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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112화 (112/818)

제112화. 다섯 독사의 인

“후…됐고, 어쨌든, 계속 혼자 수행을 다니는 것 같은데, 제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 재능이 꽃피기 전에 죽어버리면 소용없다는 것만 명심해.”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괜찮은 수련 장소를 추천해줄까?”

준은 딱히 수련 장소가 필요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기가 미안해 예의상 질문을 던졌다.

“어딘데?”

“운남종. 마침 내 친구가 그쪽에 있으니 너만 좋다면…”

하지만 운남종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준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렸고, 은지는 너무나 차가워진 소년의 태도에 자기도 모르게 하던 말을 멈추고 말았다.

“왜 그래?”

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색하게 뒷통수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하하, 아니에요. 운남종이면 가한제국 최고의 세력 중 하나인걸요. 저한테는 너무 과분해요. 비웃음이나 사지 않으면 다행이죠.”

“무슨 소리야. 너 정도의 재능이라면 운남종도 절대 너를 함부로 대하지 않을 거야. 내가 장담하지. 그리고 거기에 가면 너에게 딱 맞는 염력 수련법과 무투기를 배울 수 있을 거야.”

은지는 준의 변명을 진심이라고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준의 입장에서 운남종은 자신의 철천지원수였으니, 당연히 그런 곳에 갈 리가 없었다.

“아니에요. 혼자 할게요. 그게 마음도 편하고…일단 저도 급한 일이 있으니까…가볼게요.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죠. 만약에 다시 만나면 이 은혜는 꼭 갚을 게요. 누나.”

준은 더 이상 은지와 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운남종과 연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처음부터 가까워지지도 않았을 것 이다.

어쩌다가 연이 닿아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나설아의 얼굴을 떠올리니 은지와 가깝게 지내서 좋을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준은 황급히 대화를 마치고 몸을 날렸고, 은지는 그런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흥…고집하고는…”

바로 그 때, 반대편에서 까만 점들이 다가오는 것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준은 어두운 얼굴로 사막의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그러다 마침내 은지가 작은 점이 될 때쯤, 준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후…은지 누나가 나설아와의 일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닌데 좋은 뜻으로 말한 사람에게 무슨 짓을 한거람…’

도둑의 정체가 자신임을 확인하자마자 천지의 불꽃을 포기하던 은지의 모습을 떠올리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돌아가야 하나…?”

준은 은지에게 한 행동이 못내 마음에 걸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은지가 자신을 보내고 뒤를 맡아 뱀 인간족의 투왕들과 사투를 벌일 것을 생각하자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준이 망설이며 오도가도 못 하고 있는 사이, 갑자기 등 뒤에서 거대한 다섯 개의 바람기둥이 솟아올랐다.

“저건…”

“뱀 인간족의 투왕들이구나. 생각보다 빨리 추격해왔어.”

“왜 다섯 명이죠? 두 명 아니었어요?”

“글쎄…그거야 나도 모르지. 투왕 다섯 명이라니…이건 제법 어렵겠구나. 인간이라면 모를까 뱀 인간들은 같은 레벨이라 해도 인간보다 강하니까.”

약로의 한마디에 준은 더욱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잠시 후…준은 결심을 굳힌 듯 고개를 들었다.

“돌아가요 스승님.”

……

끝도 없이 펼쳐진 금빛 모래 위로 여섯 명이 지나가자 모래바람이 일었다.

“퉤.”

유타는 창백한 얼굴로 입에서 선홍빛의 피를 한주먹이나 뱉어냈다.

그의 옷은 이미 군데군데 찢어져 있었고, 손목과 아랫배 쪽에서도 피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투왕도 엄청난 강자라고 할 수 있지만, 투황에 비할 바는 못 됐으니 유타가 은지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것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섯 명의 투왕이라면 제 아무리 투황이라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은지는 뱀 인간들이 고하 일행을 포기하고 자신을 잡는 데만 주력할 것 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을 조금 후회하며 장검을 움켜잡았다.

……

다섯 명의 투왕이 모두 모이자, 회색 망토를 두른 노회한 뱀인간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건방진 계집이군…감히 우리 종족의 성지에 침입하고도 무사할 줄 알았더냐?”

그러나 은지는 조금도 떨지 않고 그의 말을 맞받아쳤다. 쉽지 않은 싸움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자신이 있었다.

“흥, 메두사 여왕을 잃은 너희들에게 나를 어찌할 전력이 남아있긴 한가?”

“잃어? 푸하하.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나? 너희 인간들은 느낄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나에게는 느껴진다. 여왕 폐하는 진화에 실패한 것이 아니야. 장담하건데, 여왕님께서는 다시 돌아와 너희 인간들의 압제에서 우리를 해방시킬 것 이다. 그리고 이 빚은…그 때 갚지.”

늙은 뱀인간의 자신만만한 태도로 보아,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 했다.

“뱀 인간족에 8성 투왕이 있다고 하더니…당신이 그 사람인가보군. 이름이 아마… 다크였지? 나도 메두사가 무사하길 빌어주지. 그녀와 나, 둘 중 누가 위인지 확실히 해두고 싶으니까 말이야.”

“하. 제 아무리 투황이라 하더라도 우리 다섯 명을 상대로 너무 자신만만하군.”

초록 옷을 입은 중년의 뱀 인간족 하나가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말허리를 자르자, 은지의 얼굴에 즉시 살기가 어렸다.

“왜 여유로울 수 있는지…지금부터 확인시켜주마.”

싸늘한 한마디와 함께 은지의 날카로운 장검이 맑은 소리를 내며 바람을 가르면서 공중에 청색의 섬광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은지의 몸이 홀연히 사라져 초록 옷을 입은 사내의 등 뒤에 나타났고, 사내는 즉시 자신의 굵은 꼬리를 휘둘러 몸을 비틀어 은지의 공격을 피해냈다.

공격이 실패했지만 은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장검을 손에서 놓았다.

그러자 장검이 빠르게 회전하며 사내의 허리를 스쳤고, 그녀의 공격 앞에서는 뱀인간족의 단단한 비늘도 종이장이나 다름없이 무력하게 찢어질 뿐 이었다.

“윽…”

순식간에 사내의 허리춤에서 붉은 피가 새어 나오자, 그는 고통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뒤로 몸을 물렀다.

“빌어먹을 계집! 일대일로 맞붙지 말고 다섯이서 함께 인을 만들어! 일대일로는 승산이 없다!”

은지가 너무나 쉽게 다섯 투왕 중 한 명에게 부상을 입히자, 다크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어렸다.

그는 뒤로 물러서는 동시에 빠른 손놀림으로 인을 맺었고, 곧이어 거대한 푸른빛이 그의 손바닥 위에 떠올랐다.

이를 지켜보던 나머지 네 명도 빠른 속도로 인을 맺었다. 이미 수천 번의 수련을 거듭한 인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섯 명의 손바닥 위에 똑같은 푸른빛이 떠오르자, 은지는 흥미롭다는 듯 그 빛을 바라봤다.

‘흠…뱀인간들의 강자가 모이면 특별한 힘이 생겨난다더니…저게 바로 그 힘인가?’

“다섯 독사의 인!”

노인의 목소리와 함께 다섯 투왕의 손바닥 가운데에 생성된 빛이 솟구치며 10미터 가량의 거대한 빛기둥이 형성되며 금빛 사막의 허공을 꿰뚫었고, 그 기둥은 살아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틀더니 이내 염력으로 형성된 녹색 뱀으로 변화했다.

“쓰으—”

초록 뱀은 섬칫한 소리를 내며 주위를 맴돌았고, 갑자기 사막 곳곳에 격렬한 돌풍이 일며 소용돌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은지는 거대한 뱀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흠…역시 뱀인간족이군. 대단해.”

은지는 긴장된 표정으로 거대한 염력 뱀을 바라보며 숨을 고른 뒤 즉시 손을 휘둘러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녹색 뱀이 그녀가 만들어낸 회오리를 한 입에 집어삼키는 순간…은지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말도 안돼…”

은지는 자신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은 녹색 뱀의 힘 앞에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다섯 명의 투왕에 자신의 공격을 여유롭게 집어삼키는 염력 뱀이라니…완전히 생각 밖의 사태였다.

그 때, 갑자기 백색 화염을 뿜어내는 그림자 하나가 은지의 앞을 막아서며 환하게 타오르는 화염 회오리를 만들어냈다.

이에 초록 뱀은 화들짝 놀라 공중으로 뛰어올랐지만, 이미 놈의 몸에 달라붙은 아름다운 백색 화염이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누…누구냐! 왜 우리 일에 끼어드는 거지?”

갑자기 나타나는 사내의 공포스러운 위력에 다크의 얼굴 위에 공포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뭐, 딱히 이유는 없네…”

새하얗게 불타오르는 정체불명의 사내의 대답은 대답이라고도 할 수 없을 만큼 무례했지만, 자리에 있던 다섯 투왕 중 감히 그 누구도 화를 내지 못 했다.

투황인 은지의 공격조차 한 입에 삼켜버린 자신들의 염력 뱀이 방금 나타난 사내의 화염 한방에 사라졌으니, 그가 얼마나 강한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놀라기는 은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한 제국에 백색 화염을 다루는 투황급 강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백색 화염으로 뒤덮인 정체불명의 사내를 훑어보았다.

사내의 몸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신비한 백색화염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뜨거웠지만, 동시에 기이한 한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천지의…불꽃…?”

그녀는 홀린 듯 백색화염을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자신을 도와준 사내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내는 그녀의 감사인사를 듣고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하님의 부탁을 받고 오신건가요?”

자신도 모르는 투황급 이상의 강자를 끌어들였다면, 고하의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내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고하라는 친구도 제법 이름이 알려져 있지만, 나에게 이런 부탁을 하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하지.”

은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 번 사내를 훑어보았다.

그녀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투황급 이상의 강자에게 도움을 청할만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이번에 자신이 타르 사막에 온 것을 아는 자는 더욱 드물었으니 갑자기 나타난 정체불명의 사내가 고하의 동료임이 분명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의 답변을 들어보면 고하에게 부탁을 받고 온 것은 아닌 것이 분명했다.

“허허, 빨리 놈들을 치우도록 하지.”

이윽고 정체불명의 사내의 손에서 다시 백색 화염이 치솟자, 뱀인간족들의 대장격인 다크가 손을 들어 다른 투왕들을 제지했다.

“흥…웬 놈인지는 모르겠지만…언젠가 오늘 이 일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고개를 돌려 다른 투왕들을 바라봤다.

“물러나!”

다크의 명령이 떨어지자 나머지 네 명의 강자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손으로 인을 맺었고, 그러자 다섯 명의 몸이 폭발음과 함께 작은 뱀으로 변해 사방팔방으로 흩어졌다.

은지는 뱀인간들이 달아나는 것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즉시 몸을 움직였지만, 그 순간 백색화염의 사내가 손을 들어 그녀의 앞을 막았다.

“이게 무슨…”

다음 순간, 사내의 손에서 백색 화염이 뭉쳐져 다섯 개의 화염 덩어리가 형성 되더니 이리저리 흩어져 달아나는 뱀들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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