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화. 소원 성취
그 사이 메두사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작은 섬에 있던 준은 작은 돌 뒤에 몸을 숨긴 채 공포에 질려 있었다.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칠 때, 그 번개가 섬에 떨어져 그를 거의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것 이다. 약로가 재빨리 그를 불꽃으로 감싸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새까맣게 타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무시무시한 번개군…그나저나…저건 죽은거야 산거야…?”
준은 불안한 눈빛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메두사를 바라보다가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 ‘바스락’ 하는 소리가 그의 귓등을 때렸다.
발치를 바라보자 시꺼멓게 타버린 뱀의 시체에서 허물이 벗겨지고 있었으며, 허물이 벗겨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스…스승님, 이게 어떻게 된거죠?”
소년은 난생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마른 침을 삼키면서 허물을 벗고 있는 거대한 뱀을 바라봤다.
“스승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이런…뱀의 시신안에서 강대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진화에 성공한 건가요?”
준의 목소리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심한 감기라도 앓은 듯 탁하게 갈라져있었다.
“아마 그런 듯 하구나, 조심하거라.”
준은 약로와 공중에 떠있는 대지의 불꽃을 번갈아가며 바라봤다.
“스승님, 그럼 대지의 불꽃은 어떻게 해요? 저 여자가 나…”
“조심해!”
쾅!
하지만 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약로가 고함을 질렀고, 동시에 땅바닥에 힘없이 늘어져있던 뱀 여왕의 시신에서 돌연 폭발음이 들려왔다.
* * *
“여왕 폐하께서 성공 하신 건가?”
한편 바깥에 있는 뱀인간들은 갑자기 폭발하듯 터져나온 에너지를 감지하고 환호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빨리 갑시다, 메두사 여왕이 진화에 성공 했어요!”
고하 역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고 즉시 날개를 펼쳤다.
“당황할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검은 망토를 두른 여인은 손을 들어 고하를 제지했다.
폭발적인 에너지가 파도처럼 일어난 뒤 다시 거짓말처럼 잦아들기 시작한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 * *
“우씨…”
준은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 발만 동동 구르며 먼발치에서 뱀여왕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까만 잿더미가 쌓여있던 곳에서는 어느 새 신비한 일곱 빛깔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어…?”
그리고 무지개 빛의 연기는 서서히 응집하더니 갑자기 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억!”
연기의 속도는 그야말로 번개처럼 빨랐고, 준은 체내의 염력을 끌어올리기도 전에 그 연기에 적중당하고 말았다.
화륵—
“헉헉…”
준은 공포에 질려 눈을 질끈 감았다가,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뜨끈한 열기에 덜덜 떨면서 눈을 떴다.
“휴…”
눈을 뜨자, 다행히도 약로의 백색화염이 그를 지켜주고 있었다.
칠색의 연기는 살아있는 것처럼 준의 앞에 멈춰섰다가 서서히 뒤로 물러섰고, 다시 응집되며 일정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잠시 후…연기가 모여 손바닥만한 뱀의 형상을 갖추었고, 완성된 뱀의 온 몸은 아름다운 일곱 빛깔의 비늘로 덮여 있었으며, 눈동자에는 신비한 보라색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준은 잠시 넋을 잃고 작은 뱀을 바라보았다.
눈 앞에 나타난 무지개 색의 뱀은 사납거나 무섭기는 커녕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뱀은 준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준에게 서서히 다가왔다. 소년을 바라보는 뱀의 보라색 눈동자에는 어떤 살의도 없을 뿐 아니라, 어린 아이의 그것처럼 맑고 순수하기 그지 없었다.
준은 그것이 메두사가 변화한 것임을 눈 앞에서 목격했음에도 자기도 모르게 홀린 듯 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일곱 빛깔의 작은 뱀은 꼬리를 살랑대며 커다란 보라빛 눈을 껌뻑이며 준에게 다가가다가 흰색 화염에 공포를 느낀 듯 뒤로 물러섰다.
“스승님, 이게…메두사 여왕일까요?”
준은 강아지마냥 순수한 눈망울을 껌뻑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무지개 색 뱀을 바라보며 약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음…여왕의 영혼이 진화하면서 새 몸을 얻게 된 것 같구나.”
“지금… 어떤 상태로 진화한 거죠?”
준은 마음을 졸이며 물었다. 지금 눈 앞에 있는 작은 뱀은 아무리 봐도 사악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만에 하나라도 나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 따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목숨을 잃고 말 것이 분명했다.
“메두사 여왕이 예전에 갖고 있던 영혼인 듯 하구나. 네가 아까 보았던 거대한 보라색 뱀은 6레벨 마수의 영혼이다. 듣기로는 놈의 몸에는 상고 시대의 괴물인 칠색 이무기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하던데…”
“방금 봤던 뱀이 그 칠색 이무기라는 건가요?”
“그래…어쩌면 이 녀석이 전설 속의 칠색 이무기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메두사 여왕의 새 신체이기도 하지.”
약로가 한숨을 내쉬자 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엥, 그런데 좀 이상한데요? 만일 메두사 여왕이 맞다면 왜 조금의 살의도 느껴지지 않는 거죠? 원래대로라면 진작 저를 공격했어야 하는 게 맞지 않나요?”
뱀은 여전히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눈을 꿈뻑이며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진화할 때 번개를 맞아서 기억을 잃은 건 아닐까?”
약로의 한마디에 준의 얼굴에 즉시 화색이 돌았다.
“그럼…일단 저한테 적의는 없는 듯 하니까 지금 대지의 불꽃을 회수해볼까요?”
“으음…시도해볼만한 가치는 있구나.”
낮은 탄식과 함께 준의 몸에서 백색 불꽃이 거두어지자, 준은 조심스럽게 눈 앞에 있는 작은 뱀에게 다가갔다.
“여왕폐하?”
무지개 색의 아기뱀은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던 하얀 불꽃이 사라지자 반갑다는 듯 또아리를 풀고 준의 근처를 서성였고, 여전히 예쁜 보라색 눈동자를 꿈뻑 거리며 친근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준은 너무나 예쁜 아기 뱀의 모습에 홀린 듯 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작은 뱀은 준의 손바닥 위로 펄쩍 뛰어오른 뒤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저장반지를 바라보며 작은 울음 소리를 냈다.
작은 뱀의 행동을 본 준은 입꼬리를 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제가 장담하건대, 얘는 절대 메두사 여왕이 아니에요. 그 여자가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잖아요.”
“설마 진화 과정에서 기억이라도 잃은 건가?”
제 아무리 경험이 풍부한 약로라지만, 이번만큼 그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끙…”
준은 실눈을 뜨고 그 뱀을 조금 더 지켜봤다.
“제 저장반지 안에 있는 물건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대요?”
이준은 저장반지에 보관하던 물건들을 하나 둘씩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 놓았지만, 뱀은 꼬리를 살랑일 뿐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준은 호기심이 일어 다른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저장반지에서 하늘 사자의 정수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아기 뱀이 폴짝 폴짝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거야?”
준이 무심코 약병을 열자, 아기 뱀은 즉시 그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엥?”
그리고 준이 깜짝 놀라 약병을 닫으려고 하기도 전에 아기 뱀은 만족한 표정으로 다시 준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허허허…저 뱀이 너보다 낫구나. 그 안에 담긴 에너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아주 잘 아는 모양이야. 칠색 이무기 역시 불속성의 마수이니, 하늘 사자의 정수에 담긴 불 속성의 에너지를 좋아하는 거겠지.”
놈은 하늘 사자의 정수가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더욱 다정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하하, 그게 얼마나 귀한건줄 알고 이러는거야? 뻔뻔한 놈!”
소년은 알록달록한 아기 뱀의 사랑스러운 행동에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뱀을 어루만지고 말았다.
“허허. 녀석, 그 조그만 것을 계속 데리고 다닐 요량이냐?”
약로가 웃으며 질문을 던지자 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재력이 무한한 상고시대의 마수니까…쓸모가 있지 않을까요?”
“흠…칠색 이무기가 제 아무리 강대한 마수라고 해도…상태로 보아 기억도 없는 듯 하고 아직 아기에 불과하니, 제 구실을 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구나. 게다가 본래 뱀 인간족의 여왕이었던 놈이다. 혹시라도 어떤 계기가 있어 예전의 모습과 기억을 되찾으면 어찌하려고 하느냐.”
“윽…!”
약로의 지적에 강아지라도 만지 듯 칠색 이무기를 어루만지던 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흠…하지만 기억을 회복하지 않는다면요? 지금의 그녀는 아기 마수이고…태어나서 처음 본 사람이 저라면…이건 절호의 기회 아닐까요? 투성 레벨의 전설 속 마수라니,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겠어요. 스승님.”
“흠, 도박이구나…”
약로 역시 고민이 되는 듯 했다. 투황급 마수조차 길들일 수만 있다면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물며 투성이라니…확실히 도박을 할만한 가치는 있었다.
“하하. 제겐 스승님이 계시잖아요. 나중에 정말 큰 일이 생기면…도망은 칠 수 있지 않을까요?”
약로는 이미 제자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한 것을 발견하고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휴 녀석. 나중에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만 해봐라.”
준은 뻔뻔한 표정으로 칠색 이무기를 손에 올려놓았고, 칠색 이무기는 마치 어미 개를 따르는 강아지처럼 스스럼 없이 그 위에서 재롱을 떨어댔다.
“어때? 나랑 같이 갈래?”
준의 표정과 말투는 마치 세 살 배기 어린 아이를 대하는 것 같았다.
소년이 다정한 말과 함께 다시 저장반지에서 하늘 사자의 정수가 들어있는 약병을 꺼내 흔들자, 아기 뱀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벌떡 일어났다.
“하하!”
준은 칠색 이무기의 그런 귀여운 행동에 웃음을 터뜨렸다. 어찌됐든, 지금 눈 앞에 있는 녀석이 자신의 발등을 찍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그렇게 잠시 칠색 이무기의 애교에 빠져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대지의 불꽃 앞으로 다가섰다.
‘후우…’
마음은 급했지만, 절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물건이었다. 천지의 불꽃은 화약처럼 불안정한 물질이니,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골로 가는 것은 순간이었고, 자신은 메두사처럼 강인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 대지의 불꽃을 잘못 건드리면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고 재가 되고 말 것이 뻔했다.
“스승님…그런데…이걸 어떻게 갖고 가야 하죠?”
“천지의 불꽃을 가져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놈들은 다가오는 모든 것을 재로 만드니까. 심지어 에너지까지도 말이다. 결국 천지의 불꽃을 운반하려면 끊임없이 염력을 공급해 주변의 다른 것을 태우지 않게 하는 수 밖에 없지. 아마도 메두사도 그 방법을 썼을게다. 하지만 지금의 너로서는…모든 염력을 다 쏟아부어도 이 작은 섬조차 빠져 나가지 못 하겠지.”
“윽… 그럼 어쩌죠?”
약로의 말을 듣던 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우리는 메두사 여왕의 방법을 쓸 순 없어. 그만한 염력을 공급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얼마전에 좋은 물건을 손에 넣지 않았느냐.”
스승이 의미 심장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준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박수를 쳤다.
“연화대!”
“허허. 그래. 그 연화대는 대지의 불꽃의 온도를 어느 정도 사그라들게 해주는 효과가 있지. 어쨌거나 염력으로 감싸는 것 보다야 백배는 안전할게다.”
준은 신이 나서 연화대를 꺼내들어 대지의 불꽃을 감쌌다. 그러자 푸른 빛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며 대지의 불꽃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고, 무시무시한 기운을 담은 푸른 불꽃이 서서히 연화대의 가운데로 이동했다.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