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사막의 도시
“헉…헉…”
준은 식은 땀을 뻘뻘 흘리며 멍하니 그 사내를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한편 이 광경을 바라보던 중년의 사내는 눈을 크게 뜨고 검은 망토의 강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냉정하기로는 이 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더한 자가 바로 그 검은 망토의 강자였기 때문이다.
사내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무리들을 이끌고 검은 망토의 투황과 준에게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젊은 친구가 상당히 겁이 없군. 혼자서 이곳까지 들어오다니…우리들도 이렇게 깊은 곳까지 혼자 들어올 만큼 대담하지는 않은데 말이야.”
“하하…어쩌다보니 저 여자에게 쫓겨서 이곳까지 달아나게 됐습니다.”
소년이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자, 검은 망토의 투황이 입을 열었다.
“어서 이곳을 떠나는게 좋을거야. 이런 행운이 두 번 찾아오지는 않을테니까.”
‘여자였어? 게다가…노인?’
준은 검은 망토를 입은 강자의 입에서 쉬어 터진 노파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깜짝 놀라 두 눈을 깜빡였다.
“?”
그리고 검은 망토의 여인이 입을 여는 것을 본 중년의 사내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서 갑시다.”
곧이어 검은 망토의 강자가 손을 내저으며 걸음을 옮기자, 자리에 있던 강자들이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중년의 사내는 가장 마지막까지 자리에 서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걸음을 옮기며 휘파람을 불어 자신이 녹색 마수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막 녹색 마수의 등에 올라타려는 순간, 갑자기 검은 망토를 입은 여인이 손을 뻗었고, 그러자 그녀의 손에서 기이한 흡입력이 발휘되어 준의 손에 있던 검은 송곳을 낚아채갔다.
“이봐요!”
준이 소리를 지르는 순간, 검은 망토의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진정해. 이 물건에 뱀독이 묻어 있어서 그런거니까. 지금은 괜찮지만, 염력을 사용하면 네 몸에 독이 파고 들거야.”
여인은 소년에게 말을 거는 동시에 손에서 청색의 염력을 내뿜었고, 그러자 검은 송곳에 묻어있던 독이 녹색 연기로 변해 허공에 흩어졌다.
한편, 그 광경을 바라보던 사내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 하고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귓속말을 주고 받았다. 사내들의 행동으로 미루어보아 검은 망토의 여인이 남을 돕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닌 것이 확실했다.
그녀는 독을 모두 뽑아낸 뒤 검은 송곳을 던져주고는 마수의 등에 올라타 사라졌다. 하지만 사내가 검은 송곳을 던지는 순간, 무언가를 발견한 준은 눈을 가늘게 뜬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네…손이 너무 곱잖아. 손가락도 가늘고 길고…아무리 봐도 젊은 여자 손인데…’
하지만 준이 검은 망토의 여인의 정체를 궁금해 하거나 말거나 그들은 이미 멀리 사라진 상태였다.
준은 검은 마수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허공을 바라보다가 반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 지금 나오셔도 될 것 같은데요?”
이준의 말이 끝나자 질박한 반지가 미세하게 떨리며 반투명한 상태의 약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아하니 타르사막에 곧 큰 일이 벌어지겠구나.”
“그들이 타르사막까지 온 이유가 뭘까요? 설마 가한제국이 다시 뱀인간들과 전쟁이라도 벌이려는 걸까요?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고해도…메두사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잖아요. 게다가 뱀 인간의 8대 부락에 얼마나 많은 강자들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상태고…”
바로 그 때, 약로가 살짝 웃음기 어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 망토를 뒤집어 쓴 자 말이다. 투황 레벨의 강자더구나.”
“네? 하지만 동해도 투황급의 강자잖아요. 그런데도 메두사에게 당해 지금 그 꼴이 됐는데…그러니 저 사람이 투황이라고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는 없겠죠. 동해가 당했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지금은 메두사도 더 강해져 있을테고…그나저나 그걸 알면서도 메두사를 찾으려는 이유가 뭘까요?”
준의 질문에 약로가 또 다시 묘한 웃음을 흘렸다.
“아까 봤던 중년의 사내가 바로 내가 말했던 영혼 탐지능력이 뛰어난 자다. 아마도 연금술사겠지.”
“연금술사요? 투왕 레벨의 연금술사라구요?”
제자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되묻자, 약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설마…투황 레벨의 연금술사라면…6레벨 이상이잖아요! 그럼 그 사람이 고하라는 거에요?”
“껄껄…그 사내가 정말 고하라는 애송이라면 이 정도 인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허…정말 황당하네요. 이런 사막 한복판에서 그 유명한 단왕을 만나다니…”
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마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이놈아, 단왕 고하가 저 정도 인물들을 끌어들여 메두사를 만나려는 이유가 뭔지나 생각해보거라.”
약로의 한마디에 준의 머릿속에 얼마 전 놓친 대지의 불꽃이 스쳐지나갔다. 동해의 말에 따르면 고하는 아직 천지의 불꽃을 가지고 있지 못 했다.
“스승님. 가시죠. 정말 그의 목적이 대지의 불꽃이라면, 선수를 쳐야죠. 단왕 고하가 아니라 그 누구라 해도 저에게서 그 물건을 빼앗아갈 수는 없어요.”
“껄껄, 그래.”
약로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반지안으로 되돌아갔다.
“지금쯤이면 이미 뱀 인간족의 부락에 고하가 나타났을거에요. 그럼 상당한 혼란이 일어났을테니 빠르게 지나갈 수 있겠죠.”
“그래, 가자. 놈들의 영역에 들어서면 내가 기척을 지워주마. 날도 어두우니 어지간히 운이 나쁘지 않다면 무사히 지날 수 있을게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즉시 기력의 조각을 한 알 꺼낸 뒤 날개를 펼쳤다.
* * *
한참을 날아가니 거대한 뱀 인간족의 요새가 조금씩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요새에는 등불이 불안정하게 깜빡이고 있었고, 염력이 부딪히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날아왔다.
‘역시…이곳으로 왔군.’
수 십 미터 높이의 성벽에는 고슴도치의 등처럼 날카로운 화살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이 정도라면…투령이 와도 안 될 것 같은데…?’
준은 성벽 위에 잠시 몸을 숨기고 뱀 인간들이 없는 방향을 확인한 뒤 다시 날개를 펼쳤다.
“아우우!”
하지만, 준이 막 성벽을 넘으려는 순간, 하늘에서 늑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준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상공을 올려다보니 새카만 물체 하나가 공중을 선회하며 울부짖고 있었다.
“하늘 위에 누군가가 있다! 하늘 위에 누군가가 있다! 경보! 경보!”
이윽고 함성소리와 함께 독이 발린 화살과 투창이 준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고, 성벽 가까이에 뱀 인간족 여자 하나가 나타났다.
“찢어죽일 인간놈들! 감히 한밤중에 우리 부락을 침범해?”
준은 황급히 날개를 펼쳐 하늘로 솟구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의 발밑으로 화살과 투창이 벌떼처럼 날아들었다.
“젠장…!”
그리고 준이 달아난지 몇 초가 흐른 뒤, 한 무리의 뱀인간이 여인의 뒤를 따라 성벽으로 달려왔다.
“우리는 일단 성벽을 수리하고 도시를 지킨다. 그리고 어서 이 소식을 다른 부락에 알려라!”
* * *
아득하게 펼쳐진 사막 위에는 수 십명의 뱀인간이 맹독이 묻은 창을 손에 든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보며 이동하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인간들. 감히 사막 안까지 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무리에 있던 뱀인간 하나가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으며 욕지기를 내뱉었다.
“대장님,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왜 갑자기 침입자가 들어온 겁니까?”
뱀 인간 무리 중 한 명이 꼬리를 휘휘 저으며 질문을 던지자, 나머지 뱀 인간들도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바라봤다.
“어제 밤에 갑자기 인간족의 강자들이 팔대 부락 중 한 곳의 방어를 뚫고 그대로 사막 안쪽으로 이동했다. 정보에 따르면 총 8명의 강자로 그 중 하나는 투황, 세 명은 투왕, 넷은 투령이라고 하다군.”
대장의 답변에 뒤를 따르던 뱀 인간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해버렸다. 그 정도의 전력이라면 현재 뱀인간들의 8대 부족 중 어떤 세력도 단독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이미 8대 부락의 수장들이 여왕폐하의 명을 받아 사막 중심부의 신전으로 가고 있다.”
하지만 ‘여왕 폐하’라는 단어가 나오자 뱀 인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세 명의 수장이 신전에 도착한다면 여왕폐하께서도 수색을 시작하라 명하시겠지. 우리 뱀인간들의 강자가 모두 모이면 인간 따위야 몇이 되든 두려울게 없다.”
말을 마친 대장은 차갑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아득한 사막을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가자, 여기에는 인간이 없는 것 같군.”
하지만…그들이 지평선 뒤로 사라진 뒤 모래더미 하나가 서서히 흔들리더니 사람의 형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승님, 뱀 인간족의 강자들이 모두 모이면 저들도 어렵지 않을까요?”
“아니다,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것이라면 타르 사막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오히려 오늘 오후에 승부를 보려 들게다. 뱀 인간들의 강자들이 모두 모이려면 오늘 저녁은 되어야할테니…그 이전에 뭔가 수를 쓰려하겠지.”
“흠…”
약로의 말을 들은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꺼내들어 사막 중심부에 그려진 뱀 머리 표시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메두사의 신전 주위에는 여러 부락들이 겹겹이 분포되어 있어요. 게다가 여왕의 직속 친위대까지 있으니 그 사람들도 쉽게 신전에 접근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요? 이제 어떡해야하죠?”
준은 고민스러운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약로라 해도 영혼상태로 메두사와 그 친위대를 어찌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빨리 쫓아가 보거라. 신전 주위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고하 무리가 메두사와 전투를 시작하면 그 때 천지의 불꽃을 찾는게 좋을 것 같구나. 영혼 상태만 아니라면 다른 방법도 있겠지만…지금 상태로는 그들에게 들키지 않게 기척을 숨기고 천지의 불꽃을 찾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게다.”
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검은 송곳을 저장반지 안으로 넣은 뒤 신속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당연히 매의 날개를 이용하면 더 빨리 이동할 수 있었지만, 한낮에 하늘을 가르고 이동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땅에 붙어 가게 되면 비록 속도는 조금 느리더라도 약로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
준은 그 상태로 몇 시간을 미친 듯이 달려 메두사의 신전으로 향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뱀 인간들과 마주쳤지만, 누구도 약로의 도움을 받아 기척을 숨긴 준을 발견하지는 못 했다.
그렇게 기력의 조각을 삼키며 달리고 또 달려 결국 해질 무렵이 되자 온통 모래뿐이었던 바닥에 돌조각이 드문 드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도에 그려진 표식대로라면, 암석 지대가 나타난 것은 메두사의 신전이 위치한 도시가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준은 조심스럽게 커다란 돌 뒤로 달려가 몸을 숨긴 뒤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기력의 조각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두 다리가 돌덩이처럼 굳어 있었고,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파왔다.
하지만 대지의 불꽃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그였으니,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었다.
……
준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걸음을 옮겨 메두사의 도시 가까이 다가갔다. 성문은 꽉 닫혀있었고, 성벽 주위에는 무장한 호위대로 가득했다. 도시 위로는 까만 새들이 날아다니며 약간의 이상만 보여도 경보를 울리고 있었다.
‘메두사의 친위부대인가…난 상대도 되지 않겠어.’
준은 가볍게 쓴 웃음을 지었다.
“일단 여기서 조용히 기다리자. 고하 일행이 도착하면 그 때가 시작이다. 안에서 대지의 불꽃의 기운이 희미하게 느껴지는구나. 제대로 왔어.”
소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저 안에 대지의 불꽃이 있다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