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봉인 해제
한편, 어둑어둑한 복도에서는 동해가 조용히 기대앉아 연금비약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무덤덤해보였으나, 끊임없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고, 발끝을 까딱거리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초조한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봉인에 걸려 준에게 건네 준 재료는 약화된 염력으로 몇 년에 걸쳐 간신히 구한 것들이었으니, 준이 비약의 제조에 실패하는 순간 그가 본래의 실력을 찾을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순간, 그의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생각해보니,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아직 20살도 되지 못 한 애송이 연금술사에게 6레벨 연금비약의 제조를 맡긴 것은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미 재료와 조합표는 넘어갔다. 후회해도 늦은 것이다.
그는 문이 열리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눈앞의 소년을 빤히 바라보았다. 천하의 동해라도 차마 성공인지 실패인지를 먼저 물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고, 드디어 소년의 입이 열렸다.
“하마터면 거의 실패할 뻔했어요.”
“하하하! 하하하하! 아하하하하! 이럴 수가! 내가 정말 사람을 잘 봤군!”
동해는 미친 듯이 웃으며 준이 건넨 약병을 건네받았다.
“자, 그럼 선배님…지도의 나머지 부분을…”
준은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기뻐하는 동해를 앞에 두고 조심스럽게 지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동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민망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흠흠…젊은이…”
“선배님…설마, 약속을 어기시는 것은 아니죠?”
소년은 동해가 헛기침을 하며 난색을 표하자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구겼다.
“하하, 아닐세 아닐세! 다만…일단 이 약효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 말이야. 나도 이 연금비약이 보라색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혹시, 아주 혹시라도 약효가 없으면 어쩌나 싶어서 말이야.”
준은 자신을 의심하는 듯한 동해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선배님…제가 그걸 만드느라 하룻밤을 꼬박 새가면서 죽을힘을 썼는데…지금 저를 의심하시는 겁니까?”
“아하하, 아니, 미안하네. 하지만…그, 만에 하나 이게 가짜라면, 내가 너무 손해 보는 장사이지 않은가?”
동해의 뻔뻔한 태도에 소년은 살짝 울화가 치밀었다.
“선배님…저는 분명히 조합표대로 약을 만들었고, 약효가 있을지 없을지는 제 몫이 아니지요. 만일 봉인이 풀리지 않는다해도 그게 왜 제 책임이죠? 애시당초 그 조합표가 잘못됐거나, 그 연금비약의 힘으로는 메두사의 봉인을 풀 수 없는 것 일 수도 있잖아요! 아니, 제가 뱀독말풀을 구한 것도 웃기잖아요! 가한제국 10대 강자씩이나 되시는 분이 연금술사와 투사들이 거래할 때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칙을 모르시는 것도 아니고…본래 그것도 선배님이 준비하셔야 하는 건데…지금 목숨 걸고 메두사의 성지에 기어들어가 재료까지 구해온 후배에게 그게 할 소립니까!”
“윽…”
동해는 다소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흠흠…그, 그…그래, 내가 미안하네. 내 사과하지. 그럼 이렇게 하지. 곧바로 봉인이 풀리지 않더라도,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으면 즉시 지도를 내어주겠어. 어때? 괜찮지 않은가?”
“후…”
이준은 더듬더듬 변명을 늘어놓으며 새로운 제안을 하는 동해를 보자, 도저히 언짢은 기색을 숨길 수가 없었다.
“좋아요. 그 대신, 이게 제 마지막 양보입니다. 더 이상은 어떤 요구도 들어드릴 수 없어요.”
“허허허! 그래그래, 고맙네! 고마워, 젊은 친구가 실력만 좋은 게 아니라 인성까지 아주 훌륭하군! 자, 그럼 어서 지하실로 내려가지. 봉인이 풀렸을 때 내 기운이 밖으로 퍼져나가지 않아야 하니까!”
동해는 신이 나서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발걸음을 옮겼고, 준은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그의 뒤를 따랐다.
‘염병할…가한 제국 10대 강자씩이나 되는 양반이…흥. 두고 봐. 약속을 어기는 순간 아주 잿더미를 만들어 버릴 테니까.’
……
동해의 뒤를 따라 구불구불한 복도를 걸어가자 이내 지하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지하실에 도착한 뒤에도 한참을 걸어 점점 더 어두운 곳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약 20분 정도를 걷자 동해가 드디어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이곳일세.”
동해가 들고 있던 램프를 통해 주변을 둘러보자, 두꺼운 철로 만들어진 검정색 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윽고 철문에 달린 사자머리모양의 손잡이를 돌리자,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두터운 철문이 서서히 열리면서 한 줄기 빛이 새어나왔다.
지하실 안으로 들어가자 기묘할 정도의 추위가 느껴졌으며, 사방에는 얼음이 가득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니 밀실의 천장과 벽에는 하얀 결정이 맺혀있고, 이곳저곳에 장검처럼 날카로운 고드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하하, 내가 수련하는 염력 수련법이 얼음 속성에 가까워서 종종 이곳에 와서 수련을 하곤 하거든…그래야 효과도 더 좋더군. 바깥과도 거리가 있어 다른 강자들에게 들킬 염려도 없고 말이야.”
동해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에게 나쁜 뜻이 없다는 것을 해명하려 하는 듯 했지만, 준은 그런 것 따위는 관심조차 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았으니까 빨리 약효를 실험해보죠.”
“허허, 그래, 그래. 미안하군.”
동해는 후배의 무례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언짢은 기색 하나 없이 주술사의 비약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 두었다.
잠시 후…그는 긴 한숨을 한번 내쉬고는 보라색의 연금 비약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
약 30분이 지났을 무렵…갑자기 난폭한 에너지가 솟구치며 동해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백색에 가까운 푸른 염력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주위에 맺혀있던 고드름과 얼음을 산산조각 냈다.
곧이어 보라색 에너지가 연금비약에서 흘러나오자, 동해의 이마에 뱀 무늬가 새겨지며 녹색의 에너지와 보라색 에너지가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어어억…”
그리고 두 개의 에너지가 서로 교차하며 동해의 목덜미를 지나 머리로 올라가는 순간, 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또 다시 10여 분의 시간이 흐르고, 푸른색의 기운은 어느새 연금 비약의 약효에 의해 서서히 힘을 잃어가는 듯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흠…정말 효과가 있나? 나도 하나쯤 만들어 두어야겠는 걸…나라고 해서 봉인을 당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준이 보라색 연금비약의 약효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 약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심하거라. 봉인이 완전히 풀린 모양이다.”
약로의 충고에 소년은 언제라도 푸른 불꽃을 끌어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다음 순간…보라색 에너지가 뱀 무늬를 완전히 밀어내고, 그와 동시에 몇 십 년 동안이나 억제되어 있던 투황의 염력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 망할 봉인이 드디어 풀렸구나! 크하하하!”
동해는 공중을 떠다니며 미치광이처럼 고개를 젖히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숨넘어갈 듯한 웃음소리가 멈추고 동해의 눈빛이 소년을 향하는 순간, 미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동해는 자신의 염력처럼 냉기가 가득한 서늘한 눈으로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준의 얼굴에서 시선을 멈췄다.
왕년의 얼음왕은 괴팍하고 포악하기로 유명한 자였으니, 누구도 감히 그의 물건에 손을 대지 못 했었고, 준 역시 그의 성품에 대한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다.
준은 실력이 돌아오자마자 살기등등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동해의 눈빛을 보며 서서히 염력을 끌어 올렸다.
사실 동해는 소년이 원하는 그 지도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몰랐다. 다만 누군가가 그 지도 조각이 아주 대단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것이라고 했고, 메두사도 탐을 내던 물건이었으니 매우 귀한 물건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동해는 공중에 선채 한기를 내뿜으며 계속해서 준을 노려봤다. 그는 완전히 제 실력을 되찾은 투황을 눈앞에 두고도 조금도 기죽지 않는 소년의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력이 돌아오니 왕년의 고약한 성질머리도 함께 돌아오고 만 것 이다.
그는 머릿속으로 잠시 눈앞에 앉아있는 애송이와 대결을 펼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얼음왕의 진정한 위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제 아무리 대단하다해도 이제 20살을 넘기지 못 한 애송이다.
왕년의 얼음왕이 가진 진정한 실력을 보여주면 저 꼿꼿한 태도도 조금은 수그러들 것 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그의 머릿속에 정체불명의 백색 화염이 스쳐지나갔다.
곧이어 그 백색 화염이 가진 무시무시한 위력과 고통이 뇌리를 스치는 순간, 동해는 자신의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백색 화염이 눈앞에 아른거리자 힘을 되찾으며 부풀어 오른 자신감에 제동이 걸렸다.
대체 눈앞의 저 소년은 얼마나 자신이 있길래 실력을 되찾은 가한제국의 10대 강자를 두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단 말인가.
지금 소년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으로 미루어보아 무투사 인 것이 틀림없지만, 직접 겨뤄본 소년의 힘은 절대로 무투사 급이 아니었다.
‘후…지금은 아니야. 실력이 돌아왔다고는 해도 아직 저력을 모르는 적을 상대로 결투를 벌일 상태는 아니지.’
결국 고민을 거듭하던 동해는 쓴 웃음을 지으며 공중에서 내려와 준에게 다가갔다.
“하하, 선배님, 전 또 실력을 회복했다고 바로 마음이 바뀌신 줄 알았습니다. 가한 제국의 10대 강자가 어린 후배를 그렇게 노려보면 어찌 겁을 먹지 않겠습니까.”
준의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동해의 마음속에 깃들어 있던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년에게는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하, 젊은이, 아니, 이제 동생이라고 불러도 되겠나? 미안하네. 갑자기 힘이 돌아오니 일시적으로 내 기운이 통제가 안되더군. 사실 아직도 적응이 잘 안되네.”
“아하하, 무섭긴 하지만 조금 아쉽기도 하군요. 얼음왕의 진짜 실력을 눈앞에서 보고 싶기도 했는데 말이죠.”
소년의 한마디에 동해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아무리 그래도 무투사 수준의 애송이가 감히 가한제국의 10대 강자에게 도발을 한 것 이다.
동해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준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허세가 아니었다.
수많은 전투 경험을 가진 그였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의 젊은이는 결코 허세나 치기 어린 자만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놈…대체 정체가 뭐지?’
동해는 잠시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소년의 눈을 보는 순간 전력을 자신이 다해 부딪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게다가 6레벨의 연금술사가 아닌가. 싸움에서 이긴다 해도 달아나기라도 하는 날에는 가한제국 어디에도 발을 붙일 수가 없을 것이 뻔했다.
“하하, 동생도 참…짓궂구먼. 이런 다 늙어빠진 늙은이가 무슨 힘이 있다고…”
결국 동해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준이 손을 내밀며 빙긋이 웃음을 지었다.
“선배님…그럼 약속을 지키셔야지요.”
동해는 그 순간 소년의 눈에서 감도는 기묘한 살기에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이런 기분이 들 때는 상대를 건드리지 않는게 상책이었다.
‘역시…이놈 뭔가가 있군…건드리지 않는 게 좋겠어.’
“하하하, 그래그래, 내가 그걸 잊었군.”
그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저장반지에서 지도 조각을 꺼내 준에게 내밀었다.
“그런데 말이야, 지도를 제작한지 몇 십 년이 됐는데…이렇게 복잡한 지도는 본적이 없네. 손에 넣고 얼마 되지 않아 따라 그려보기도 했지만, 아무리 애써도 똑같이 그릴 수가 없더군. 아마 뭔가 특수한 주술이라도 걸려있는 모양이야. 그리고…내가 가지고 있는 두 조각도 완전한 지도는 아닌 듯하네. 참고하게.”
이는 준 역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굳이 입 밖에 꺼낼 이유가 없는 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