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메두사 여왕
준은 약로가 준 금색 망토 하나를 꺼내 몸에 둘러 자신을 모래로 위장했다. 그러자 그가 몸을 숨긴 장소가 주변의 모래와 더욱 비슷해져 가까이 오지 않는 이상 도저히 그를 발견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조심하거라. 강한 기운이 다가오고 있다.”
약로의 경고를 들은 준은 바짝 긴장하며 호흡을 가다듬은 뒤 망토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허공 위에 검은색 점들이 나타나 성안으로 날아들었다.
곧이어 성벽의 호위대가 시끄러운 경보음을 울리고, 뱀 인간들이 새카맣게 모여들었다.
바로 그 때, 하늘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늪 부락의 수장 헤파스, 여왕 폐하를 알현하러 왔다!”
* * *
널찍하고 호화로운 궁전 안, 다소 피곤해 보이는 여인 하나가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자수정으로 만든 빈 왕좌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검정색의 형상이 허공에 나타나는 순간, 그녀는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월녀, 대체 무슨 일이지? 3레벨의 경계태세라니.”
궁전 안으로 들어온 사내는 스네이크 족의 사내로, 건장한 체구에 단촐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사내의 두 팔 위에는 기이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신은 손 바닥까지 길게 뻗어 흡사 흉악한 독사처럼 보였다.
“투황 하나에 투왕 셋, 투령 넷. 어젯 밤 그들과 붙었다가 간신히 목숨만 건진 상태야.”
월녀의 짤막한 대답에 사내의 표정이 돌처럼 굳어졌다.
“어떻게 그런 강자가 한꺼번에 모였지? 여왕 폐하께서는 알고 계신가?”
“알려 드렸어. 하지만 내게 상황을 알려 너희들을 데리고 오라는 말씀만 하셨어. 헤파스, 네가 가장 먼저 도착한거고. 나머지는 아직이야.”
“갑자기 사막으로 들이닥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여왕폐하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더군…”
“여왕 폐하?”
헤파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뱀 인간족의 전체적인 전력은 인간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다.
인간과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것은 오직 그들의 여왕 메두사 덕분이었다. 그런 메두사를 인간이 먼저 찾아오겠다니…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모르겠어…여왕님이 나타나면 숨기 바쁘던 자들이, 갑자기 스스로 여왕님을 만나겠다니…”
월녀의 말을 듣던 헤파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왕 폐하를 알현해야겠어.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야 할 것 같군.”
“관둬. 여왕 폐하께서는 지금 아무도 만나고 싶어하지 않아. 나도 여왕님을 직접 만나지 못 했어. 여왕 폐하께서 호위 대장인 하슬을 시켜 너희를 부르라고 했을 뿐 이야.”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신다는 거야? 평소답지 않으시군.”
바로 그 때, 월녀와 헤파스는 하던 말을 멈추고 곧장 밖으로 달려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인간 하나가 성벽에 나타나 있었다.
헤파스는 즉시 날개를 펼쳐 성벽 위로 날아올랐다.
“인간들아, 어째서 허락도 없이 우리 종족의 구역에 들어오느냐? 전쟁을 벌이고 싶은게 아니라면 썩 꺼져라!”
“하하. 늪 부락의 수장이시군요?”
사내는 여유로운 태도로 헤파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하. 제 소개부터 하는게 예의겠군요. 저는 단왕 고하라고 합니다.”
“고하…?”
월녀와 헤파스는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하하, 저희는 다만 메두사 여왕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온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킬 마음 따위는 없으니, 자리를 만들어 주실수는 없을까요?”
고하의 요청에 헤파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다. 자네도 잘 알텐데? 이미 각 부족의 최강자들이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으니 지금 떠나라는 말 밖에는 해줄 수가 없군.”
바로 그 때, 태원이 기다렸다는 듯 둘의 대화를 자르고 나섰다.
“흥, 그거 보십시오! 일단 도시를 쓸어버리면 뱀 여왕인지 나발인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는 못 배길겁니다.”
“허, 누군가 했더니 무식하게 힘만 쓸 줄 아는 사자 새끼였군……”
헤파스는 싸늘한 눈빛으로 태원을 노려봤다.
“메두사 여왕폐하! 저는 가한제국의 단왕 고하라고 합니다. 저희가 이곳에 온 것은 여왕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서입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왔으니 한번 이야기라도 들어주시지요!”
월녀와 헤파스는 막무가내로 소리를 치는 고하를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렸지만, 적극적으로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어찌됐든 결정은 여왕이 내릴 일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휘황찬란한 비단 옷을 입은 여인 하나가 신전 입구에서 우아한 날개를 펼쳤다.
여인의 온 몸에서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요염한 기운이 넘쳐흘렀고, 도도하게 치켜 뜬 두 눈은 오만하면서도 기품이 충만했다.
“여왕 폐하!”
그녀의 등장으로 새카맣게 도시를 메우고 있던 뱀인간들이 일제히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저 여인이 바로 여러 제국을 벌벌 떨게 만들었던 메두사란 말이지?”
준은 한 마리 나비처럼 우아한 자태로 하늘하늘 날아오르는 뱀여인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메두사가 나타나자 고하와 태원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여인 곁으로 슬금슬금 달라붙기 시작했다.
“나를 찾았나?”
메두사 여왕이 고개를 돌려 고하를 응시하자, 그녀의 새빨간 입술이 초승달처럼 휘어졌고, 그 고혹적인 미소에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여왕폐하, 만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저는 가한제국의 단왕 고하입니다.”
“호오…재미있는 인물이 찾아왔군. 6레벨 연금술사가 귀하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투황까지 달고 나타날 줄은 몰랐는걸?”
메두사는 검은 망토를 입은 사내를 천천히 훑어봤다. 아마 그 중에 자신의 상대가 될 만한 것은 그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좋아. 용건이나 들어보지. 자칫 두 종족의 전쟁으로 번질수도 있다는걸 알면서도 내 영역에 발을 들인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막상 메두사가 나타나자 고하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물론 가한제국에 명성이 자자하신 연금술사가 벌인 일이니, 가한제국에서 이 일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준비해주겠지? 덕분에 우리 뱀인간들의 아이들이 밤낮없이 고생을 하고 있거든.”
메두사의 지적에 고하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뱀인간의 영역에 허락도 없이 발을 들인 것은 죄송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제가 개인적으로 충분히 보상해드리겠습니다.”
“생각보다 예의가 바르군. 마음에 들어. 그럼 용건을 얘기해봐.”
메두사는 기다란 속눈썹을 깜빡이며 입을 열자, 고하는 마른 침을 삼키며 마음속으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정리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름답고 우아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녀의 신경을 거스르는 순간 이 자리에 있는 자들 중 몇 명이나 살아나갈지 알 수 없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고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천천히 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여왕 폐하께서 천지의 불꽃을 손에 넣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
돌더미 사이에 숨어있던 준은 그 말을 듣자마자 쓴 웃음을 지었다.
“천지의 불꽃? 여왕 폐하, 언제 그런 것을……?”
헤파스와 월녀 역시 그 사실을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두사를 바라봤다. 하지만 메두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이신 것 같군.”
헤파스가 한숨을 내쉬자, 월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세상에…그런 위험한 물건을…만일 여왕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우리들은…”
“휴…이미 여왕 폐하께서 투황 레벨에 머문지도 수 년이 되셨으니, 다급해지신 거겠지…여왕님께서 투종이 된다면 우리 뱀인간들은 사막을 벗어날 수 있게 될테니까. 사실 인간들 때문에 사막에 사는 것 뿐이지, 냉혈 동물인 우리에게 이곳은 그리 좋은 환경이 아니니 아마도 그 때문이겠지.”
두 명의 뱀 인간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메두사는 말없이 고하를 바라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어디서 그런 소식을 접했지?”
“보름 전, 제가 마침 사막에서 약재를 찾고 있었는데 천지의 불꽃의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기운을 따라 길을 걸어가 보니 여왕 폐하의 모습은 없었지만 피가 묻은 일곱 빛깔의 뱀 비늘을 발견 했습니다. 그 비늘은 여왕 폐하께서 전력으로 전투에 임하실 때만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늘에서…천지의 불꽃의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메두사는 말 없이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핥으며 고하를 바라봤다.
이윽고 그녀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지자, 고하는 즉시 검은 망토를 입은 여인에게로 바짝 달라붙었다.
“여왕님, 다른 뜻이 있는게 아니라…저희 연금술사에게 천지의 불꽃은 매우 중요한 재료 중 하나입니다. 저 역시 그 불꽃을 얻기 위해 가한제국의 구석구석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이지요. 저는 그것을 위해 어떤 대가라도 치를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반면 뱀 인간들의 피는 차가우니 천지의 불꽃이 그다지 유용하지 않은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위험하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무례인 것을 알면서도 굳이 찾아온 것이지요.”
“거래를 하고 싶다…이 말인가?”
메두사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싸늘한 표정으로 고하를 훑어봤다.
“호오…그래? 천지의 불꽃과 바꿀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긴한가? 내가 알기로는 이 물건이 상당히 값이 나가는걸로 알고 있는데 말이야.”
“6레벨 영혼의 정수 두 알과…… 7레벨 마수의 구슬입니다.”
고하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태원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이 눈을 크게 뜨고 고하를 바라봤다. 심지어 검은 망토의 여인마저도 고개를 돌렸다.
6레벨 영혼의 정수는 투왕 계급의 강자가 단 며칠만에 다음 단계로 진입하게 해주는 물건으로, 보통 1성 투왕이 2성 투왕이 되는데만 몇 년이 걸리니, 그야말로 누구나 탐을 낼만한 보물이었다.
물론 그 기회는 일생의 한번뿐인 것으로, 두 번째 복용할 때는 아무런 효과도 볼 수 없다는 제약이 붙기는 하지만…그렇다해도 몇 년을 며칠로 줄일 수 있는 물건이니 모든 투왕들이 눈이 뒤집혀 있는 진정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수의 구슬에 비교하자면 영혼의 정수도 장난감에 불과했다.
마수의 구슬은 이전에 하늘 사자가 은지에게 요구했던 것 으로, 당시 투황이었던 그녀도 말도 안된다며 화를 냈을 정도의 물건이었다.
마수의 구슬을 갖게 되면 마수를 투종, 심지어 투성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연금비약이었으니 그 가치는 종족간의 전쟁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데 고하는 지금 그 두 가지를 한번에 거래 조건으로 내건 것 이다.
‘미쳤군…손이 커도 너무 커. 아무리 가한제국 제일의 연금술사라도 저건 너무한 것 아니야?’
그러나 이 이야기를 듣던 약로의 반응은 준과는 사뭇 달랐다.
“듣기야 좋다만, 지금 저놈 실력으로는 마수의 구슬은커녕 영혼의 정수도 힘들다. 안심하거라.”
“정말이요? 그럼 거짓말이라는건가요?”
그리고 준이 약로의 대답을 기다리는 사이…메두사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아주 매력적인 조건이군. 하지만 내 대답은…거절이다.”
메두사가 거절하자 고하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뱀인간에게 아무런 쓸모도 없는 천지의 불꽃을 모든 마수가 탐내는 마수의 구슬과 교환하자는 것인데, 거절을 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