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타르 사막의 안쪽
준은 연화대를 거친 불 속성의 에너지가 가진 놀라운 순도에 감탄을 금치 못 했다.
연화대를 거친 불꽃들은 단순히 그 크기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정제되고 또 정제되어 조금의 잡스러운 기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준은 정신을 집중해 정제된 불속성의 에너지와 푸른 에너지를 분리시켜 보았다.
하늘 사자의 불꽃을 흡수할 때 호된 맛을 보았기 때문에, 푸른 불꽃에도 뭔가 위험이 있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른 불꽃에는 별 다른 위험이 없는 듯 했고, 준은 그제서야 안심하고 자신의 회오리속에 푸른 불꽃을 밀어넣었다.
준의 수련은 늦은 밤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마지막 한 줄기 에너지까지 자신의 염력 회오리에 밀어 넣은 준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온 몸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놀랍게도 하룻밤 사이 그의 염력 회오리에는 또 다른 물방울이 생겨나고 있었다.
조금 더 정신을 집중하자, 염력 회오리가 더욱 커지며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천천히 눈을 뜨자 그의 눈동자에 보라색 빛이 스쳐 지나가고, 준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연화대 위에서 일어나 새로이 얻은 보물을 조심스럽게 저장반지 안으로 집어 넣었다.
“이런…하룻밤 사이에 2성 무투사가 되어버렸네.”
준은 검은 송곳을 꺼내든 뒤 저장반지 속에서 상처 치유약을 비롯한 연금 비약들을 줄줄이 꺼내들었다.
“흠…”
그는 조용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연금 비약들을 확인한 뒤 검은 송곳을 메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바깥은 아직 완전히 동이 트지 않은 상태로, 지평선 먼 곳에서 흐릿하게 태양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련님…이제 가시는 거예요?”
준은 작은 길 끝에 서있는 조그마한 그림자를 발견하고는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예린아, 아쉽지만…나는 꼭 해야할 일이 있어.”
예린은 비취색 눈을 맑게 빛내며 준을 올려다보았다.
“다시 돌아오실 거죠?”
“하하, 당연히 돌아와야지. 조만간 다시 보게 될거야. 그리고…다른 사람들 눈치보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해 살아. 너는 아무 잘못이 없어. 그리고 행복하게 살 권리도 있어. 그러니까 절대로 기죽지 말고. 알았지?”
“네!”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예린의 신비한 눈동자에 눈물이 맺히자, 준은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은 뒤 몸을 일으켰다.
“하하, 그럼 난 이만 가야겠다. 형들한테 미안하다고 대신 좀 전해줘.”
작은 길에 우두커니 선 예린은 어둠 속에서 점점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팔뚝 위에 있는 조그마한 마수를 만지작거렸다.
* * *
한편 용병단의 높은 건물 위에서는 두 개의 그림자가 커다란 검을 메고 걸음을 옮기는 소년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 * *
준은 여느 때처럼 사정없이 내리쬐는 태양을 온 몸으로 받으며 모래 언덕 위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지도를 펼쳐들었다.
“지도를 보니 타르사막 깊은 곳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뭔 놈의 사막이 이렇게 큰 거야!”
매의 날개와 지도가 있음에도 타르 사막의 외곽에서 안쪽까지 오는 데는 보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현재 지도 위에는 총 여덟 곳의 빨간 점이 있었는데, 그 점들은 뱀인간들의 군락지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곳들만을 표시해 둔 것 이었다.
공교롭게도 사막의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지름길과 빨간점이 선명하게 교차하고 있었다.
“젠장…”
뱀인간은 부족 생활을 하는 종족으로, 빨간점이 찍힌 군락지에는 보통 투령이나 투왕급의 강자를 보유한 부족이 서식하고 있었다.
“여긴 무리야. 돌아서 가야겠어. 아으 젠장! 게다가 물도 보충해야 하는데…”
준은 다시 한번 지도를 꼼꼼히 살피며 오아시스를 찾아보았다.
“흠, 젠장…오아시스 주변에도 뱀 인간 투성이야.”
하지만 반경 50km 이내에 오아시스는 그 곳 뿐이었다. 게다가 지금 준이 가진 물로는 다른 곳까지 갈 수 없었다.
“좋아. 뱀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하는 수밖에 없군.”
그리고 다시 세 시간 이상을 걸어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무렵이 돼서야 그는 겨우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준은 잠시 몸을 감추고 뱀인간의 흔적이 없는지를 살핀 뒤 살금살금 오아시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오아시스에 가까워질수록 피부에 닿는 공기의 느낌이 점점 시원해 지고 있었고, 준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핀 뒤 전력으로 오아시스를 향해 달려갔다.
오아시스 주변은 온통 금빛 모래로 가득한 사막과는 달리 푸르른 나무와 풀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예상 밖으로 물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물을 찾지 못하여 살짝 짜증이 나려는 순간…준의 귓가에 희미한 물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은 신이 나서 싱글 벙글 웃으며 물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물소리가 흐르는 곳으로 향하는 길에 여자 뱀인간들이 무기를 들고 서 있었던 것 이다. 게다가 자리에 있는 여자 뱀인간들은 대부분이 무투사 수준의 강자였다.
준은 주위를 한 돌아본 뒤 최대한 숨을 죽이고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둑어둑해진 날씨 덕분인지 그녀들은 준을 발견하지 못 했고, 준의 얼굴에는 다시 미소가 번졌다.
준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맑고 깨끗한 호수로, 사막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아름다웠다.
‘됐어…물을 담아서 얼른 도망가야지.’
그러나 준이 물가로 다가서는 순간…무언가가 물속에서 튀어나왔다.
물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눈에 띄게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로, 물에 젖어 길게 늘어진 긴 머리가 하얀 피부를 더욱 도드라지게 하고 있었다.
준은 물속에서 튀어나온 여자를 발견하자마자 핏기가 가시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예민한 영혼 감지력으로도 상대가 어느 정도 강자인지를 평가할 수 없었던 것 이다.
그리고 현재 준의 영혼 탐지 능력으로 상대의 힘을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은…상대가 투령 이상의 강자라는 것을 의미했다.
준은 사색이 되어 숨소리조차 내지 못 하고 가만히 웅크려 있었다.
바로 그 때, 호수에서 나타난 여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꼬맹아, 종족을 불문하고 여자의 몸을 훔쳐보는 건 나쁜 짓이란다.”
“젠장!”
새하얀 피부를 가진 뱀 인간은 물로 된 화살을 만든 뒤 입을 벌려 가볍게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초록색 독액이 화살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독을 품은 물화살이 준을 향해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슉-!
준이 몸을 날려 화살을 피하자, 대신 화살을 맞은 나무가 눈 깜짝할 사이에 말라 비틀어졌다.
“하하, 누…누님. 왜 이러십니까. 저는 그냥 지나가는 행인이랍니다.”
이준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뱀 인간족의 여인을 향해 어색하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호호, 누님이라니…귀여운 아이네.”
잠시 후 그녀가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움직이자, 사방에서 오싹한 기운이 준을 덮쳐오는 것이 느껴졌다.
준은 심상치 않은 위력을 느끼고는 황급히 보라색 불꽃으로 자신의 몸을 보호했다.
팍!
그에게 날아든 것은 바로 독사였다.
“어머, 실력도 있구나. 하지만 이 숲속에 독사가 몇 마리나 있을 것 같아?”
타버린 작은 뱀을 차갑게 바라보던 뱀 인간족의 여인이 입술을 살짝 움직이자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고, 그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숲속에서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준의 사방팔방에 독사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월녀님…죽여 버릴까요?”
“호호, 급할 것 없어…이곳까지 찾아온 인간은 오랜만이라 반갑기까지 한걸?”
월녀라고 불린 뱀여인은 요염한 웃음을 흘리며 언덕으로 올라왔다. 물가를 벗어난 그녀의 하반신은 그녀가 인간이 아님을 다시 한 번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가 물가를 벗어나자 두 명의 뱀 여인이 나타나 월녀의 몸 위에 검은색 도포를 입혀주었고, 월녀는 귀족의 여식처럼 우아하고 도도한 손짓으로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준을 바라봤다.
“꼬맹아, 이 누님에게 왜 여기에 왔는지 말해줄래? 인간이 타르 사막의 이렇게 깊숙한 곳까지 나타난 게 참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설마 요즘 가한제국에서는 너 같은 꼬맹이까지 첩자로 쓰니?”
준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한껏 억울한 표정을 지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아이 참, 아름다운 누님께서 왜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하실까요. 정말로 지나가는 행인입니다. 그런데 물이 떨어져서요…안 그러면 이렇게 위험한 곳에 들어올 리가 없잖아요.”
“호호, 그래, 확실히 첩자는 아닌 것 같네.”
월녀가 새하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짓자, 준은 즉시 염력을 끌어올려 발을 굴렀다.
“하하! 고마워요! 평범한 행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어딜가!”
하지만 주위에 있던 뱀 여인 중 하나가 번개처럼 나타나 준의 얼굴 앞에 칼을 들이밀었다.
‘대투사!’
준은 사력을 다해 검은 송곳을 휘둘러 자신의 얼굴 앞에 나타난 칼날을 내리쳤다.
쿵!
그러나 검은 송곳은 가녀린 뱀 여인의 몸을 건드려 보지도 못 하고 애먼 땅을 내리찍었을 뿐 이었다.
“호호, 이왕 온 김에 조금 더 있지 그래? 누나랑 같이 우리 부족에 놀러 가지 않을래? 생각보다 좋은 곳 이란다.”
“아닙니다. 누님. 꼬리는 제 취향이 아니라서요.”
“어머…거절이야?”
월녀가 웃으며 손을 들자 사방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준은 살기를 느끼자마자 매의 날개를 펼친 뒤 폭풍걸음을 사용해 단숨에 하늘로 달아올랐다.
“예쁜 누님이 왜 이렇게 무섭게 굴고 그래요! 저는 갑니다!”
월녀는 잽싸게 허공을 가로지르며 달아나는 준의 등 뒤에 솟아난 날개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염력날개는 아닌데…정말 재미있는 꼬마구나?”
그녀는 흥미가 동한 듯 주위를 돌아보더니 가볍게 손을 저었다.
“너희들은 먼저 돌아가. 나는 저 재미난 꼬마의 정체를 좀 알아봐야겠다.”
월녀의 한마디에 주위에 있던 뱀 여인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숲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그녀는 잠시 보라색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가는 준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청색의 날개를 펼쳤다.
잠시 후, 그녀의 날개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빠른 속도로 준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 * *
조용한 사막 위.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허공을 가로지르고, 어슴푸레한 달빛 사이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날아올랐다.
“젠장. 이 여자, 왜 이렇게 끈질겨!”
등 뒤에서 전해지는 강한 힘을 느낀 준은 머리를 돌려 자신을 뒤쫓는 뱀 여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여유롭고 장난스럽게 준을 쫓고 있었다.
’스승님…!’
준은 벌써 몇 번이나 스승을 부르고 있었지만, 약로는 도통 답이 없었다.
“여보세요? 스승님? 영감님? 지금 투왕이 따라오고 있는데요? 저 죽을 것 같은데요?”
또 다시 아무런 답이 없자, 준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기력의 조각을 꺼내들었다.
월녀는 준을 잡을 마음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뭐가 그리 재밌는지 연신 웃으며 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꼬맹아, 그냥 누나랑 같이 우리 부족에 가자니까!”
“아휴, 누님! 정말 왜 그러세요! 저는 빼빼 말라서 먹을 것도 없어요! 힘이라면 뱀인간들이 훨씬 세잖아요! 노예로도 못 쓴다니까요!”
벌써 몇 번째 이런 무의미한 대화가 반복되고 있었다.
월녀는 여전히 술래잡기라도 하듯 느긋하게 준을 쫓고 있었고, 그녀가 손을 뻗자 다섯 줄기의 청색 빛이 뿜어져 나와 다섯 마리의 뱀이 되어 준에게 날아들었다.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