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모래바람성의 재난
약로의 말에 따르면 그 지도조각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방대한 염력으로 만들어진 모종의 봉인이 걸려있어 최상위 급의 연금술사처럼 영혼 탐지 능력이 뛰어난 자가 아니라면 결코 그 지도를 따라 그릴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준은 활짝 웃으며 동해의 손에서 지도를 건네받았다.
지도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나고 있었고, 누렇게 변색된 색에서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오랜 세월이 느껴졌다.
그는 지도를 건네받자마자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지도 조각을 꺼내 두 개의 조각이 짝이 맞는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헌데…동생은 어쩌다가 그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겐가?”
“원래 오래되고 신기한 물건들에 관심이 많아서요.”
“허허…동생, 어차피 지도 조각은 자네 손에 있지 않은가? 게다가 그 그림은 복제도 불가능한데, 좀 알려주면 안 되나? 그 지도가 가리키고 있는 게 대체 뭔가? 응?”
이준이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자, 동해는 더욱 호기심이 발동한 듯 했다.
“하하, 저도 이번이 두 번째 조각을 얻은 것뿐이라…아는 바가 없어서요.”
“에이! 이 사람! 너무 야박하구만! 어떤 멍청이가 정체도 모르는 지도 조각 하나 얻자고 뱀 인간들의 소굴로 걸어가!”
하지만 동해의 거듭되는 질문에도 준은 뜻 모를 미소만 흘리다가 말을 돌렸다.
“하하, 선배님, 그보다 이제 본래의 실력도 되찾으셨으니 지도 가게는 문을 닫는 건가요?”
동해는 준이 계속해서 말을 돌리자 아무리 물어봐도 만족할만한 답변을 들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더 이상 묻기를 포기했다.
“흠…정말 답하기 싫은가보군. 더 이상 묻지 않겠네. 뭐…여튼, 내가 이곳에 머문 것은 그 지도 조각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봉인을 풀기 위해서였던 것이 더 컸지. 그런데 지도 조각은 이미 자네 손에 넘어갔고, 봉인도 풀렸으니 남아 있을 이유가 없지. 왜? 뭔가 부탁할 일이라도 있나?”
“헤헤, 사실 볼 일이 있긴 합니다.”
준이 웃으며 입을 열자, 동해 역시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하하, 벌써 은혜를 갚아야 하는 건가? 그래, 내가 무슨 도움을 주면 빚을 갚을 수 있겠나?”
“아하하, 선배님이야말로 너무 야박하시군요. 전 선배님과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데, 선배님은 벌써 빚 청산을 하고 관계를 끊을 마음이 드셨나 봐요?”
준이 가볍게 너스레를 떨자, 동해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렸다.
“허허…젊은 친구가 정말 보통이 아니군. 6레벨의 연금술사와 빨리 연을 끊고 싶은 투사가 어디 있겠나? 앞으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은 나도 마찬가지일세. 그럼 말을 바꾸지. 우리가 앞으로도 잘 지내려면 내가 뭘 도와주면 되겠나? 내 능력이 닿는 한 뭐든지 도와주지. 말해보게 동생.”
동해의 입에서 원하던 답변이 나오자, 준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흠…그러니까 두 달 후에 제가 운남종에 볼 일이 좀 있거든요. 그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되면 선배님이 중재에 나서주실 수 있을까요?”
“호오…운남종? 쟁쟁한 강자들이 가득한 곳에 제 발로 들어가 문제를 일으킬 요량이라니…이거 실력뿐 아니라 배짱까지 두둑한 친구구만. 헌데 왜?”
“흠…뭐…갚아야 할 은혜도 있고, 원수도 있으니까요.”
운남종이라면 가한 제국 내에서 손에 꼽는 세력 중 하나이니, 제 아무리 동해라 해도 흔쾌히 수락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흐음…허허, 누가 6레벨 연금술사 아니랄까봐 시작부터 판을 크게 벌리는구만…”
“하하, 걱정 마세요 선배님. 싸워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제가 여러 명에게 공격을 당하는 일이 생기면 얼굴이나 비춰달라는 것이죠. 천하의 얼음왕이 중재에 나서는데 미쳐 날뛸 자가 가한 제국 내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동해는 준의 제안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자신이 겪은 바에 의하면, 눈앞에 있는 소년 역시 최소한 자기와 동급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도움’이 함께 싸워달라는 것이 아니라 고작 ‘중재’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 이다.
“흠…이상하군, 그 정도라면 동생의 힘으로도 가능하지 않은가…? 운남종 전체를 상대로 싸움을 벌일 거라면 내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지만…”
“하하, 제가 사정이 좀 있어서…거기서 제 실력을 다 보일수가 없거든요.”
“엥?”
동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참 재미있는 사람이군. 좋아. 한번 가보지. 전면전을 벌이는 거라면 문제가 있지만…그 정도라면 뭐, 가능할거야.”
“하하, 감사합니다. 선배님.”
동해의 대답에 준은 환히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가한제국 10대 강자의 동행이라면 어느 정도의 억제력은 가질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 * *
다음 날 아침, 동해는 지도 가게를 닫고 소년과 함께 성을 떠났다.
하지만 지도 가게에 있던 물건들을 정리하지는 않았다. 먼 훗날 싸움에 염증을 느끼게 된다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이젠 어디로 가지?”
“일단 모래바람성에 먼저 가고 싶습니다. 형제들이 그쪽에 있어서요. 아직 남은 일도 좀 있구요. 운남종에 가려면 아직 두 달 정도 여유가 있는데, 선배님은 어떠십니까?”
준의 질문에 동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당장 어디 갈 곳도 없고. 가보지.”
“하하, 투황과 함께 여행이라니, 아주 재미있겠군요.”
“자…그럼 가보세.”
말을 마치자마자 동해의 등에서 냉기가 뿜어져 나오며 이내 단단하고 투명한 얼음 날개가 생겨났다.
이윽고 준의 등에서도 까만색 날개가 펼쳐졌고, 날개를 펄럭이자 두 사람의 몸이 지상을 벗어나 푸른 상공으로 솟구쳤다.
* * *
두 사람의 비행 속도는 육지에서 타는 그 어떤 이동수단과도 비교할 수 없었고, 걸어서는 열흘이나 걸리던 거리도 쉬지 않고 비행하니 하루 밖에 걸리지 않았다.
결국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반쯤 모습을 감출 무렵이 되자, 두 사람의 시야에 황금빛의 모래 바람성이 들어왔다.
비행을 하는 내내 준의 입에서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의 자신이라면 모래 바람성에서 암흑성까지 하루 만에 비행을 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력의 조각의 도움 없이도 하루를 꼬박 날아 모래 바람성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것 이다.
‘3격의 수련법과 4격의 수련법이 이렇게 까지 차이가 나다니…2격 이상의 수련법이라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 * *
준은 동해와 함께 모래 바람성의 골목을 지나 성의 외곽에 위치한 용병단으로 향했다.
하지만 준은 지상으로 내려가 골목길을 지나는 사이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도시의 분위기가 너무 냉랭하게 가라 앉아 있었던 것 이다. 그리고 사막 용병단의 표식을 달고 다니는 자들이 이상할 정도로 늘어나 있었다.
“조금 이상한데…”
골목길을 돌아 성의 외곽 지역에 도착하자, 늘 사람으로 붐비던 사막의 칼날 용병단 주위는 한산하기 그지없었고, 대부분의 가게 들이 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준의 표정이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갔다. 잠시 후, 그는 검은 송곳을 단단히 잡은 채 싸늘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해 역시 갑자기 어두워진 준의 표정을 보고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곧이어 준이 긴 한숨을 내뱉으며 용병단 본부의 문을 여는 순간, 굉음과 함께 정체불명의 염력이 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
쾅!
소년이 굳은 표정으로 주먹을 휘두르자 푸른 화염이 허공을 가로질러 총알이 날아온 방향의 벽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냈다.
“이준 도련님?”
벽이 불타자, 그 뒤에 숨어있던 용병 하나가 이준을 알아보고 놀란 토끼 눈이 되어 황급히 달려 나왔다. 사내의 몸 이곳저곳에는 핏 자국이 가득했다.
“저, 저, 이준 도련님, 저는 사막의 칼날 용병단 제8소대장 한모라고 합니다. 예전에 도련님과 함께 사막 땅굴을 탐색하는 임무를 맡았던…”
사내의 목소리에는 반가움과 놀라움, 그리고 걱정이 가득했다.
“무슨 일이죠? 이건 마치 전쟁이라도…”
“지금 사막용병단 놈들이 개떼처럼 몰려 들어와서 단장님들을 포위했습니다! 수가 너무 많아서 저희로서는…!”
준은 피를 철철 흘리는 한모에게 상처 치료제를 내민 뒤 즉시 검은 송곳을 움켜잡았다.
“이…이유는 모르겠지만, 얼마 전부터 갑자기 사막용병단 놈들이 다른 용병단과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즈음 사막용병단에 7~8명의 무투사가 나타났습니다. 대투사도 한 명이 늘어났구요. 놈들은 그 세력을 바탕으로 요 며칠 사이에 완전히 성을 쓸어버리고 있습니다. 지금 남은 것은 저희 용병단 뿐입니다.”
“무투사 7, 8명에 대투사 한 명이요? 그럴 리가…! 사막용병단이 그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잖아요. 예린이는요? 예린이에게 투령 수준의 마수가 있는데…”
“모…모르겠습니다. 며칠 전에 밖에 나간 뒤 돌아오질 않고 있습니다. 단장님이 사람을 시켜 찾아봤지만…여러 흔적으로 보건데, 아마도 누군가에게 납치를 당한 듯합니다.”
바로 그 때, 한모의 말을 듣던 준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 * *
널찍한 사막의 칼날 용병단의 훈련장에서는 두 명의 투사가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기다란 창을 든 사내가 번개의 힘이 깃든 창을 내지를 때 마다 노란 염력을 두른 사내는 여유롭게 그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고, 한 눈에 보기에도 둘의 실력 차는 상당히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노란 염력을 사용하는 사내는 마치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창을 든 사내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
훈련장의 한켠에서는 사막 용병단의 대원들과 이정이 서있었지만, 그들 모두 살기등등하게 눈을 빛낼 뿐 둘의 전투에 끼어들지 못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시 노란 염력을 사용하는 사내가 이찬의 창을 피하는 순간, 용병단의 대원하나가 이정을 향해 달려왔다.
“단장님, 후문도 막혔습니다. 달아날 곳이 없습니다.”
“빌어먹을…좋아. 도망갈 수 없다면 이제 죽을 때까지 싸울 뿐 이다. 다들 각오는 되어 있겠지?”
“네! 단장님! 걱정마십시오! 저희 형제들 중에는 동료를 져버리고 달아나는 비겁자는 없습니다!”
정은 우렁찬 부하들의 함성 소리에 쓴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좋다. 너희들과 함께 해서 행복했다. 그리고 내가 숨기라고 했던 물건은 잘 숨겼나?”
“네, 잘 처리했습니다!”
“그래. 잘 했다. 우리는 오늘로 마지막을 맞이하겠지만…내 동생인 준이 언젠가 우리의 복수를 해줄 것 이다. 그 아이는 우리보다 훨씬 재능이 뛰어나니까.”
“독사의 춤!”
바로 그 때, 굉음과 함께 이찬의 창끝에서 은빛 섬광이 폭발했다.
“하하, 쓰레기 같은 놈!”
노란색 염력을 두른 사내는 미친 듯이 웃으며 가볍게 번개의 염력을 막아내고는, 즉시 몸을 날려 상대의 가슴을 내리쳤다.
“쿨럭—”
이찬은 상대의 공격에 제대로 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하고 피를 뿜으며 날아갔고, 곧이어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위에 부딪혀 무력하게 쓰러졌다.
“이정도 실력으로 나랑 겨루겠다고 한거냐? 푸하하하하!”
사내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찬을 한껏 비웃으며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
“하하, 죽어라!”
쾅!
그러나 사내와 이찬의 거리가 불과 1미터도 남지 않았을 무렵, 시커먼 송곳 하나가 날아들어 사내의 주먹을 가로막았다.
“흥, 누구냐!”
다음 순간,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쏠리고, 검은 망토를 입은 소년 하나가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승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