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짧은 만남
제논과 태원은 상대가 투황일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고하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메두사를 찾아간 것도 정상적인 행동은 아니었지만, 천지의 불꽃에 대한 고하의 집착은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었다.
“가한제국 최고의 연금술사를 이렇게 만들다니…천지의 불꽃이 대단하긴 하군…”
“그러게 말이야. 천하의 단왕이 이렇게 눈이 벌개져서 쫓을 정도라니…저 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가한제국 사람이라면…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제논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단왕 고하의 인맥이라면 상대가 누구든지 평생을 쫓겨다녀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 사람이 아무리 속도를 올려도 눈 앞에 있는 도둑놈과의 거리는 좁혀 지키는커녕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쉬익-!
세 명의 투왕이 이를 악물고 괘씸한 도둑놈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발만 동동구르고 있을 때, 갑자기 시커먼 형체가 그들 곁에 따라붙었다.
“저 녀석을 꼭 잡아야 합니다!”
하지만 검은 망토를 걸친 여인은 갑자기 속도를 살짝 줄여 그들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저는 저 자를 쫓겠습니다. 당신들은 흩어져서 검은 바위성으로 가세요. 그럼 제가 천지의 불꽃을 빼앗아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왜 흩어져야 하죠?”
투황의 갑작스러운 지시에 고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뱀인간족의 강자들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어요. 이미 다섯이나 되는 투왕이 모여 있으니, 싸움이 벌어지면 저 자를 추격하는 것은 포기해야 합니다.”
투왕이 다섯이나 모였다는 말에 고하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새어나왔다.
“후…좋습니다. 흩어지지요. 반드시 저 자를 잡아주셔야 합니다. 저희는 일단 사막을 빠져나가는데 집중하겠습니다.”
정체불명의 투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속도를 올려 번개처럼 도둑을 쫓았다.
“꼭! 꼭 놈을 잡아주셔야 합니다!”
고하는 마지막까지 투황의 뒤통수에 대고 천지의 불꽃을 빼앗아달라고 당부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태원, 제논, 이제 우리는 흩어진다. 검은 바위성에서 보자.”
“아쉽군요. 저 뱀 새끼들을 박살내주고 싶었는데…”
태원의 아무리 성질이 불같다 해도 다섯 명의 투왕을 상대로 그들의 앞마당과도 같은 곳에서 싸움을 벌일만큼 무모하지는 않았다.
“하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종주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가 이 가한제국에 몇 이나 되겠습니까.”
“휴우. 부디 그랬으면 좋겠구나…”
고하는 미련을 버리지 못 하고 종주의 뒷모습이 아득히 멀어질 때까지 멍하니 서 있다가, 그녀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몸을 돌렸다.
“후…몸 조심하거라. 조금 뒤에 보자.”
……
“놈들이 흩어졌어!”
월녀는 세 투왕의 기운이 나눠진 것을 느끼자마자 다른 네 명의 강자들을 돌아봤다.
“이제 어쩌지?”
“우리도 흩어져서 놈들을 쫓도록 하지. 월녀, 넌 고하 무리를 쫓아! 나랑 유타는 저 투황을 추격하겠다.”
회색 망토를 두른 뱀인간 하나가 작은 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그의 얼굴에는 주름이 자글자글했지만 위엄이 서려있었다.
그 때, 헤파스가 새로이 합류한 투왕들에게 가한제국 투황의 실력에 대해 설명하며 주의를 주었다.
“다크, 당신과 유타는 그들의 상대가 될 수 없어. 우리 세 명이 동시에 모여 힘을 합쳤지만 저 여자는 손 쉽게 우리의 포위를 뚫고 도망갔다.”
“걱정 마라. 우린 그 자와 싸우지 않는다. 내가 표식을 남겼으니 남쪽에 있는 동포들이 표식을 보고 우릴 찾을 수 있어. 우리가 모두 모이면 그 때 그 투황을 상대 하도록 하지! 감히 우리 종족의 성지에 발을 들이다니…절대 무사히 돌려보낼 수 없다.”
“좋아!”
월녀는 다크의 말을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몸을 돌렸다.
“가자, 유타! 설령 잡지 못 하더라도 검은 망토를 입은 자의 신분만 알아내면 나중에라도 찾아내 죽여버리면 그만이야!”
“그러지.”
* * *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날카로운 폭발음이 공기를 가르며 사방에 울려 퍼지고, 소리가 울리는 순간 사람의 형상이 흐릿하게 나타났다가 몇 백미터 떨어진 곳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공중에서 날아다니는 검은 그림자는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가벼웠지만, 그 몸놀림은 정교하기 그지 없었다.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자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앞서 날아가는 소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상하군…비행 도중에도 염력이 밖으로 새어나오지도 않고, 몸놀림도 너무 안정적이야.”
그녀는 계속해서 폭발적인 속도로 나아갔다.
………
“스승님, 저희 벌집을 건드린 것 같은데요…”
준은 귓등을 때리는 이질적인 바람 소리에 뒤를 돌아보고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투황인가? 설마 따라 잡힐 줄이야. 그런데 저 자자는 너에게 그다지 적대적인 것 같지는 않은데, 한 번 만나서 얘기라도 해 보는 건 어떠냐?”
“윽…됐어요. 지난 번에는 제가 불쌍해서 도와준 것 같은데 이번은 다르죠. 천지의 불꽃이 걸려있는걸요.”
“조심해라!”
약로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준의 눈 앞에 10미터도 넘는 폭풍이 몰아치며 무시무시한 바람이 칼날처럼 주위의 공간을 베어 들어갔고, 준은 갑작스럽게 생성된 염력 칼날 앞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몸을 뒤로 뺐다.
“천지의 불꽃을 어서 내게 넘겨라. 네가 어디에서 온 강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가한제국의 6레벨 연금술사를 건드려서 좋을게 없어.”
가한제국의 투황은 차가운 목소리로 준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하면서도 위엄이 서려있어 더욱 공포스러웠다.
“휴, 스승님…이제 방법이 없어요.”
준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줄행랑 치려던 계획이 무산 됐으니 이젠 정면 승부밖에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래, 한번 해보자꾸나. 하지만 천지의 불꽃을 빼앗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저 자는 실력이 상당하니까. 우선은 네 목숨을 살리는데 집중해보자.”
약로의 말에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아쉬워도 다른 수가 없어보였다.
“죽으면 천지의 불꽃이 다 무슨 소용이겠어요, 일단 목숨부터 건지죠. 이봐요, 제가 졌습니다. 자, 가져가세요.”
준은 체념한 듯 힘빠진 목소리로 답하며 손에 쥐고 있던 대지의 불꽃을 던졌고, 불꽃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검은 망토를 걸친 투황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대지의 불꽃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불꽃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녀가 막 대지의 불꽃을 붙잡으려던 순간, 지면에서 흙먼지가 일며 대지의 불꽃이 다시 도둑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갔다.
“죄송하게 됐어요!”
푸른 연화대를 다시 손에 넣은 준이 씩 웃으며 날개를 펄럭이자, 거센 모래 폭풍이 일어났다.
“흥…어디서 장난질을!”
하지만 정체불명의 투황은 코웃음을 치며 손을 휘둘렀고, 다음 순간 사방에 거대한 바람으로 이루어진 벽이 형성되며 준을 에워쌌다.
모래 바람을 이용해 시선을 분산시키려던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준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눈 앞에 몰아치는 염력의 폭풍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젠장!”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그녀의 싸늘한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지르는 순간, 준은 결심을 굳히고 검은 송곳을 움켜쥐었다.
‘확실히 투황정도가 되면 이런 얕은 수는 통하지 않는군.’
곧이어 정체불명의 투황이 날개를 접고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제 얼굴을 보고 조금 놀라셨을지도 모르겠군요. 사막에서 절 구해주지 않았다면 천지의 불꽃을 도둑맞는 일도 없었을텐데 말이죠. 죄송하지만, 저는 이 불꽃이 꼭 필요해요, 그러니…”
“내가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었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저는 이걸 찾기 위해 사막에 온 거예요. 절대 포기할 마음은 없으니 자신있으면 힘으로 뺏어가 보시죠.”
도둑의 당돌한 언행에 검은 망토를 입은 투황은 어이가 없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었다.
“휴, 진짜 미치겠군…빨리 내 눈 앞에서 꺼져. 못본걸로 해주지.”
……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반응에 준은 넋이 나가 대답조차 하지 못 하고 그녀를 멀뚱히 바라봤다.
“가. 안갈거야?”
그녀의 입에서 다시 한번 가라는 말이 나오자, 준은 그제서야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어어… 그러니까… 천지의 불꽃을 뺏기 위해 온 게 아니었어요?”
“됐어. 꺼져. 사막에 들어오는걸 도와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와줬어. 이 이상 도와줘야 할 의무도 없고. 그리고 곧 있으면 뱀인간놈들이 몰려올거야. 그러니 빨리 가. 내가 놈들을 상대할테니.”
소년은 정체 불명의 강자가 그 귀하디 귀한 천지의 불꽃을 포기하는걸로도 모자라 자신을 위해 뱀 인간족까지 막아주겠다고 말하니 되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게 되고 말았다.
“안가? 꺼지라고!”
그리고 투황이 다시 한번 버럭 소리를 지르며 소매자락을 휘두르자, 강렬한 모래바람이 일어 준을 밀어냈다.
바로 그 때, 그녀의 전신을 감싸고 있던 검은 망토가 바람에 의해 흩날렸고, 그 순간 준의 눈에 낯익은 푸른 장검과 청초한 얼굴이 들어왔다.
“은…은지 누나?”
준이 자신을 알아보자, 은지는 한숨을 내쉬며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머리를 덮고 있던 모자를 열어 젖혔다.
검은 망토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붉은 입술 끝에는 희미하게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휴, 들켜버렸네…”
그녀는 난처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으며 연신 이마를 문질러댔다.
“하하. 누나! 잘 지냈어요?”
“넌…잘 지낸 것 같네. 그 사이 무투사도 된 것 같고 말이야.”
“네!”
준은 은지를 만난 것이 어지간히도 반가웠는지 연신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아니, 그런데 어쩌다가 고하랑 같이 다니게 된 거예요?”
“무려 단왕이야. 가한 제국의 강자중에 고하와 연이 없는 사람 찾는게 더 힘들걸. 나도 그 자에게 빚진게 좀 있어서 말이야…”
“아아…그럼…이 대지의 불꽃을 가지고 가지 못하면 고하가 누나를 탓하지 않을까요? 정말 가지고 가도 되는거예요?”
준이 걱정스러운 듯 손에 든 푸른 불꽃을 가리키자, 은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뭐, 원망이야 하겠지. 하지만 내가 약속한 것은 그를 지키는거야. 천지의 불꽃을 가져다 주는게 아니라. 게다가 고하는 너를 투황급 강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빈손으로 간다고 해도 날 탓하기는 어려울거고.”
은지는 천둥산에서 준과 함께 사는 동안 그가 얼마나 고집이 센지를 몸소 체험했으니, 눈 앞에 있는 소년을 시체로 만들지 않는 이상 천지의 불꽃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차라리 투황과 사투를 벌인다면 모를까, 고작 고하에게 싫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생명의 은인을 죽일 수는 없었다. 아니, 준을 제압하고 천지의 불꽃을 빼앗아가는 것 조차 염치없는 짓 이었다.
“됐어. 고하한테 빚을 지기는 했어도 목숨 빚 진건 아니니까. 하지만…그걸로 뭘하려고? 지금 네 수준으로는 천지의 불꽃에 스치기만 해도 재가 될걸?”
은지는 이미 천지의 불꽃을 빼앗는 것을 포기했지만, 무투사에 불과한 준에게 대체 천지의 불꽃이 왜 그렇게 필요한지가 몹시 의문스러웠다.
“하하, 그래도 꼭 필요해요.”
준이 말꼬리를 흐리자, 은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바라봤다.
“휴…됐어. 알아서 뭐하겠어. 어련히 잘 하겠지. 얘기할 시간도 없고. 지금 뒤에 뱀인간족의 투왕 두명이 따라오고 있어. 내가 시간을 벌어줄테니까 얼른 가. 나는 놈들을 막고 나서 고하와 합류해야 돼. 이미 약속이 되있으니까. 아마 다시 보긴 힘들거야.”
은지가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돌리자, 이번에는 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겨우 만나게 됐는데, 또 바로 작별이네요. 그래도 지난번보다는 낫네요. 인사라도 하고 헤어지니까…”
“그 땐 내가 급한 일이 생겨서…”
은지는 준의 마지막 말이 마음에 걸렸는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