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진화의 시작
시선을 연못 중앙으로 향하자, 푸른 색 화염이 불타며 연꽃과 뱀의 형상을 번갈아가며 만들어내고 있었다.
“찾았어…!”
그는 초조함으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푸른 화염을 바라봤다.
푸른 화염은 연못의 중심을 벗어나려는 듯 서서히 다른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옅은 흰색 빛에 부딪혀 다시 중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마다 연못의 물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숨죽이고 푸른 화염을 관찰하고 있는 사이, 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뱀여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휘황찬란한 빛을 발하는 보라색 옷을 걸치고 있었고, 그 아래로 뻗은 아름다운 보라색 꼬리는 초조함을 감추지 못 하고 좌우로 왕복운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드디어 때가 됐구나…”
그녀는 기대와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푸른 불꽃을 바라보다가 백옥같은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그러자 연못 중앙에서 타오르던 푸른 화염이 격렬하게 뒤흔들리며 연못 안에 가득한 얼음의 심장이 빠른 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후우…”
잠시 후…메두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녀린 손가락을 움직여 화려한 보라색 옷에 달린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뱀 여왕의 상체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새하얀 빛을 띠고 있었지만, 그녀의 허리 아래는 명백한 뱀의 그것이었다.
준은 이 기묘한 여인의 알몸을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 똑바로 차리거라. 메두사 여왕의 가장 무서운 점은 사람을 홀린다는 것 이다. 남녀노소 누구나 그녀의 능력에 걸려들면 약에 취한 사람처럼 몽롱해지고, 끝내 그녀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지. 어서 정신을 집중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 발로 메두사에게 걸어가 목숨을 잃고 말테니까.”
준은 약로의 목소리를 똑똑히 새겨들으며 몇 번이나 세차게 고개를 젓다가, 그래도 정신이 들지 않자 약로가 만들어 준 옥으로 된 검을 꺼내 손끝을 찔렀다.
“윽…”
따끔한 통증이 퍼져나가자 그제서야 조금 머리가 맑아지는 듯 했다.
“스승님, 언제쯤 움직이면 될까요?”
“서두르지 말거라. 그녀에게 발각되는 순간 모든게 끝이야.”
“그럼 조금 더 기다려보죠.”
준이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이, 메두사는 새하얀 알몸을 뽐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진화에 성공하면…우리 뱀인간은 더 이상 인간들에게 쫓겨 다니지 않아도 돼!”
그녀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잠시 후 새하얀 양손을 마주잡자 대나무 숲에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스승님…저게 대체 뭐죠?”
준이 긴장한 말투로 질문을 던지자, 약로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건…나도 잘 모르겠구나. 메두사 여왕의 진화에 관해서는 나도 어렴풋이 주워들은게 있을 뿐이니…그리고 진화 후에 어떻게 변할지도 알 수 없고…때에 따라 다 다르다고 하니 말이야.”
그리고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갑자기 메두사의 몸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계속해서 펼쳐졌다 사그라 들기를 반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자의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호랑이의 울음 소리 같기도 한 기묘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윽…!”
그리고 그 울음소리가 끝나는 순간, 준은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메두사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너무 밝아져 도저히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던 것 이다.
그리고 잠시 후…눈을 뜨자 섬 중앙에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보라색 뱀이 모습을 드러냈다.
뱀의 몸은 신비한 보라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며, 놈의 눈빛은 얼핏 보면 짐승처럼 광폭했지만 호수처럼 평온하기도 했다. 준은 그 신비한 눈동자를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봤다. 생전 처음 보는 신비하고 기묘한 눈빛이었다.
* * *
한편 성벽쪽에 있던 정체불명의 투황은 도시 한쪽에서 보라색 빛기둥이 솟아오르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를 악물었다.
“진화가 시작 되려는 것인가?”
“망할 인간 놈들, 여왕 폐하께서 진화에 성공하시면 너희는 단 한 명도 도망칠 수 없을 것 이다.”
하슬이 입가의 핏자국을 닦아내며 차갑게 쏘아붙이자, 검은 망토의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지도. 하지만 진화에 실패하면 우리가 손 쓸 필요도 없이 너희들의 여왕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거야. 게다가 진화에 성공한다해도,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고.”
“닥쳐라! 여왕 폐하께선 반드시 성공해서 너희 인간들을 쓸어버릴테니까!”
메두사의 호위 대장은 독기 어른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정체 불명의 인간족 강자에게 돌격했다.
“사실, 나도 메두사 여왕이 진화에 성공한 뒤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그리고 투황이 한번 손을 휘두르자, 3미터가 넘는 거대한 푸른 검이 나타났다.
* * *
“저게 메두사의 본체인가요?”
“뱀 인간은 인간과는 다르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뱀 마수의 영혼을 신체에 주입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영혼과 함께 성장하지. 그리고 그렇게 강해진 마수의 영혼이 그들과 완전히 융합되면 뱀으로도, 사람으로도 변할 수 있게 되는게다.”
“아… 그렇군요.”
준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메두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대체 뭘 하려는 걸까요? 설마 이대로 천지의 불꽃을 삼키려는 건 아니겠죠?”
하지만 이번만큼은 약로도 뚜렷한 대답을 해줄수가 없었다.
“나도 정확한 것은 모른다. 다만 나는 그녀가 진화에 성공할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구나. 투황 레벨로는 천지의 불꽃을 감당할 수 없어. 일단 쓸데없는 호기심은 접어두고 정신을 집중하거라. 천지의 불꽃도, 메두사도, 지금의 너와 내가 감당하기에는 버거우니까.”
약로의 당부에 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눈 한번 깜빡하지 않고 그녀를 주시했다.
어느 새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신전을 가득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이렇게까지 정성을 들였는데도 방해를 받다니…그녀도 참 안됐군. 우리에게는 운이 좋지만 말이다. 저 정도 빛이라면 고하 일행도 이곳을 눈치챘을게다.”
약로의 말투에는 왠지 모를 씁쓸함마저 묻어났다. 그 역시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는 자로서 그 힘을 얻기 위해 무던하게 애를 써보았으니, 메두사의 심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 듯 했다.
“어찌됐든 저희에게는 잘 된 일이지요.”
그렇게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갑자기 거대한 뱀이 공중으로 떠올라 빙글 빙글 돌더니 고개를 돌려 푸른 불꽃을 향해 뛰어들었다.
“선생님…!저래도 되는거에요?”
“저 여자 미쳤군…천지의 불꽃에 몸을 부딪힐 생각을 하다니!”
메두사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푸른 화염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리고…곧이어 처절한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준은 이화 속으로 뛰어든 메두사의 처절한 비명 소리에 온몸의 털이 다 빳빳하게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푸른 화염속에서는 거대한 보라색 뱀이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날뛰고 있었고, 그녀의 피부를 덮고 있던 거대한 비늘은 이미 새까맣게 그을린 채 몸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우욱…”
준은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돌리고 말았다.
비늘이 벗겨져 맨살이 드러난 곳에서는 고약한 살타는 냄새와 함께 붉은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으며, 그녀의 비명소리는 도저히 듣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고 처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몸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작아지기 시작했다.
* * *
메두사 여왕이 만들어내는 소란은 온 도시를 뒤흔들 지경이었고, 주군의 비명을 들은 뱀 인간족의 강자들이 하나 둘 그녀의 진화가 이루어지는 신전으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보라색 빛은 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았고, 결국 그녀의 수하들은 애타는 심장으로 밖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수 밖에 없었다.
한편 북쪽으로 길을 잘못 접어들었던 고하는 동쪽 건물에서 보라색 불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발견하고는 망연 자실한 표정으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큭큭…결국 의식이 시작되고 말았군.”
* * *
“이제 어쩌죠?”
“’음…기다리거라. 대지의 불꽃이 메두사 여왕에게 자극을 받아 폭주하고 있으니 가까이 갔다가는 뼈도 추리지 못 할 것 이다.”
약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던 준은 이미 연못 가득 찰랑이던 얼음의 심장이 모두 증발한 것을 발견하고 식은 땀을 흘렸다.
대지의 불꽃은 그 귀한 얼음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연못을 모두 불태우고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주위의 대지를 모두 녹여내면서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느 새 대지의 불꽃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열기에 의해 준의 몸에는 땀이 비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처절한 비명이 이어지기를 30분…이제 그녀는 더 이상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고 있었다. 죽은 것인지, 힘이 빠진 것인지, 아프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3미터에 가깝던 그녀의 몸뚱이는 이미 2미터도 되지 않아 보였다.
* * *
한편 신전 밖에서는 점점 더 많은 뱀 인간족 사람들이 지붕 위로 올라가 멍하니 보라색 불빛을 바라보고 있었다.
“실패한 건가?”
검은 망토를 걸친 여인이 고하의 곁에 다가가 냉랭한 목소리로 묻자, 고하는 말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메두사 여왕의 비명이 멈추자 도시는 곧 침묵속에 잠겨들었다.
“하지만 진화가 실패해 그녀가 타죽었다면…가한 제국입장에서는 경사겠지요.”
“흠…”
고하의 말에는 아쉬움이 가득했지만, 그의 말마따나 메두사가 죽으면 인류로서는 큰 걱정거리를 하나 덜어낸 것 이었다.
하지만…아쉬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고하와 달리 갑자기 검은 망토를 두른 여인의 안색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 됐어. 천지의 에너지가…”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 보는 순간, 갑자기 출처를 알 수 없는 먹구름이 새까맣게 천지를 뒤덮었고, 이 장면을 지켜보던 고하의 표정 역시 싸늘하게 굳어 버리고 말았다.
쾅—
곧이어 갑자기 먹구름에서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하늘과 땅 사이에 뱀의 형상을 닮은 금빛 섬광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고하가 두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바라보자,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여인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서에 의하면, 강력한 마수가 승급을 할 때면 그들의 체내에 담긴 거대한 힘이 주위의 에너지를 흐트러뜨려 이상 기후를 만든다고 하던데…그게 아닐까 싶네요.”
“아니 그럼… 그녀가 진화에 성공했단 말씀이신가요?”
“확실치는 않습니다.”
“후퇴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일단 기다려보죠. 그녀가 진화에 성공했다고 할지라도…천지의 불꽃에 의해 수 십 분이나 불에 탔으니 절대 온전한 상태는 아닐거에요.”
“그런…좋습니다, 좀 더 기다리죠.”
고하는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리를 들어 먹구름을 응시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을 가득 메운 먹구름이 사라지고, 거짓말처럼 뜨거운 태양이 다시 뱀 인간족의 성지에 내리쬐기 시작했다.
그리고 메두사의 비명소리가 퍼져나오던 곳에서 푸른 연기가 솟아오르자, 고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곳의 안쪽은 완전히 불타 사라진 것 같군요.”
“기다렸다 연기가 사라지면 들어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