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형제들의 재회
모래바람성으로 돌아가는 동안 설란은 은근슬쩍 이준을 떠 보았지만 그는 매번 확실한 답을 하지 않고 애매하게 웃음을 흘릴 뿐 이었다.
하지만 준을 자세히 훑어본 설란은 눈앞에 있는 소년이 이정과 이찬이 늘 얘기하던 막내 동생이 맞다고 확신했다.
……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 새 타르 사막 동쪽에 위치한 커다란 도성의 윤곽이 나타났고, 설란 등은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래바람성의 경계는 제국 내부보다도 더 삼엄했는데, 성의 입구나 성내에는 언제나 전신무장을 한 사병들이 쉴 새 없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잠시 후 도성에 들어선 이준은 설란 등을 따라 남쪽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빛성의 이씨 마을과 비슷한 크기의 큰 마당이 눈에 들어왔다.
마당 밖에는 용병 몇 명이 무기를 든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는데, 깃대에는 한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고, 그 위에는 ‘사막의 칼날 용병단’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져 있었다.
“우리 사막의 칼날 용병단의 실력은 성내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요. 우리보다 강한 것은 사막 용병단 뿐이죠. 그 뒤로 폭풍 용병단과 우리 사막의 칼날 용병단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요.”
마당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설란이 옆에 선 이준을 향해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역시 형님들은 대단하구나…고작 몇 년 사이에…’
준이 형제들의 실력을 확인하고 흐뭇해하고 있는 동안, 한 사내가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 나와 설란을 맞았다.
“설란아, 다들 괜찮아? 방금 비호한테 들었는데 뱀 인간의 습격을 받았다며?”
“괜찮아.”
설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단장들의 행방을 물었다.
“단장님들 계셔?”
“응. 두 분 다 계셔.”
장정은 옆에 선 이준을 훑어보더니 반달눈을 만들며 활짝 웃음을 지었다.
“이 친구 이름을 들은 후에 두 단장님 모두 흥분하셔서 앉아 있지도 못하셔. 하하, 단장님들이 그렇게 기뻐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오랜만이야.”
준은 그 장정을 향해 머리를 가볍게 끄덕인 뒤 입을 가리고 웃고 있는 설란을 따라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골목을 몇 개 지나는 동안 사막의 칼날 용병단원들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이준을 보자마자 하나 같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수군거렸다.
“하하, 두 단장님께서 자주 동생 얘기를 하셨어요. 먼저 보낸 녀석이 벌써 소문을 냈나본데요?”
주위 용병들의 표정을 보며 설란이 입을 열자,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길을 돌아 조금 더 걸어가니 넓은 집이 하나 나타났고, 그 안에서 익숙한 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준은 저도 몰래 코끝이 시큰거렸다.
그는 옆에서 웃고 있는 설란을 향해 머리를 한번 숙인 뒤 천천히 대문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가 문을 열려는 순간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안쪽에서 문이 열리고 안에서 준과 닮은 청년이 나타났다.
눈앞에 나타난 소년을 본 청년의 얼굴에는 따뜻한 웃음이 가득 번져나갔다.
그리고 청년과 마주치는 순간, 준은 눈앞이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과거에 자신이 폐물 취급을 받을 때, 눈앞의 청년은 끝까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켜주려 자신을 비웃는 사람들과 싸웠고, 이후 가문의 규칙에 따라 벌을 받아 상처투성이가 되었음에도 풀이 죽은 자신을 끝까지 달래주곤 했었다. 형들은 자신을 위해 몇 번이고 매질을 감수했고, 덕분에 형들이 있는 동안만큼은 누구도 대놓고 준을 무시하지 못 했다.
“작은 형……”
손등으로 눈가의 눈물을 닦은 이준은 자신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하하, 준아! 진짜 찾아왔구나. 하하!”
사내는 동생의 몸을 으스러질 듯 꼭 끌어안았고, 그 덕에 준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작은 형, 아파. 좀 살살 해.”
“녀석, 훌륭한데? 네 몸의 이상한 문제는 다 해결이 된 거야?”
찬은 동생을 안은 팔을 푼 뒤 준의 몸을 위아래로 천천이 훑어봤다.
“응!”
동생이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찬은 즉시 준의 팔을 잡고 방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자, 들어가서 큰 형부터 봐야지. 지금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
방 안으로 들어가자, 하얀색 망토를 걸친 청년 하나가 환하게 웃으면서 안으로 들어온 이준을 반겼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밝은 그의 눈동자는 예리함과 지성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내 동생! 몇 년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큰 형!”
“우리가 출가한 후로 너도 이런 저런 일을 겪은 모양이구나.”
“많이 힘들기는 했지만…덕분에 많이 컸어.”
“하하, 잘했다. 사실 찬이 녀석은 너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고 그 동안 매일 같이 나를 원망했거든. 글쎄 이 놈이 말이야…”
“됐어, 됐어. 오랜 만에 이렇게 만났는데 김 새는 말은 하지 말자고.”
찬은 큰 형이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아는지, 손을 저으며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나저나, 방금 부하들이 그러던데, 너, 무투사가 됐다며?”
정의 말을 들은 이찬은 놀란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그들이 집을 떠날 때만 해도 준의 실력은 투사는커녕 염력 3,4단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사이에 무투사가 됐다니…도저히 믿기 어려운 소식이었다.
“응…얼마전에.”
“정말 대단한 녀석이야. 어떻게 그게 가능한거냐?”
“하하, 아직 멀었어. 이제 곧 약속한 3년이 다가오니까. 그 전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이 정도에 만족할 수는 없어.”
“약속?”
약속이라는 말에 이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설아 라는 계집 이야기를 하는거냐?”
“그 일은 내가 알아서 해결할게. 큰 형과 작은 형은 걱정 마시고 여기 세력을 더 발전시켜야지. 혹시 내가 앞으로 대단한 인물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형들한테 신세를 져야 될 지도 모를 텐데……”
이준이 너스레를 떨자 두 형들은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웃다가, 이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 앞으로 어떻게 되든 여기 너의 형들이 있다는 걸 잊지 말거라. 이곳은 우리가 만든 용병단이기도 하지만, 너를 위한 둥지이기도 하니까. 우린 언젠가 네가 꼭 우릴 찾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형들의 변함없는 따뜻한 말과 태도에 준은 수련을 떠난 이래 처음으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 * *
모래바람성에 도착한 첫 날 밤. 그간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던 이준은 처음으로 이정, 이찬과 기분 좋게 밤새 술을 마셨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준은 깨질 듯이 아파오는 머리를 만지며 천천히 몸을 일으킨 뒤 자리에 앉아 염력으로 몸속에 남은 술기운을 쫓아냈다.
한참 뒤, 술 기운이 완전히 달아나자 준의 검은 눈동자에 평소처럼 냉정하고 차분한 기운이 돌아왔다.
삐꺽-
그 때, 방문이 천천히 밀리더니 가녀린 그림자 하나가 살며시 들어 왔다.
그녀는 침대에 앉아 있는 이준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더니 급히 몸을 숙여 인사를 하고 다소 주눅이 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준 도련님, 일어나셨습니까?”
얼핏 보기에도 그녀는 자신보다 어려 보였고, 상당히 가냘픈 체구를 가지고 있어 겁을 먹은 표정이 더욱 부각됐다.
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이준 도련님, 저…”
그녀의 손에는 나무 대야 하나가 들려 있었다.
“하하, 이렇게까지 안해도 되는데…미안해, 형님들이 극성이네. 오랜만에 동생을 만나서 들뜨셨나봐.”
준은 침대에서 내려와 대충 얼굴을 씻은 뒤 머리를 돌려 소녀를 바라봤다.
“이름이 뭐야?”
“네?”
소녀가 깜짝 놀라더니 더듬거리면서 대답했다.
“저, 저는 예린이에요.”
“음…그래, 고마워!”
준이 수건을 받아 얼굴을 닦은 후 대야에 넣자, 예린은 황급히 대야를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이준은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은 뒤 검은 송곳을 집어 들었다. 그는 새삼스레 기분이 좋아져 실내에서 검은 송곳을 가볍게 휘둘렀다.
빠직…!
“아이고!”
하지만 그의 송곳 끝에 걸려 나무 받침대 하나가 순식간에 박살이 났고, 때 마침 문가에서 물을 버리고 돌아오던 예린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달려와 방을 치우려 했다.
“아…”
당황한 표정으로 뛰어오는 예린을 본 이준은 미안한 마음에 자신도 몸을 구부리고 떨어진 옷가지를 주으려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옷을 주으려던 준은 예린의 하얀 손목에 덮힌 푸른색 뱀 비늘을 보고는 그만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예린을 뚫어지게 보던 이준은 저도 모르게 예린의 두 발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뱀 꼬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작고 앙증맞은 두 발이 있을 뿐 이었다.
그 때, 옷을 줍고 있던 예린은 자신의 드러난 팔목을 보고는 얼굴이 창백해져 급히 옷소매를 내리더니 구석으로 도망가 보기에도 딱할 정도로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요. 일…일부러 놀래키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예린은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안쓰러울 정도로 겁을 집어먹은 소녀를 바라보는 준의 머릿속에 문득 뱀 인간에게 겁탈당한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스쳐 지나갔다.
뱀 인간들은 인간을 죽이고 재물을 훔쳐갈 뿐 아니라, 종종 인간 여자들을 겁탈하기도 했는데, 매우 드문 확률로 겁탈 당한 여자가 임신을 하여 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이거니와, 태어나더라도 보통 두 해를 넘기지 못 하고 죽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아이는 척 보기에도 열 서너살은 되어 보였다.
‘힘들었겠군…어린 것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었으면…’
준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큰 죄를 지은 사람마냥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아이를 보자 마음이 아려왔다.
그는 천천히 예린에게 다가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정말 아름다운 비늘이구나. 보석같아.”
예린은 자기 자신조차 흉물스럽게 여기는 비늘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준의 말에 귀를 의심했다.
“도련님은 안 무서워요?”
준은 그제서야 처음으로 예린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신비로운 녹색을 띠고 있었으며, 비취처럼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 깊은 곳에는 에메랄드 같은 작은 점 세 개가 반짝이고 있었다.
예린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준은 순간 머리가 멍해지는 것을 느껴 머리를 흔들었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봤을 때, 그 작은 점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뭐지…아직도 술이 덜깼나.”
머리를 절레절레 저은 이준은 예린의 옷소매를 내리고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고개를 떨구고 서 있는 예린을 바라보며 사뭇 다정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놀라게 해서. 오랜만에 형님들을 만나니 조금 들떴었나봐.”
준의 미안하다는 말에 예린은 또 다시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준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그녀에게 그것은 타인이 자신에게 건넨 최초의 사과였다.
“도련님, 며칠 동안 제가 도련님 시중을 들 거에요. 무슨 일이든 말씀만 하세요.”
그녀는 눈에 촉촉하게 맺히는 물기를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준은 다정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들이 뭘 하고 계신지 물어봐도 되겠니?”
“이정 단장님과 이찬 단장님께서는 용병단 일을 보고 계세요. 도련님께서 찾으시면 앞뜰에 있는 회의실로 모시고 오라고 말씀 하셨어요.”
“그래? 그건 나중에 하고, 나한테 용병단 구경을 좀 시켜줄 수 있을까? 어차피 형님들은 바쁠테니까.”
“네.”
준이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예린은 그 특유의 겁을 집어먹은 듯한 몸짓으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살포시 미소가 내려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