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고통의 밤
“4성 무투사요?”
정상적으로 수행을 했다면, 준이 4성 무투사가 되기까지는 서너 달 정도가 필요했다. 하지만 천지의 불꽃 덕분에 하루 사이에 두 단계를 건너뛰어 버린 것이다.
준은 너무 기쁜 나머지 몸을 흔들며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보았다. 그는 움직일 때 마다 온 몸에서 넘쳐흐르는 염력에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연신 웃음을 지었다.
“너무 기뻐하지 말거라. 천지의 불꽃을 흡수한다고 끝이 아니다. 그 어떤 불꽃을 흡수한다 해도 그것만으로 실력이 대폭 증가하는 것은 아니야. 물론 강해지기야 하겠지만…천지의 불꽃을 제대로 다루는데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하하. 이 정도만 해도 어디에요! 또 몇 달이나 수행을 쌓아야 닿을 수 있는 경지에 한 번에 올랐는걸요!”
“허허, 좋다. 그럼 이제 대지의 불꽃의 위력을 한번 확인해보자.”
약로 역시 대지의 불꽃을 보는 것은 처음이니, 그의 얼굴에도 호기심과 설레임이 가득해 얼굴만 보아서는 이번에 천지의 불꽃을 손에 넣은 게 누구인지 구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네.”
준이 손을 들어 정신을 집중하자, 염력 회오리에 있던 검은 구멍에서 푸른 화염이 폭발하면서 혈관을 타고 그의 손목까지 내려왔다.
곧이어 오른손이 떨리며 신비로운 푸른 불꽃이 그의 손 위에서 일렁이기 시작하자, 소년은 멍하니 자신의 손에 머물고 있는 푸른 불꽃을 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정말이야! 정말로 내가 천지의 불꽃을 손에 넣었다고!”
아이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펄쩍펄쩍 뛰는 이준을 보고 약로 역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수년의 고생 끝에 찾아온 귀한 시간이다. 그는 제자가 마음껏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았다.
준은 그렇게 한참을 웃으며 동굴 안을 돌아다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냉정을 되찾았다.
대지의 불꽃은 더 이상 그에게 고통을 주지 않았고. 그저 장난끼 많은 신비한 정령처럼 손가락 끝에서 톡톡 튀어 오를 뿐 이었다.
얼핏 보면 푸른 새싹처럼 보이는 귀여운 느낌마저 들었지만, 그의 손바닥과 2미터 가량 떨어진 공간이 열기로 인해 타들어가고 있었으니 그 위력은 실로 무시무시하다고 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준이 푸른 화염으로 휩싸인 주먹을 내지르자, 바위가 타들어가며 그의 주먹이 동굴 깊은 곳까지 쑥 하고 박혔다.
곧이어 근처에 있던 바위에 주먹을 휘두르니 거대한 바위가 산산조각나 산굴의 벽 곳곳에 그 파편이 튀었다.
“후우.”
다음 순간, 반복적인 충격으로 약해진 벽이 쿵 소리를 내며 무너지기 시작했고, 부서진 돌 조각이 사방에 날렸다.
“신체 능력이나 반응 속도도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어! 그냥 손을 휘두르기만 해도 태초의 힘을 쓴 것 같은 위력이 나오다니…!”
그는 중얼거리며 푸른 불꽃을 거두어들였다. 위력은 대단했지만, 염력 소모가 너무 심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불과 몇 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미 그의 염력은 1할 가까이 줄어 있었다.
“염력 소모가 심한게 유일한 문제인가…”
“하하, 네 불개는 아직 4격 중 수준 밖에 되지 않으니 염력이 많이 부족할 게다. 하지만 걱정 말거라. 염력 수련법을 진화시키고 네 실력이 늘면 사용시간은 점점 길어질게야. 게다가 천지의 불꽃을 사용하는 것이 익숙해지면 염력 사용량 자체가 줄기도 하니까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약로의 말에 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대지의 불꽃을 손에 넣은 뒤 가장 중요한 단계가 남아 있었던 것 이다.
“맞아! 수련법을 진화시켜야죠! 너무 좋아서 그 중요한 걸 잊고 있었네…!”
“끌끌…요놈, 욕심도 많구나. 오늘은 너무 무리했으니 일단 조금 쉬거라. 천지의 불꽃을 삼키고 소화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급하게 서두르면 부작용이 생길 수 있으니 오늘은 일단 넘어가자꾸나.”
“윽…알겠습니다.”
준은 약로의 진지한 표정에 욕심을 억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깊은 밤, 하루 기온이 가장 낮은 시간대에 하는 것이 좋을 게다.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성공 확률이 조금은 높아질게야.”
“네, 그럼 내일 저녁에…!”
* * *
준의 하루는 기대감으로 인해 너무나 길게만 느껴졌다. 평소와 똑같은 24시간인데도, 오늘 그에게는 하루가 한달보다도 더 길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동굴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그는 어둠이 찾아오자 싱글벙글 웃으며 약로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약로의 말에 따르면 날씨가 서늘한 편이 도움이 된다고 했는데, 오늘 밤은 유독 기온이 낮아 하늘도 자신을 돕는 것 같아 더욱 기분이 좋았다.
“흠, 그새 날씨가 변한 탓인지 공기가 아주 차구나. 아주 좋아.”
마침내 약로가 나타나자, 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섰다.
“지금 시작할까요?”
“조금만 더 기다리자꾸나. 자정이 되면 냉기가 가장 강해지니, 그 때가 적기다.”
약로의 말에 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거대한 돌 위에 걸터앉았다. 밀려오는 긴장감에 자신의 심장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 했다.
* * *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냉기를 품은 바람이 불고, 초목이 바람에 흔들려 기분 좋은 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즈음…하늘을 두 쪽으로 가르는 번개가 내리치고, 곧이어 천둥소리와 함께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작하자구나.”
약로의 말이 떨어지자, 준은 긴장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천지의 불꽃을 삼킬 때도 마찬가지였지만…이 일 역시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없다. 천지의 불꽃은 강한만큼 거칠어서 하늘 사자의 불꽃 때 보다도 다루기가 어려울 게야. 조심하거라. 게다가 ‘불개’가 진화하는 수련법이라고는 하지만…얼마나 불꽃을 흡수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나 진화할 수 있는지는 사실 나도 모른다. 만일 진화에 실패하면…차라리 다른 수련법을 알아보자꾸나.”
콰과광—
다시 한번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준은 동굴 입구에 서있는 노인의 표정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노인의 얼굴에는 자신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하, 스승님! 왜 그런 말을 하세요! 이번 진화에 실패하면 또 다음이 있겠죠. 전 절대 포기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전 꼭 불개를 진화시킬 거고, 스승님을 부활시켜 드릴 거예요! 지금까지도 잘해왔잖아요! 약한 소리 마세요.”
약로는 한치의 흔들림도 없는 준의 말투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내가 제자를 아주 잘 두었구나…! 그럼 이제 수련에 들어가자. 만일 실패하고, 네가 나를 부활시키지 못한다 해도…내 반드시 너를 투기대륙 최강의 연금술사로 만들어주마!”
흐뭇한 말투로 제자를 격려하는 약로의 눈가에는 어느 새 눈물이 고여 있었다.
* * *
칠흑 같이 어두운 밤…
굵은 빗방울이 온 숲을 뒤덮고, 성난 바람소리만이 산등성이에 가득했다.
이따금 하늘에 나타나는 은빛 섬광이 잠시나마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비추고, 뒤이어 고막을 자극하는 굉음이 울려 퍼질 때 마다 미동조차 하지 않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제자를 바라보는 노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산등성이 사이로 둥근 해가 나타나 산마루로 이동할 때까지도 동굴 안은 여전히 고요했다.
다시 시간이 흘러 갓 떠오른 태양의 온기가 대지에 깃들 무렵…초조하게 팔짱을 끼고 기다리던 약로가 드디어 몸을 돌렸다.
하지만 약로가 마침내 참지 못 하고 몸을 돌린 순간, 굉음과 함께 동굴 내부에서 사나운 에너지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약로의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내려앉았다. 결과야 어찌됐든, 인기척이 있다는 것은 아직 자신의 제자가 살아있다는 것이고, 지금 그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약로가 웃음을 머금고 동굴로 날아가는 사이, 또 한 번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산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의 에너지였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지?”
곧이어 둥굴이 무너져 내리자, 약로의 미간에 다시 주름이 잡혔다.
쿵!
우뢰와 같은 폭발음이 다시 한번 약로의 귓가를 때리고, 이번에는 산굴 가운데가 움푹 꺼지면서 바윗덩어리가 그 구덩이를 메우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했던 광경에 약로는 안색이 변해 황급히 산굴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약로가 막 돌 위로 발을 딛는 순간, 푸른 불꽃이 용솟음치며 바윗덩어리들이 녹진녹진하게 녹아내렸다.
노인은 푸른 불꽃을 피해 다시 공중으로 몸을 날리며 불꽃이 솟아오른 방향을 바라봤다.
“아악!”
바로 그 때, 동굴 속에서 처량한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뒤이어 푸른 불꽃의 기세가 더 사나워지며 그 앞을 가로 막고 있던 모든 물체를 포악하게 집어 삼켜 액체로 만들었다.
“이런…”
제자의 비명 소리를 들은 약로는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백색 불꽃을 몸에 두른 채 푸른 불꽃을 가르고 산굴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시선이 멈춰선 곳에는 준이 무릎을 꿇은 채 주먹으로 바위를 미친 듯이 때려 부수고 있었다.
준의 옷은 이미 반쯤 불타있었지만, 천지의 불꽃을 흡수한 이후 신체가 한층 강인해진 까닭인지 피가 조금 흘러내리고 있을 뿐 심각한 부상은 없어보였다.
잠시 후, 스승이 들어온 것을 눈치 챈 이준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있었고, 입에서는 새빨간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포기하거라!”
약로는 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는 즉시 불개를 진화시키는 것을 포기할 것을 명했다. 그 역시 불개가 천지의 불꽃을 삼키는 것을 본적이 없으니, 이 정도까지 위험한 줄은 몰랐던 것이다.
“큭큭… 괜…괜찮아요…아직 버…틸…으으으으…”
준은 실핏줄이 터져 새빨갛게 물든 눈을 힘껏 치켜뜨며 억지웃음을 지었지만, 이미 제대로 말 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였다.
“안돼! 포기하거라! 고집 부리지마!”
펑—
약로의 호통소리와 거의 동시에 준의 몸에서 푸른 불꽃이 터져 나왔고, 그 순간 모공 하나하나에 불로 달군 바늘을 쑤셔 박는 듯한 통증이 준의 전신을 휘감았다.
쾅!
너무나 격렬한 통증에 소년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위에 몸을 부딪혀 자해를 하기 시작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푸른 불꽃이 바위를 녹아내린 덕에 큰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보는 사람이 더 괴로울 정도의 광경이었다.
곧이어 눈 깜짝할 사이에 더 많은 양의 화염이 준의 체내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자, 약로는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 굴렀다.
그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얼음 불꽃의 정수 뿐 이지만, 지금 상황에서 천지의 불꽃으로 준을 건드리면 그야말로 불에 기름을 들이 붓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준의 소매에서 칠색 이무기가 걸어 나와 보라색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준을 바라봤다.
손바닥만한 예쁜 뱀은 준의 주변을 몇 바퀴인가 돌다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벌려 무시무시한 기세로 불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몸을 감싸고 있던 푸른 불꽃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던 푸른 불꽃이 사라지자 준은 그대로 무너져 내리듯 바닥에 쓰러져 칠색 이무기를 향해 싱긋 웃으며 눈을 감았다.
나무 기둥에 기대어 눈을 꼭 감고 있던 준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고, 약로는 그 곁에서 준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제자를 걱정하던 약로가 긴 한숨을 내뱉는 순간, 준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며 서서히 위로 올라갔다.
“정신이 드느냐?”
소년은 자신을 걱정하는 약로의 표정을 보며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성공인가요?”
“허허, 네가 직접 확인해보면 되지 않겠니?”
이준은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잡은 뒤 다시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