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시험장의 열기
방을 나서자 가벼운 햇살이 기분 좋게 내리쬐었다. 아침이라 그런지 사막의 더위도 한풀 꺾인 듯 했다.
준은 예린과 용병단 내부를 거닐었고, 용병들은 준과 마주칠 때 마다 모두 가던 길을 멈추고 다정하게 인사를 했지만, 뒤에 선 예린을 볼 때마다 싸늘한 표정을 짓곤 했다.
심지어 어떤 용병들은 예린을 볼 때 마다 징그러운 벌레라도 보는 듯한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준은 사람들이 예린을 그렇게 바라볼 때 마다 마음이 아파왔다. 자신이 실력이 없다고 무시를 당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나마 자신은 좋은 시절도 있고, 나쁜 시절도 있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 아이의 일상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치의 동정도 없이 가혹한 나날의 연속이었으리라.
‘너무들 하는군…뱀 인간들이 인간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사실이지만…이 아이도 피해자인데…’
예린은 그 후로도 사람들과 마주칠 때 마다 몽둥이 찜질을 당한 개마냥 몸을 바들바들 떨며 시선을 떨궜다.
결국 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 쉬며 가던 걸음을 멈췄다. 준이 한숨을 내쉬자 예린의 얼굴은 또 다시 쓰러지기 직전의 환자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준은 자신의 한숨에 더욱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예린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말했다.
“예린아…저 사람들이 너를 괴롭히거나 싫어하는건 네 잘못이 아니야. 잘못은 불쌍한 어린 아이를 괴롭히는 저 사람들이 하고 있는거야. 그러니 죄 지은 사람처럼 행동할 것 없어.”
이준은 예린의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고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갔다.
예린은 이준의 말을 듣고 멍한 표정으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그녀의 눈동자 안에 또 다시 에메랄드 빛 점 세 개가 조용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 * *
“도련님, 일어나세요.”
바삭한 사막의 햇살이 내리 쬐는 아침, 예린은 개미처럼 작은 목소리로 준을 불러댔다.
“도련님…”
결국 속삭이듯이 스무 번 하고도 세 번을 부르자, 준이 눈을 떴다.
“도련님, 오늘은 사막의 칼날 용병단에서 3개월에 한 번씩 진행되는 시험이 있는 날이에요. 어제 저녁에 저한테 꼭 제 시간에 깨워달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준은 자신의 부탁대로 행동하면서도 눈치를 보며 변명을 늘어놓는 예린이 왠지 귀엽게 느껴져 피식 웃음을 지었다.
‘눈치 보는 건 쉽게 안 고쳐지는 모양이네. 그래도 이 정도면 장족의 발전이군.’
지난 며칠간 예린은 눈에 띄게 밝아져 있었고,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겁을 먹거나 기가 죽은 모습을 보일 때가 많았지만, 적어도 준이 무슨 말을 할 때 마다 눈물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거나, 사람들과 마주 칠 때마다 바들바들 몸을 떨며 구석으로 숨지는 않고 있었다.
“알아, 알아. 고맙구나. 그나저나, 매일 네가 도련님이라고 부르면서 시중을 들어주니 다시 혼자 수련을 떠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막막하구나.”
준이 농을 던지자, 예린은 수줍게 웃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약 도련님이 원하신다면 예린은 도련님을 따라 영원히 이렇게 시중을 해 드릴게요.”
“하하, 나야 좋지. 하지만 여기에 머물 수 있는건 기껏해야 열흘 정도일거야. 열흘이 지나면 나는 또 사막에 들어가야 하고, 수련을 해야 해. 내 목숨도 장담하기 어려우니까…지금의 나로서는 너를 지켜줄 수가 없어. 그래도 가기 전에 꼭 형님들에게 너를 잘 부탁하고 가도록 하마.”
이준의 말을 듣자 예린은 잠시 실망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밝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됐어요, 도련님. 빨리 가요. 시험이 시작 됐을지도 몰라요.”
준이 검은 송곳을 움켜쥐자, 예린이 종종 걸음으로 달려가 방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가자 준처럼 늦잠을 잤는지 허겁지겁 시험장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준은 시험을 볼 생각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그들을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넨 뒤 느긋하게 훈련장으로 발을 옮겼다.
* * *
두 사람이 훈련장에 도착했을 때, 시험장 위에서는 이미 몇 백 명이 혼란스럽게 싸우고 있었고 시험장 아래의 사람들은 모두 흥분한 얼굴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심지어 어떤 곳에서는 마지막에 남을 다섯 사람이 누구인지 도박을 걸기도 하였다.
사막의 칼날 용병단의 규칙에 의하면, 3개월에 한 번씩 이런 시험이 치러지고, 시험에서 높은 성적을 받게 되면 소대장이나 분대장으로 승격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에서 공을 쌓다보면 대장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준과 예린은 시험장 밖 커다란 바위에서 흥미진진하게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구경하였다.
“도련님, 단장님이 오셨어요.”
준이 한창 재미있게 구경을 하고 있는 사이, 옆에 선 예린이 맞은 편 무대를 가리켰다.
“어?”
머리를 들어 보니 그 위에는 두 형이 앉아 있었고 그들 옆에는 사막의 칼날 용병단의 중진들이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둘째 형인 이찬은 준과 눈이 마주치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큰형인 이정에게 무언가를 속삭인 뒤 갑자기 시험장 안으로 몸을 날렸다.
“하하, 우리 막둥이가 얼마나 컸는지 볼까?”
이찬의 모습에 이준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큰 형에게로 눈을 돌리자 큰 형 역시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 이었다.
“하…형님도 참…”
준은 예린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손짓을 한 뒤 커다란 바위를 박차고 시험장 안으로 몸을 날렸다.
“둘째 단장님! 둘째 단장님!”
두 형제의 등장에 시험장 안이 후끈 달아 오르기 시작했다.
“하하, 형님! 오늘 단원들 앞에서 망신 당할 수도 있다구요!”
호기로운 막내의 발언에 시험장의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하하, 좋아! 왜 형만한 동생이 없다는 말이 있는지 보여주마!”
이찬이 환히 웃으며 손바닥을 뒤집자 긴 창이 그의 손에 나타났고, 그가 힘을 주자 은색 불꽃이 피어올라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런! 그 사이 더 강해지셨네.’
준은 이찬의 몸을 감싸는 은색의 염력 방어막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찬은 번개 속성의 염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번개 속성 염력의 특성상 공격력이 매우 높은데다가 종종 상대를 마비시키는 효과까지 가지고 있어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찬 역시 동생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보라색 불꽃을 바라보며 감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호오…신기한 불꽃이네. 우리 막내가 대체 어디서 저런 걸 구했을까.’
“시작하자!”
잠시 후, 이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둘의 몸이 동시에 움직였고, 두 사람은 발로 땅을 힘껏 밟으며 서로를 향해 튀어나갔다.
“도련님, 힘내세요!”
커다란 바위 위에서 얼굴이 빨개진 예린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큰 목소리로 준을 응원했다.
“하하, 단장님 보시기엔 둘째 단장님과 막내분 중 누가 이길 것 같아요?”
무대 위에서 설란이 시험장을 보고 웃으면서 물었다.
설란의 질문에 무대 위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이정을 바라봤다.
이정은 태연하게 찻잔을 들며 웃음을 지었다.
“글쎄…찬이는 이제 곧 5성 무투사가 될거야. 하지만 준이는 무투사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았지. 게다가 둘째의 번개 속성 무투기는 제법 강력하니까…물론 아직 막내의 보라색 불꽃의 위력을 확인한 적이 없으니 속단할 수는 없지만…열에 아홉은 아마도 둘째가 이기지 않을까?”
“그럼 둘째 단장님이 무조건 이기겠네요? 4성이나 레벨 차이가 나니까요.”
설란이 입을 삐쭉 하더니 실망한 듯 말했다. 그녀는 이찬이 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듯 했다.
“하하…"
하지만 정은 뜻 모를 웃음을 지으며 손끝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겠지만, 준이는 어릴 적부터 자신의 실력을 숨기는 것에 익숙해서 말이지…그 열에 하나가 문제지.”
은색과 보라색의 그림자가 시험장 위에 두 갈래의 길을 만들어 내고, 곧이어 경쾌한 소리와 함께 강력한 두 개의 기운이 충돌했다.
그리고 그 소리를 신호로 순식간에 두 사람 근처의 혼란스러운 싸움들이 정리되고 둘을 중심으로 큰 원이 만들어졌다.
준은 검은 송곳을 꽉 붙잡은 채 독사처럼 가만히 빈틈을 노리는 찬의 창 끝을 가만히 바라봤다.
팅!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든 은빛 섬광을 검은 쇳덩이가 가로막자, 이찬은 다시 한번 창의 손잡이를 힘껏 때렸다.
그러자 은빛 창이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다시 한 번 준을 향해 날아들었고, 창 손잡이를 통해 흘러들어간 염력이 검은 송곳으로 전해졌다.
“윽!”
그 순간 검은 송곳을 붙잡고 있는 소년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이런!”
준은 잽싸게 자신의 보라색 염력을 빠르게 움직여 사지를 마비시키려드는 전기 속성의 염력을 몰아냈다.
“준아, 형은 싸울 때는 봐 주지 않으니까 조심해!”
여유만만한 목소리와 함께 이찬의 손에 든 창이 이상하게 구부러지더니 은빛 창끝이 시커먼 칼날을 스치며 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독사의 춤!”
곧 이어 세 갈래 뱀 모양의 곡선이 서로 엇갈리면서 은빛 창끝이 ‘쉭’ 하고 뱀에게서나 나는 날카로운 숨소리를 내뱉었다.
“너무 하는 거 아니에요? 이준씨보다 레벨이 높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3격의 무투기까지 사용하다니……”
이정 옆에서 설란이 입을 삐죽거렸다.
“하하, 둘째 동생의 번개 속성 무투기는 짧은 시간 안에 승부를 보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이 불리해지니까.”
준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일격의 범상치 않은 위력과 변화무쌍함에 감탄하며 염력을 끌어올려 검은 송곳을 감쌌다.
챙!
날카로운 금속성과 함께 보라색 불꽃과 은빛 섬광이 엇갈리자, 땅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준은 형의 창 끝이 자신의 무기에 부딪히자마자 보라색 투기가 절반이나 깎여나가는 것을 보고 마른 침을 삼켰다.
팅!
그리고 준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도 전에 다시 한 번 경쾌한 소리가 울리더니 검은 송곳 위에 서린 보라색 불꽃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쿠웅!
하늘 사자의 불꽃이 사라지자 이찬의 창끝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유연하고 날카롭게 준을 노렸다.
캉!
경쾌한 소리와 함께 검은 송곳이 허공에서 빙글 빙글 돌다가 땅에 박히는 순간, 찬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녀석, 이제 끝났어.”
“후…”
이준의 무기가 손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보며 주위의 용병들 입에서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질렀다. 승부가 난 것 이다. 하지만 준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태연하게 발을 움직였다.
쾅!
다음 순간, 굉음과 함께 상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찬의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찬은 신속하게 창을 잡은 손을 뒤로 빼며 다시 한번 번개 속성의 염력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이준이 갑자기 뒤로 물러서다가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는 불끈 주먹을 쥐자, 강력한 흡입력이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왔고, 찬은 그만 균형을 잃고 말았다.
한 번 균형을 잃기 시작하니 찬의 몸은 마치 폭풍에 빨려드는 나뭇가지처럼 준을 향해 끌려 들어갔고, 준은 히죽 웃으며 다시 한번 발을 굴러 이찬을 향해 날아갔다.
“작은 형, 저 송곳은 내 무기가 아니야! 그리고 난 근접전이 제일 자신 있다고!”
퍽!
순식간에 동생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고 형의 가슴을 강타했다. 하지만 준의 주먹이 닿은 곳에서는 눈부신 은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