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얼음왕과의 재회
……
이준은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은 뒤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영혼 탐지 능력이 신체 내부로 쏠리는 순간, 그는 자신의 몸속에 자리 잡은 염력 회오리의 크기가 열 배 이상 커져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 하나, 그의 염력회오리에는 푸른 빛의 염력이 생겨나 있었는데, 그 위로는 푸른 불꽃이 덧씌워져 있었다.
투사의 전투력은 매우 다양한 요소의 영향을 받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염력 수련법의 레벨이었다.
그리고 지금 준의 염력은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예전보다 월등히 나아져 있었다.
가장 신기한 것은, 염력이 발동되는 과정이 눈에 띄게 복잡하고 정교해졌지만, 발동 시간 자체는 예전보다 더 빨라졌다는 점 이었다.
“성공인 것 같아요…”
“성공했단 말이냐?”
“네…!아, 아마도…?”
준이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약로가 환히 웃으며 제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하! 그래, 불개가 정말로 진화하는구나! 정말로 진화해! 그 말은…너도 계속해서 강해질 수 있다는 소리고!”
‘계속해서 강해질 수 있다’는 말에 준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잠시 후, 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푸른 불꽃을 이곳 저곳에 쏘아보았고, 그의 염력이 닿자마자 거대한 바위가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허허…3격 중이라니…생각보다 더 많이 성장했구나.”
약로는 준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헤헤, 거봐요!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하이고…요놈아, 저 작은 녀석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재가 되고 말았을게다! 하여간 운 좋은 녀석…!”
약로는 장난스레 웃으며 칠색 이무기를 가리키자, 준 역시 방금 전의 고통이 떠올랐는지 자기도 모르게 식은 땀을 흘렸다.
“맞아요…정말 타죽을 뻔 했죠…”
준은 민망한 듯 웃으며 소매에서 칠색 이무기를 꺼냈다.
푸른 화염을 배불리 먹은 덕인지 그녀는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고, 옅은 푸른빛이 은은하게 그녀의 몸 주위에 맴돌고 있었다.
“칠색 이무기도 네 단계에 걸쳐 성장하지…그리고 각 단계별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필요하단다. 대지의 불꽃을 그렇게나 흡수했으니…곧 진화하겠지.”
“어느 정도나 강해질까요?”
준은 푸른 빛에 감싸여 곤히 잠든 칠색 이무기를 바라보며 약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투왕정도 되겠지…마지막까지 진화에 성공한다면 투종이라 하더라도 감히 손대기 어려운 존재가 될게다.”
“투종이요…?”
“이런 생물은 극히 드물다. 어쩌면 네 손에 있는 그 아이는 투기대륙 전체에 단 하나뿐인 칠색 이무기일 수도 있어.”
“정말 그렇다면 더 좋죠.”
준은 베시시 웃으며 다시 조심스레 칠색 이무기를 소매 안으로 집어 넣고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이제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래,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구나.”
소년은 희미하게 웃으며 저장반지에서 검은 송곳을 꺼내들었다.
그가 시험 삼아 가볍게 검을 휘두르자, 그의 발밑에 있던 거대한 바위가 산산조각나며 작은 자갈로 변했다.
“기다려…약속은 꼭 지킬 테니까.”
* * *
금빛 모래로 가득한 사막 위로 드문 드문 푸르른 풀잎이 보이기 시작하자, 준은 검은 색 망토를 꺼내 걸쳤다.
소년은 꼬박 하루를 더 걸어 멀리 금빛으로 빛나는 성이 보이는 곳까지 이동했다.
그는 모래바람성이 시야에 들어오자 마음이 복잡한 듯 스승에게 마음속으로 말을 걸었다.
“스승님, 동해에게 연금비약을 정제해줘도 되는거에요?”
“허허, 요놈, 투황에게 빚을 지워 손해 볼 일은 없다. 게다가 나머지 그림 조각을 손에 넣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야. 대지의 불꽃도 대단하지만, 정화의 불꽃과는 비교할 수 없으니 꼭 손에 넣어야 한다. 정화의 불꽃을 손에 넣으면 투기 대륙 전체에서도 널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가 없을게다.”
“그렇지만 그 노인네는…정말 장난이 아니라구요.”
소년은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껄껄, 그래봤자 투황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 스승이 보험을 준비해둔 것 아니겠느냐.”
“좋아요. 그럼 스승님 말대로 하죠. 정말 투황의 마음을 살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두달 후에 제가 나설아를 꺾어도 운남종이 가만히 있는다는 보장이 없으니…얼음왕을 알아두면 도움이 되겠죠?”
약로는 제자의 꾀가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그래, 연금술사들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은 바로 강자들과의 인맥이니까. 고하가 혼자였다면 감히 뱀인간족의 성지까지 갈 수 있었겠느냐? 너도 마찬가지지. 앞으로 가능하면 많은 강자들과 관계를 쌓아두거라.”
“맞아요.”
준은 웃으며 머리를 끄덕인 뒤 다시 거대한 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순조롭게 도시에 입성한 준은 길바닥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는 기억을 더듬어 다시 골목 끝까지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도’라고 쓰여있는 무성의한 낡은 간판이 그의 눈에 들어오자, 그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그곳을 향해 다시 발을 옮겼다.
날이 이미 저문 탓인지 상점의 대문은 이미 굳게 닫혀 있었고, 문틈 사이로는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준은 고개를 돌려 보는 눈은 없는지 확인한 뒤 조심스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니 지난 번 전투로 인해 망가졌던 내부가 깨끗하게 수리가 되어 있었고, 동해는 그 날처럼 고개를 숙인 채 지도를 그리는데 열중하느라 준이 들어온 것 조차 알아채지 못 하고 있었다.
상점안에는 세 명의 남자와 여자 하나가 지도를 고르고 있었는데, 네 사람 모두 제법 화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세 명의 남자는 깔끔하게 생겼지만 다소 오만한 인상이었고, 여자 한 명은 아리따운 외모에 새빨간 긴 치마까지 입고 있어 더욱 눈에 띄었다.
준은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동해에게 다가가 지도를 고르는 척하며 인기척을 냈다.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들은 얼음왕은 그제서야 지도에서 시선을 거두고 준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곧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말에 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죄송합니다만…저희 가게가 문을 닫아서요. 지도를 구매 하시려면 내일 다시 오시지요.”
“네…? 아니 그게 무슨…”
준이 어이가 없다는 듯 동해를 바라보자, 갑자기 두 명의 건장한 사내가 무기를 뽑아들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응?”
너무나 황당한 전개였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찾아왔는데, 정작 당사자는 자신을 모른척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무기를 뽑아들다니…
바로 그 때, 새빨간 치마를 입은 여인이 서서히 걸음을 옮기며 준을 바라봤다.
“이분이 지도를 만드는 것을 방해하다니…간이 부었군요.”
‘이분…? 뭐야, 이 여자도 그럼 이 사람이 얼음왕인걸 알고 있는거야?’
준은 무언가 말을 하려다가 일단 입을 다물고 가만히 동해를 바라봤다.
동해는 여전히 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있었다.
‘대체 뭐야 이 상황은…’
준은 괜한 일에 엮이기 싫어 가게 밖으로 나갈까 잠시 고민에 잠겼다.
‘후…아니야. 그래도 정화의 불꽃인데…’
그러나 정화의 불꽃이 걸린 일이었다. 그렇게 쉽게 ‘네, 죄송합니다.’ 하고 물러설 수는 없는 일인 것 이다.
결국 결심을 굳힌 소년은 손에 쥔 지도를 들고 두 사내를 지나쳐 동해에게 걸어갔다.
빨간 치마를 입은 여인은 준의 그런 태도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치켜뜨며 가볍게 고개를 까딱거려 두 사내에게 지시를 내리자, 두 사내는 즉시 몸을 돌려 준을 붙잡으려 했다.
바로 그 때, 소년이 손에 든 지도를 노인 앞에 던지며 나지막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약, 필요 없어지셨나 봐요?”
소년의 손을 떠난 지도가 허공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바닥에 떨어지자,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의 눈이 반짝였다.
“미친 놈…죽고 싶어 환장한 놈이군.”
하지만 여인의 예상과 달리 얼음왕은 붓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준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하하, 녀석, 드디어 왔구나. 정말 오래 기다렸다.”
“또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빨리 왔습니다. 아, 전에 찾던 물건은 이미 찾았습니다. 그 때 어르신이 주신 지도 덕을 좀 봤지요.”
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차린 동해는 놀란 눈으로 그를 훑어보다가 환히 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가 부탁한 물건은 구했나?”
한편,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둘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꽤 오랫동안 동해를 보필해왔지만, 저런 대접을 받아본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저 자식…”
그녀는 짜증과 질투가 섞인 표정으로 자신의 수하들을 불렀다.
“너희들, 저 꼬맹이가 나가고 나면 몰래 뒤를 밟아봐.”
그러나 곧이어 준의 입에서 나온 말에 그녀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하하, 네, 구했습니다. 역시 물건이 물건인지라 찾기가 어렵더라구요. 뱀인간들의 성지에 가서야 겨우 구할 수 있었습니다. 뭐, 덕분에 명성이 자자한 메두사도 볼 수 있었구요.”
“호오…메두사를 만났나?”
동해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준을 바라봤다. 메두사를 만나고도 살아왔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한 때 가한제국의 10대 강자였던 자신조차 메두사에게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염력을 봉인당했는데, 무투사에 불과한 꼬맹이가 그 무시무시한 메두사를 만나고도 무사하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하하! 역시 메두사의 명성이 괜한 것은 아니다 싶었습니다. 간신히 목숨만 건졌지요. 그래도 덕분에…”
소년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저장반지에서 노란 식물 하나를 꺼내들었는데, 식물은 동글동글 말려있는 모습이 마치 노란색 뱀처럼 보였고, 식물의 꼭지부분에는 뱀의 머리마냥 주먹 크기의 혹이 맺혀있었다.
“하하, 본의 아니게 번거롭게 만들었구만.”
동해는 식물을 받아 들고는 활짝 웃음을 지었다.
“하하, 서로 좋자고 한 일인데요 뭘.”
점포 한 켠에서 두 사람을 대화를 듣고 있던 여인은 즉시 수하들을 불러 아까 내린 명령을 취소했다.
메두사를 보고도 살아나왔다는 것 만으로도 그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에게는 그리도 냉담한 얼음왕마저 저 어린 소년을 마치 오랜 지기를 대하듯 하고 있으니, 괜히 시비라도 붙었다가는 이 집에서 무사히 나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쳇…말도 안돼. 가한 제국에 저런 어린 강자가 있다는 얘기는 듣도보도 못 했다고…메두사와 마주치고도 살아나왔다면 대체 얼마나 강한거야? 그런데 도 소문이 안 났다고?’
“저, 스승님…”
두 사람이 반갑게 대화를 나누던 것을 지켜보던 빨간 치마의 여인은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동해는 대화를 방해받은 것이 불쾌하다는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인상을 찌푸리며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이었다.
“돌아가. 앞으로 다신 오지 말고. 그리고 네 아버지에게도 똑똑히 전해둬라. 이런 식으로는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 오히려 내 신경만 거스를 뿐이니까 더 이상 서로 얼굴 붉힐 일은 만들지 말라고 해.”
동해의 무례한 언사에 여인은 얼이 빠졌다. 하지만 염력이 봉인당했다고는 해도 천하의 얼음왕에게 따지고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그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준은 동해가 얼마나 냉정한 인물인지를 실감했다.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척 보기에도 그녀는 꽤 오랫동안 동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한 듯한데, 얼음왕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동해의 언행에서는 온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