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7화. 촌각을 타투는 일
“뱀인간의 여왕이라더니… 지능도 뱀 수준인가보군. 자신에게 아무 쓸모도 없는 천지의 불꽃과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마수의 구슬을 교환하자는데…”
태원은 고개를 저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약로 역시 태원과 같은 생각인 듯 했다.
“확실히 말도 안 되는 대답이야. 천지의 불꽃은 뱀인간에게 빛 좋은 개살구야. 자살용으로 쓰지 않는 이상 아무 쓸모가 없지. 게다가 고하가 천지의 불꽃을 얻어 강해질게 두려워서라면…그전에 죽여버리면 그만이야. 지금 고하 따위는 메두사와 붙으면 열에 아홉은 도망조차 치지 못 하고 목숨을 잃을테니까. 그렇다면 설마…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스승님, 왜 그러시죠?”
준이 궁금하다는 듯 질문을 던졌지만, 약로는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자세한 건 이따 얘기하자꾸나.”
‘우씨…왜 사람 호기심만 자극하고 사라지는 거야!’
……
“여왕 폐하께서 거절하실 줄은 정말 상상치도 못 했군요…”
“솔직히 혹하기는 하지만…지금 나에게 그 물건이 꼭 필요해서 말이지.”
고하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메두사를 바라보자, 메두사는 다시 한번 거절의 의사를 확실히 했다.
“그렇다면 왜 그걸 필요로 하시는지라도 말씀해 주실 수 없습니까? 제 능력이 닿는 한도 내에서라면 여왕께서 천지의 불꽃을 필요로 하는 이유에 맞는 다른 물건을…”
고하는 도저히 천지의 불꽃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는 듯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미안하군. 말해줄 수 없다. 그러니 그냥 돌아가. 배상에 관한 것은 없던 일로 하지. 그 정도 물건을 준비했다면 이곳까지 찾아올 마음이 들만도 하니까. 성의도 충분하고. 괜한 생떼를 부리러 온 것은 아니었군. 그러니 나도 최소한의 성의를 보여 보상은 요구하지 않으마. 뱀 인간족의 다른 족장들이 오기 전에 자리를 떠라. 그들 중에는 인간족이라면 이를 가는 자들도 많으니.”
결국 고하는 한숨을 내쉬며 동료들을 돌아보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스승님, 정말 그냥 물러서실 생각입니까?”
태원의 질문에 고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쩌겠느냐. 나는 정말로 거래를 하러 온 것 이다. 허튼 생각 말거라. 지금 이 자리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목숨을 건지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지경이니까.”
하지만 태원과 제논은 미련을 버리기가 힘든 듯 검은 망토를 입은 여인을 바라봤다.
“종주님…”
“예전에 뱀 인간에 대한 고서를 본적이 있어요. 그리고 그 책에 의하면 뱀인간족의 여왕이 투황 계급의 최고 수준에 이르면 신비한 진화가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진화에 성공하면 뱀인간과 인간으로 자유롭게 변화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여져 있었죠. 뿐만 아니라 실력 또한 자연스럽게 투종으로 올라간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다만…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낮고, 천지의 불꽃을 필요로 한다고 했으니…아마도 메두사가 9성 투황이 됐다는 이야기겠군요.”
“역시…”
약로는 검은 망토를 입은 여인의 목소리를 듣더니 나지막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런데 스승님, 저 목소리…어딘가 익숙한데요? 얼마 전에는 완전히 할머니 목소리더니…”
“지금 그런건 알아서 뭣하게. 이 상황을 어찌할지나 고민해 보거라.”
“흠…”
준은 멋쩍게 헛기침을 하고는 다시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메두사 여왕이 천지의 불꽃의 도움을 받아 정말 투종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래. 하지만 위험성이 상당하지. 한치의 오차라도 있으면 바로 재가 될 테니까.”
“후…그럼 빨리 움직이는 게 좋겠어요. 저 사람들이 떠나고 나면 천지의 불꽃을 훔쳐올 기회조차 없다구요.”
준의 말대로였다. 그러나 약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준을 제지시켰다.
“아니, 기다려 보거라. 뭔가 이상해.”
……
한편, 메두사는 인간족이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는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검은 두루마기를 걸친 투황을 가만히 응시했다.
“상당히 견문이 넓군.”
“네. 그리고 하나 더 재미있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 메두사 여왕이 만들어낸 허상이라는 것 말이죠. 그리고 진짜 메두사 여왕은 이미 진화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그녀의 한마디에 자리에 있던 모든 자들이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호오…역시 투황은 투황이구나. 내 염력 분신을 눈치채다니.”
그리고…메두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검정 망토를 걸친 자의 몸이 사라지며 메두사의 염력 분신의 뒤를 잡았다.
곧이어 그녀의 손에서 청색의 염력이 타오르자 메두사 여왕의 허상이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검은 망토의 투황이 메두사의 분신을 공격하는 순간, 월녀와 헤파스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일그러졌다.
“죽여라!”
곧이어 헤파스의 고함 소리가 성벽에 울려 퍼지자, 주위를 가득 메우고 있던 뱀인간들이 일제히 독창을 투척하기 시작했다.
쉬이익-!
수 백 개의 독창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하고, 하늘로 날아오른 독창이 시커멓게 하늘을 뒤덮었다.
하지만 투황이 손바닥을 한번 쥐었다 펴니 거대한 푸른색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며 모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 수 백 개의 독창을 날려버렸다.
“뚫고 들어가죠. 상황이 이쯤 되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걸 보니 지금이 기회입니다.”
검은 망토를 입은 여인이 고하를 바라보자, 고하가 주변에 있던 이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태원, 제논, 가자. 헤파스쪽 두 사람을 막거라. 나는 성으로 진입해서 이화를 찾겠다.”
“하하.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또 화끈하게 한 탕 해봐야죠!”
태원은 기다렸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고, 고하는 지체 없이 성안으로 달려갔다.
“거기 서!”
그러자 월녀와 헤파스가 번개 같이 달려와 고하를 막아섰다.
“헤헤, 미안하지만 너희 상대는 이쪽이다!”
하지만 태원과 제논이 또 다시 뱀인간족의 두 강자를 막아섰다.
“친위대! 어서 저 자를 막아!”
“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월녀는 황급히 친위대에게 명령을 내렸고, 수 십 명의 뱀 인간들이 고하를 향해 달려갔다.
고하는 즉시 자신을 둘러싼 뱀 인간들의 실력을 가늠해보았다. 투령 둘과 열 댓 명의 대투사, 아무 문제도 없었다.
고하는 망설임 없이 두 손을 모아 염력을 끌어 모았고, 그러자 무시무시한 기세로 화염이 불타오르며 그들의 앞에 불꽃 장벽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단왕이 날개를 펼치는 순간, 그의 머리 위에서 무시무시한 기세로 독창 하나가 날아들었다.
고개를 들자 푸른색 날개를 펄럭이는 친위대장 하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투왕이라…”
앞을 막아 선 뱀 여인을 본 고하는 상대의 실력을 알아보자마자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투왕이었으니 이번만큼은 쉽지 않았다.
쉭!
그러나 그의 눈앞에 검은 망토의 여인이 나타나는 순간, 고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여자는 내게 맡기고 가세요. 메두사가 진화에 성공하기 전에 불꽃을 빼앗아야 합니다. 시간이 없어요.”
“네.”
……
한편, 이준 역시 혼란을 틈타 천지의 불꽃을 찾고 있었다.
“스승님, 어때요?”
“흠…뱀처럼 교활한 계집이구나.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모르겠다만, 천지의 불꽃의 기운이 네 군대로 찢어져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껄껄, 걱정 말거라. 이 몸에게 이런 얄팍한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 참신한 방법을 쓰긴 했다만…동쪽에 있는 것이 진짜다.”
“하하, 그럼 고하는 방향을 잘못 들어섰군요!”
준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고하는 북쪽을 향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잽싸게 방향을 틀어 십 분 남짓을 비행하니 눈앞에 거대한 신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여기야, 조심하거라.”
“네.”
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비행속도를 낮춘 채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서둘러라. 만일 메두사 여왕이 진화에 성공한다면 나조차도 어쩔 방법이 없어.”
“네.”
준은 약로의 도움으로 기척을 완벽하게 감춘 뒤 약로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준은 약로의 도움을 받아 순찰대가 다가올 때마다 교묘히 몸을 숨겨가며 열심히 천지의 불꽃을 향해 질주했다.
그렇게 십 여분을 달리자, 그의 시야에 작고 맑은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호수 중앙에 조그마한 섬이 있었고 주변에는 물결이 찰랑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까지 갈만한 다리 따위가 놓여 있지는 않았다.
“쳇…!”
준은 즉시 날개를 펴고 호수 위로 날아오르려 했지만 갑자기 거짓말처럼 염력이 빠져나가며 날개가 사라졌다.
“젠장! 이게 뭐야!”
그리고 준이 급한 마음에 호수를 헤엄쳐서라도 가로지르려는 순간, 약로가 그를 막아섰다.
“멈춰! 그 호수에 맹독이 퍼져있다!”
“네?”
준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약로를 돌아보자 약로가 조그마한 약병 하나를 호수에 집어던졌고, 그러자 ‘푸쉭-’ 하는 소리와 함께 약병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게다가 호수 위로는 기묘한 결계가 쳐져있어서 위로 지나가는 모든 것들을 호수로 끌어당기고 있구나.”
“그럼 어떡할까요?”
“이럴 때는 단순한 방법이 최고다. 지난번 용암에 뛰어들었을 때처럼 내가 너를 지켜주마. 최대한 빨리 섬까지 달려가!”
“네!”
대답할 시간도 아까웠다. 준이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즉시 백색의 화염이 그를 감쌌다.
준이 불속으로 뛰어들자 그의 주위에 있던 호수물이 거짓말처럼 증발되기 시작했고, 물이 증발되면서 역겨운 독향이 퍼져나갔다.
“서둘러라! 독성이 너무 강해!”
준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인 뒤 사력을 다해 작은 섬으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준이 섬에 거의 다 도착한 순간, 맹렬한 파도가 일며 그를 방해했다. 물살을 일으킨 범인은 온 몸이 녹색 비늘로 뒤덮이고 삼각형의 머리를 가진 커다란 뱀이었다.
“제기랄. 이 조그만 호수에 별 게 다 있군!”
곧이어 거대한 뱀이 준을 향해 돌진하자,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손바닥으로 수면을 내리쳤고, 순식간에 수면에 네 갈래의 물기둥이 형성 되며 녀석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동시에 준은 그 반동을 이용해 물 위로 튀어 올랐지만, 놈 역시 필사적으로 준을 따라왔다.
“빌어먹을 놈이…!”
그러나 작은 섬에 발을 디디자, 거대한 뱀은 갑자기 안색이 변해 주춤거리다가 섬 주변을 맴돌며 그를 노려볼 뿐 감히 섬에 발을 들이지 못 하고 혀를 낼름거릴 뿐 이었다.
“후…”
준은 자신을 바라보며 붉은 혓바닥을 낼름거리는 뱀을 무시한 뒤 고개를 돌려 섬을 바라봤다.
섬의 크기는 멀리서 보던 것과 다름없이 작았고, 대나무와 풀, 꽃들이 가득해 생기가 가득했다.
이윽고 준의 몸을 지켜주던 백색 화염이 사그러들고, 약로가 입을 열었다.
“조심해라. 메두사 여왕이 이 안에 있다. 아직 너를 눈치채지는 못 했지만, 아무리 기척을 숨겨도 눈에도 안 보이는 것은 아니니,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한다.”
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숲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
숲속은 준이 풀을 밟으며 내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적막했고, 천지의 불꽃이 뿜어내는 독특한 기운이 사방에 가득했다.
작은 오솔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 옆으로 돌아서자, 널따란 평야가 나타났다. 준은 풀숲 사이로 몸을 숨기고 작은 틈새로 섬 중앙에 펼쳐진 평야를 바라봤다.
안타깝게도 섬 중앙의 평야에는 대나무나 풀 한포기 없이 매끄러운 돌멩이만이 가득해 몸을 숨기기가 어려웠고, 한 가운데에는 작은 연못 하나가 찰랑이고 있을 뿐 이었다.
“얼음의 심장…”
연못을 유심히 바라보던 준은 속으로 기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단순한 연못이 아니라 자신이 간신히 얻었던 얼음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