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땅굴의 끝
정은 예린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리고 싶었지만, 온 몸에 퍼진 충격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두 눈을 빤히 뜬 채 거대한 뱀의 혓바닥이 가녀린 어린 것의 몸에 가 닿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놈은 죽음의 냄새가 가득한 시뻘건 혀로 예린의 작은 손을 핥으며 준을 바라봤다.
“저 자식이!”
쌍두사는 준과 눈이 마주치자 보란 듯이 웃으며 자신의 혀를 칼날처럼 단단하게 만들어 예린의 가슴을 향했다.
“아!”
그리고 예린의 아름다운 비취색 눈동자에 시뻘건 혓바닥이 가득 차자…공포를 이기지 못한 예린은 나지막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바로 그 때 예린의 비취색 눈동자에 에메랄드색의 점 세 개가 선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예린의 눈동자 속에 나타난 세 개의 점은 점점 또렷하게 형태를 갖추더니, 이내 세 송이의 초록색 꽃 모양으로 변화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에 담긴 신비한 초록색 꽃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와 눈앞의 마수를 환하게 비추자, 갑자기 놈의 눈이 일찍이 보인 적 없던 공포로 물들었다.
신비한 빛은 마수의 몸을 타고 천천히 이동해 놈의 이마에서 멈춰섰다. 그 빛은 손바닥만한 크기로 변하더니, 영롱한 빛을 내뿜으며 쌍두사의 머리에 두 송이의 꽃 문양을 남겼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예린의 눈동자 속에 있던 작은 꽃망울이 빠르게 사라지고 다시 옥색 눈동자로 돌아왔다.
곧이어 예린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잠이 들 듯 땅에 털썩 쓰러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린이 쓰러진 뒤 쌍두사는 온순하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가만히 소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기랄!”
황급히 날아온 준은 검은 송곳을 높이 치켜들어 즉시 마수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키이이…!”
쌍두사는 비늘이 깨지고 피가 분수처럼 튀어오르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커다란 몸을 돌려 준을 노려보다가 다시 용암 호수 속으로 몸을 날렸다.
준은 용암 검은 송곳을 굳게 움켜쥔 채 황급히 달려가 예린의 코 끝에 손가락을 갖다댔다.
그는 자신의 손 끝에 와닿는 따스한 숨결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상처 치유약을 꺼내 예린의 입에 부어 넣었다.
준은 예린을 들어 안은 뒤 얼른 통로로 걸어가 부상을 당해 창백해진 형에게도 상처 치유약을 건넸다.
“형! 괜찮은거야?”
“그래, 큰 부상은 아니야. 걱정하지마라.”
형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이준은 예린을 꼭 끌어 안은 채 벽에 기대어 앉았다.
“후…아직 천지의 불꽃은 못 찾았어. 형은 먼저 예린이를 데리고 나가줘. 이곳은 너무 위험해.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형도 봤잖아. 저 놈은 내 상대가 못 돼.”
방금 전까지 동생의 놀라운 실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이정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가 여기 있어 봤자 너에게 짐만 되는 것 같으니 나가는 게 좋겠구나. 하지만…이 곳은 너무 넓은데다가 사방이 불꽃 천지니… 천지의 불꽃을 찾는 게 쉽지는 않겠어.”
“응…게다가 너무 시간을 오래 끌면 여러모로 복잡해질 것 같아. 최대한 빨리 찾고 나갈게.”
“으으으…”
그 때, 나지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예린이 눈을 떴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가녀린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어루만지며 입을 열었다 .
“도련님, 저…그 불꽃이 어디 있는 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뭐라고?”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두 형제는 거의 동시에 예린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소녀는 아무 말 없이 웃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통로 끝으로 달려가 갑자기 누군가를 불러내듯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와!”
그리고 예린의 목소리가 떨어지자 조용하던 마그마 호수 속에서 커다란 마수가 갑자기 몸을 불쑥 일으키더니 통로 쪽으로 천천히 헤엄쳐 왔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준은 깜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키며 시커먼 송곳을 움켜 잡았다.
“도련님! 때리지 마세요. 이제 다시는 우리를 공격하지 않을 거에요.”
예린은 준의 행동을 보자 다급히 달려와 새끼 강아지를 감싸는 어린 아이이 같은 표정으로 둘 사이를 막아섰다.
“어떻게 된 일이야?”
마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준은 마수의 눈에 깃든 온화한 빛을 보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도 잘 모르겠어요…하지만…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뭐?”
이준은 갑자기 온순해 진 마수를 훑어보다 놈의 이마에 생겨난 기이한 꽃 문양에 시선을 멈췄다.
바로 그 때, 약로의 목소리가 준의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허허허…대단하구나.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네 놈은 아무래도 천운을 타고 난 것 같구나.’
‘네? 예린이가 뭔가 특별한가요?’
‘재난독체만큼이나…아니, 그 이상으로 희귀한 체질이지. 저 아이의 눈동자는 뱀의 눈동자라고 불리는 것으로…아주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물건이다. 인간과 뱀 인간의 혼혈인 아이들 중에서도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진귀한 눈동자지. 그리고 뱀의 눈동자의 힘이 완전히 개화되면 그 눈을 바라본 사람에게 끝없는 환각을 선사할 수 있고, 뱀 마수를 강제로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저 쌍두사와 만나면서 그 능력이 싹 트기 시작한 것 같구나.’
‘하아…’
이준은 너무나 어이없는 상황에 입을 쩍 벌린 채 고개를 숙여 예린을 내려다보았다.
‘투령 레벨의 애완 마수라니…어이가 없군…’
“도련님…이 아이가 천지의 불꽃이라는 게 어디 있는지 알고 있어요.”
예린이 마수를 가리키며 이준을 향해 웃어 보이자, 준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안다고? 어디에 있대?”
“음…”
예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용암 호수의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이 녀석 말로는…이 아래에 있대요.”
준은 예린의 손가락이 가리키고 있는 곳을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
‘하하, 역시. 왜 천지의 불꽃을 느끼지 못하나 했더니… 이 마그마가 그 기운을 가리고 있었던 게로군!’
하지만 약로는 그제야 수수께끼의 답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스승님, 여기에 내려갈 수 있어요? 천지의 불꽃이고 나발이고 그 전에 홀랑 타버릴 것 같은데요?’
‘하하, 이화를 얻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 어때? 뛰어들 수 있겠느냐?’
스승의 어이없는 제안에 준은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예린아, 네 새 친구한테 길을 좀 안내해달라고 할 수 있니?”
“아…네…”
예린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다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쌍두사가 온순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뒤 용암속으로 몸을 던졌다.
“하아…”
준은 용암속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마수를 바라보며 뒤통수를 쥐어뜯다가 마음을 굳힌 뒤 드글드글 끓고 있는 용암 속으로 몸을 던졌다.
이준이 용암 속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이정은 새하얗게 질려 아래를 내려다봤다.
슉-!
마그마 속에서 쌍두사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하얀 불꽃에 둘러싸인 준이 잠시 고개를 내밀었다.
“다행이야. 걱정했던 일이 안 일어나서.”
동생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이정은 힘이 빠진 듯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준은 커다란 기포 하나가 자신의 얼굴에 튀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감았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용암이라 해도 약로의 백색 불꽃을 뚫을 수는 없었고, 준은 용암속을 헤엄치면서도 오히려 온 몸이 시원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준은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흐르는 마그마를 보며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녀석아, 서두르거라. 얼음 불꽃의 정수로 너를 보호할 수는 있지만, 마그마로부터 너를 지키는 데는 엄청나게 많은 영혼의 힘이 필요하단 말이다. 내가 힘이 빠지는 순간 재조차 남지 않을게야. 그러니 헛짓거리 하지 말고 어서 천지의 불꽃을 찾거라.’
용암속에 약로의 도움 없이 내던져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준은 쌍두사를 향해 다급하게 명령을 내렸다.
“야! 빨리 안내해달라고!”
하지만 쌍두사는 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커다란 머리를 들어 통로에 서 있는 예린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마지못해 방향을 틀었다.
* * *
깊은 곳으로 들어갈수록 준의 몸에도 서서히 열감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시나브로 재조차 남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초조하게 바닥을 향해 헤엄쳐 내려갔다. 발장구를 한번 칠 때마다 딱 그만큼 수명이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이준이 공포감으로 인해 점점 정신을 놓을 때 쯤, 약로의 진지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한 시간 반 안에는 반드시 돌아가야 한다!’
‘네?’
‘이놈! 정신 못 차리느냐! 주위를 둘러봐라!’
놀랍게도 주위의 붉은색 마그마에는 어느새 푸른색이 감돌고 있었다. 준은 스스로도 왜 그런 변화를 눈치 채지 못 했는지 의문이 들 지경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이것은 온도가 급속도로 높아져서 생긴 변화야. 이 정도 온도라면 내 불꽃으로도 힘들다.’
‘그럴 리가… 얼음불꽃의 정수는 천지의 불꽃 중에서도 11번째로 강한 불꽃이잖아요. 그럼 아래에 있는 그 이화가 스승님의 얼음불꽃의 정수보다 더 강하다는 뜻이에요?’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나는 지금 영혼상태라 얼음 불꽃의 정수가 가진 위력을 제대로 끌어낼 수가 없어. 그러니 지금 상태로는 한 시간 반이 한계다. 그러니 서둘러!’
약로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한 눈을 팔면 제 아무리 약로라 해도 준을 지킬 수 없는 것이 분명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자각한 준은 다급한 목소리로 쌍두사를 재촉했다.
“야, 아직도 많이 남았어? 얼마나 가야 해?”
쌍두사는 준의 목소리를 듣자 고개를 들어 몇 번인가 울부짖더니 갑자기 속력을 올렸다.
‘젠장! 저 놈이 내 말을 알아들으면 뭐해, 내가 저 놈 말을 못 알아듣는데…!’
마수의 행동에 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를 악물고 따라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의 마그마는 온통 푸른빛으로 변해있었고, 약로의 불꽃으로도 주위의 열기를 막아낼 수 없어 온 몸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젠장! 십 분 내로 천지의 불꽃을 발견 하지 못 하면 올라가야겠어. 이러다 시체도 못 찾게 된다고…’
쌍두사는 여전히 미친 듯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그러나 마침내 준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쌍두사가 긴 꼬리를 휘둘러 준의 허리를 낚아챘다.
놈은 꼬리의 짙은 붉은색 불길이 하얀색 불과 부딪쳐 사라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준을 놓지 않았다.
순간 준의 머릿속에 무시무시한 생각이 스쳤다. 지금 이 상태로 놈에게 조금만 더 끌려가면 자신은 그대로 녹아내리고 말 것 이다.
‘제기랄! 속았어! 이 교활한 자식!’
그리고 준이 손발을 허우적대며 몸을 빼내려는 순간, 그의 눈앞에 영롱한 푸른빛을 내뿜는 우아한 연꽃 한 송이가 그 오만한 자태를 드러냈다.
‘대지의 불꽃…?’
이준이 그 푸른 연꽃을 바라보고 있을 때 약로의 놀란 듯한 목소리가 갑자기 마음속에서 울렸다.
대지의 불꽃 천지의 불꽃 중에서 19번째에 속하는 물건으로, 땅속 깊은 곳의 불길 속에서 10년에 걸쳐 영혼이 만들어지고, 100년에 걸쳐 육신을 갖추며, 무려 천년에 걸쳐 연꽃으로 화하는 신비로운 물질이었다.
그렇게 1110년 만에 완성된 푸른색 연꽃의 중심부에는 푸른 불꽃이 생기는데, 그 불꽃은 화산 지대에 가까이가면 용암을 조종해 화산을 폭발시킬 수 있는 위력을 가진 불꽃이었다.
준은 약로의 가르침을 따라 의해 천지의 불꽃에 대한 정보를 달달 외우고 있었으니, 자신의 눈앞에 놓인 물건이 어떤 물건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스승님, 우리 찾은 거 맞죠?’
‘하하, 그런 것 같구나. 진짜 천지의 불꽃을 찾을 줄이야…19위라면 지금의 너에게 딱 좋다. 너무 강한 불꽃이라면 아까운 천지의 불꽃을 두고 돌아서야 했을 게다.’
‘그럼, 가 볼까요?’
‘그래, 어서 가까이 가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