을 꺼내들었다.
“와아…!”
바로 그 때, 뒤늦게 장내에서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리에 있던 용병들 모두가 20살도 되지 않은 소년 하나가 대투사를 쓰러뜨리는 광경을 보고 너무나 놀란 나머지 소리조차 지르지 못 하고 있었던 것 이다.
그리고 준의 머릿속에는 수 십 명의 용병들이 내지르는 함성 소리보다 더 가치 있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요놈…정말 잘했다. 이 스승이 보기에도 쉬운 상대가 아니었는데, 아주 잘했다! 그 힘, 그 자신감! 그 의지! 그게 바로 강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질인게야! 우는 소리 한번 하지 않고 정말 잘해냈다.”
잠시 후 훈련장에는 이씨 가문의 세 형제를 비롯한 간부 몇 명만이 남게 되었고, 나머지 용병단원들은 모두 초토화 된 본부를 정리하기 위해 떠났다.
만일 준이 제 때 도착하지 못 했더라면 이정과 이찬은 물론이고 자리에 있던 모두가 죽음을 면치 못 했을 것이니, 사막의 칼날 용병단의 모든 용병들은 엉망이 된 본부를 정리하면서도 끊임없이 두 단장의 동생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훈련장에서 준이 두 형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동해가 다가와 말없이 그 옆에 자리를 잡았고, 순간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하…! 형들, 이분은 동해라고 음… 이번에 알게 된 선배님이셔. 성격은 조금 괴팍하시긴 한데, 실력은 엄청 나.”
하지만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준의 노력이 무색하게 동해는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하, 아무렴 어때, 너와 친분이 있다면 우리에게도 좋은 선배다. 먼 길 오셨는데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드린 것 같아 부끄럽군요, 선배님.”
정이 준의 노력에 화답하듯 먼저 일어나 예를 갖추자, 동해 역시 미묘하게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참…괴팍하기는…’
준은 얼음왕의 그런 행동을 보며 묘한 웃음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형을 바라봤다.
“형, 그나저나 대체 무슨 일이야? 왜 갑자기 사막 용병단에 무투사니 대투사니 하는 것들이 줄줄이 나타났는데? 그리고 예린이는 왜 갑자기 사라진거야!”
동생의 질문에 이정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후! 2주 전쯤에…예린이가 밖으로 나간 후에 갑자기 돌아오질 않아서 단원들을 풀어 조사해보니 누군가가 예린이를 납치한 것 같아. 예린이가 실종된 장소에서는 전투 흔적이 있었고…피 묻은 뱀 비늘이 떨어져 있었어. 아마 예린이의 마수에게서 떨어져 나온 것 같아.”
준은 화염쌍두사가 있음에도 예린이가 납치를 당했다는 말을 듣자 깜짝 놀라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뭐? 화염쌍두사를? 그럼…상대는 최소 투령급이란 소리야? 아니, 그것보다…예린이는 겉보기에는 그냥 평범한 어린아이잖아. 애시당초에 투령급의 강자가 그런 어린 아이한테 왜 관심을 가져?”
정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나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예린이가 실종된지 이틀 뒤에 갑자기 사막 용병단 놈들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했어. 불과 일주일만에 도시의 모든 용병단과 다른 세력들이 박살났지. 우리도 어떻게든 다른 세력들과 연합해 대항해보려고 했지만…놈들은 우리가 다른 세력과 손잡기 전에 비교적 약한 세력부터 착실하게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어. 대투사 하나에 예닐곱명의 무투사가 합류하니 다른 세력들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쓸려나갔지. 차라리 우리를 먼저 쳤다면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면서 다른 세력과 연합을 했을 텐데…철저히 계산하고 준비한 뒤 일을 벌인 게 틀림없어. 네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미 모래바람성은 완전히 사막 용병단 소굴이 되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