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뜻밖의 구원자
준은 황급히 몸을 뒤틀며 가까스로 뱀의 공격을 피해냈다.
잡으려는 건지 말려는 건지 알 수 없는 이런 공격도 벌써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었다.
하지만 월녀가 손을 젓자 청색 뱀이 준에게 다시 날아들었고, 이번에는 준의 등에 강력한 충격이 전해졌다. 아마도 이번에는 진심인 모양이었다.
“헉…!”
강한 충격을 받자 매의 날개가 사라지며 문신으로 변하고, 결국 준은 비명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아악!!”
퍽!
그리고 순식간에 소년 하나가 묵직한 소리와 함께 모래 언덕에 쳐박히고 말았다.
“꼬마야, 왜 아픈 꼴을 자초하고 그러니. 난 널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퉤! 퉤!”
준은 버둥거리며 모래속에서 머리를 빼낸 뒤 입 안에 가득찬 모래를 뱉어냈다.
그 사이 월녀는 이미 준의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우씨…!”
소년은 오기가 치밀어 올라 저장 반지에서 검은 송곳을 꺼내들며 죽기 살기로 뱀여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쾅!
“호호, 우리 꼬맹이가 화가 났나보네?”
하지만 월녀는 사력을 다한 준의 일격을 한손으로 가볍게 받아냈다.
곧이어 그녀가 손바닥을 살짝 흔들자 수 천 줄기의 청색 빛이 다시 수 천 마리의 가느다란 뱀으로 변해 검은 송곳을 칭칭 동여맸다.
준은 즉시 자신의 무기를 버리고 바람처럼 움직여 뱀 여인의 가슴팍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태초의 힘!”
“어머! 재주가 많네. 이건 좀 위험하겠어.”
하지만 준의 주먹이 몸에 닿기 직전, 그녀의 몸이 뱀처럼 기괴하게 뒤틀렸다.
그녀는 유연하고 우아하게, 그리고 섬칫한 몸동작으로 준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내며 준의 코앞에 백지장처럼 새하얀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월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피처럼 붉은 입술을 내밀어 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다시 준의 주먹을 피했다.
“윽…”
준은 순간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황급히 저장반지에서 해독제를 꺼내 입에 넣었다.
‘젠장. 입술에도 독이…’
“어머? 내 독을 해독한 거야? 돈도 많은 꼬맹이인가보네. 내 독을 해독할 수 있는 해독제라면 꽤 비쌀 텐데 말이야.”
이번만큼은 월녀도 진심으로 놀란 눈치였다. 그녀는 자신의 독이 효과를 보지 못한 것이 몹시 자존심이 상했는지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 뜨렸다.
“흥,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거절한다면 할 수 없지.”
준은 월녀의 눈에서 진심으로 살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자 더욱 마음이 다급해졌다.
‘스승님, 저 진짜 저 여자 못 이겨요. 이러다 정말 죽는다니까요!’
그 때,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약로의 목소리가 준의 머릿속에 전해졌다.
‘녀석, 조급해 하지 말거라. 곧 너를 구하러 누군가가 올 것이야. 그리고 이제 한동안 나를 부르지 마라. 지금 이리로 오는 놈들 중 하나가 영혼 탐지능력이 아주 뛰어나니, 내가 너와 대화를 하게 되면 내 존재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약로는 그 말을 끝으로 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약로가 급히 말을 마친 후 다시 침묵 속으로 들어갔다.
‘스승님? 스승님……?’
정말이지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미 눈앞에서는 투왕급 뱀 여인이 진심으로 자신을 죽이려 들고 있는데, 준의 유일한 희망이 감감무소식이 되어버린 것 이다.
“됐어. 꼬마야, 이제 누나랑 가자……“
월녀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준에게 바짝 다가섰지만, 준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둘 사이에는 호랑이와 토끼, 그 이상의 격차가 있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질 않았다.
하지만 월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 하는 준을 앞에 두고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반대쪽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하하! 정말로 뱀인간이 있네. 그것도 꽤 센 녀석인데?”
“허허…그러게.”
고개를 치켜든 이준은 하늘 위에 나타난 두 그림자를 보며 눈이 점점 커졌다.
게다가 월녀의 표정으로 보아 상대는 월녀보다 강한 것 같았다.
하늘 위의 검은 점은 점점 커지더니 어느새 온 몸이 옥색으로 된 커다란 마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역시 사람이 있었군……”
잠시 후 호탕한 웃음소리와 함께 아홉 개의 그림자가 마수 위에서 뛰어내렸다.
‘투령 다섯…투왕 셋에 투황 하나?’
눈앞에 서 있는 무리들을 본 월녀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자를 두 눈으로 훑어보다가 곧장 몇 십 미터 뒤로 몸을 날렸다.
“흥…평소에는 한 명도 보기 힘든 강자들이 웬일로 이렇게 모이셨을까.”
“하하. 생각치도 못하게 사막에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투왕 레벨의 강자를 만나는군요. 아가씨께서는 뱀인간의 8대 부족의 수장쯤 되시나요?”
월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오자, 중년의 사내 하내가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이렇게 많은 강자들을 이끌 수 있다니…”
준을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상황을 계속해서 지켜봤다.
월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중년의 사내는 상당히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했으며, 전신에서 풍기는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고상하고 기품이 있어보였다.
준은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옮겨 검은 망토를 두른 투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내는 얼굴을 덮은 망토 사이로 계속해서 자신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냐? 어째서 깊은 밤 우리 종족의 영역까지 발을 들였지? 인간은 이곳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을텐데?”
월녀는 짐짓 싸늘한 표정을 지어보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공포스러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하하, 중요한 용건이 있어서 이곳까지 발을 들이게 되었으니, 귀하께서 저희를 각 부족의 여왕님에게 안내해 주실 수 있겠는지요?”
“여왕 폐하를 만나고 싶다고?”
뱀족의 여인은 싸늘하게 웃으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흥…이미 우리 뱀 인간들과 너희 인간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피를 피로 씻는 전쟁을 반복해 오지 않았나? 웃기지도 않는군.”
그러자, 공중에 떠있던 몸집이 우람한 사내가 즉시 코웃음을 쳤다.
“하, 스승님!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저들과 대화라니요! 저 여자는 과거에 가한 제국과 뱀 인간들이 전투를 치를 때 루이와 대결했던 자입니다!”
사내가 ‘루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자, 월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루이? 아, 지난 전투에서 번개 속성 공법을 수련했던 그 늙은이 말이야? 그때 몸에 있던 독은 지금쯤 어떻게 잘 해독됐나 모르겠네.”
“흥! 덕분에 루이는 불구가 됐지…!”
사내는 차가운 표정으로 눈 앞에 서있는 뱀 여인을 위아래로 훑어본 뒤 다시 중년의 사내를 바라봤다.
“선생님, 저 여자와는 대화가 불가능합니다. 괜히 시간을 주지 말고 지금 즉시 죽여버리는게 낫습니다.”
‘선생님’이라 불린 중년의 사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원, 제논.”
사내의 입에서 둘의 이름이 나오자, 건장한 사내와 허약해 보이는 노인 하나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이럴수가…가한 제국 10대 강자인 태원과 제논이었어?’
준은 자리에 나타난 사람들 중 두 명의 이름을 듣자마자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식은 땀을 흘렸다.
“호오…가한 제국의 십대 강자 중 둘이라…”
월녀는 굳은 표정으로 염력을 끌어올리며 입을 열었다.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상황이 더 심각했던 것 이다.
‘빌어먹을…가한 제국의 10대 강자들이 나란히 무리지어 이곳까지 왔단 말이지…보통 일이 아니야. 어서 여왕님께 이 사실을 알려야 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월녀는 즉시 전력을 다해 가느다란 두 손으로 기이한 손도장을 찍어내며 뱀 꼬리로 바닥을 두드렸고, 그 순간 평온했던 모래언덕이 폭발하며 파도 모양의 모래 폭풍이 8명의 사내들을 덮쳤다.
“하!”
그러나 태원 역시 십대 강자의 하나였으니, 월녀의 공격을 가만히 보고 있지는 않았다.
그가 고함을 지르자 은색의 음파가 퍼져나가며 모래 폭풍을 상쇄시켰고, 동시에 제논이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곧이어 태원이 모래 폭풍을 무력화 시킨 뒤 광폭한 기세로 걸음을 옮기니, 사막 곳곳에는 폭탄을 맞은 듯 거대한 모래 구덩이가 곳곳에 생겨났다.
“흥!”
월녀 역시 이에 대항해 이를 악물고 손을 휘저어 염력을 뿜어냈고, 잠시 후 그녀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에너지가 두 마리의 푸른 뱀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만들어 낸 푸른 뱀은 전에 준이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온몸에 단단한 비늘이 덮혀 있을 뿐 아니라 머리 아래쪽에 달린 거대한 두 개의 손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반짝이고 있었고, 두 명의 투왕이 가한 일격을 가볍게 막아낸 뒤 흉흉한 기운을 뿜어냈다.
“저게 바로 뱀 인간들의 독자적인 비술이군…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야.”
중년의 사내는 월녀가 만들어 낸 뱀이 무엇인지를 알아본 듯 무거운 표정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녀가 만들어낸 뱀은 뱀 인간들이 마수의 영혼을 꺼내 만들어 낸 것으로, 마수가 생전에 가지고 있던 본연의 기술을 가진 채로 주인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일종의 에너지 생명체였다.
“장로님, 두 사람만으로는 어려울 것 같은데, 저희가 나서야 할까요?”
한 남자가 중년의 사내에게 질문을 던지자, 그는 조용히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투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강자가 천천히 고개를 젓자, 중년의 사내가 입을 열었다.
“됐다. 태원과 제논이면 충분해.”
“네!”
세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준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투왕 레벨의 전투구나…’
쾅!
또 다시 격렬한 폭발음과 함께 모래가 흩날리고, 그 사이로 새파랗게 질린 월녀의 모습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녀와 맞서고 있는 두 강자는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상태였으니, 상당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잡것들…!”
쉭…!
잠시 후, 월녀가 날카로운 숨소리와 함께 손을 움직이자, 태원의 안색이 급변했고, 제논 역시 황급히 손을 뻗어 염력을 뿜어냈다.
하지만 제논의 염력이 닿기도 전에 땅바닥에서 폭발이 일어나더니 진한 녹색의 에너지가 소용돌이 치며 거대한 뱀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쳇…골치 아프게 됐군.”
거대한 뱀들이 사방을 기어 다니기 시작하자, 검은 망토를 입은 자를 제외한 모든 강자들이 뱀을 향해 공격을 뿜어냈다. 그러나 결국 상당히 많은 수의 뱀이 모래 안으로 파고 들어가는데 성공했고, 이 광경을 바라보던 중년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하아…역시 사막에서 뱀 인간을 상대하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구나. 이런 기술은 차마 어찌할 도리가 없군.”
이 광경을 바라보던 준은 온 몸에 비라도 맞은 듯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휴…저런 여자에게 쫓긴거란 말이야?’
하지만 준이 식은 땀을 닦기도 전에 그의 눈 앞에 거대한 녹색 뱀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젠장!”
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멀찍이 떨어져있는 강자들을 바라보았지만, 그들은 일면식도 없는 소년 따위를 위해 나설 마음은 조금도 없는 듯,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과 뱀을 바라보고 있을 뿐 이었다.
하지만 그 때…전혀 예상 밖의 인물이 움직임을 보였다. 여태까지 자신의 일행이 전투를 벌일 때도 팔짱을 끼고 미동조차 하지 않던 검은 망토의 강자가 움직인 것 이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천 자락이 바람에 너울거리며 그 모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준과 뱀 사이에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나타나 단숨에 녹색 뱀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쾅!
그리고 그가 성난 기세로 발을 한번 구르자, 강렬한 염력이 모래층을 파고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 여 미터도 넘게 떨어진 곳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