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3화. 우연한 만남
“저기에서 멀지 않은 곳이에요.”
사내가 가리킨 모래 언덕을 본 준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남자의 팔뚝을 붙잡고 발로 모래 바닥을 힘껏 밟았다.
쿠웅-!
그러자 모래 위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기며 둘의 몸이 번개처럼 사막을 가로질러 다른 모래 언덕 위에 올라섰고, 준은 또 다시 번개처럼 몸을 날려 다음 언덕에 안착했다.
사내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년을 바라보고 있는 사이, 준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모래 언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아래 쪽에는 열 몇 명의 용병들이 무기를 든 채 등을 붙이고 서 있었고 그들 주위로는 여덟 명의 뱀 인간이 보였다. 뱀 인간들은 사람 머리와 사람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커다란 뱀 꼬리가 있었다.
“호오…”
처음으로 뱀 인간을 본 준은 신기하다는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젊은…아니 선생님. 저 사람들이 우리 사막의 칼날 용병단의 분대입니다.”
소년의 실력을 확인한 사내는 존경스러운 눈으로 준을 올려다보았다.
“네.”
머리를 살짝 끄덕인 준은 다시 열 명의 용병들을 바라봤다. 그들 중에는 여자 두 명이 있었고, 사내의 말대로 9성 투사가 몇 명 섞여 있었다.
‘에휴…이 정도로 전력차가 나는데 무슨 성에 가서 도움을 요청해. 돌아갔다 오면 전부 시체가 돼있겠구만.’
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 때,
“죽여!”
우두머리의 고함 소리와 함께 뱀인간들이 용병들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훅-!
그리고 뱀 인간들이 용병들은 덮치려는 순간,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하늘에서 날아들며 자욱하게 흙먼지를 일으키고…
모래 바람이 가라앉자 커다란 검은색 검을 손에 쥔 소년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뱀 인간들의 우두머리는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차가운 눈으로 훑어보더니 조용히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5성 투사 뱀 인간 두 명이 꼬리를 움직이며 준을 향해 다가왔다. 하지만 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시커먼 쇳덩이를 든 채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쉬익-!
그리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두 명의 뱀인간을 스쳐 지나자, 뱀 인간들이 피를 내뿜으며 날아갔다.
십여 명의 용병들은 모두 입을 벌린 채 갑자기 나타난 어린 소년을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 했다.
바로 그 때, 모래 언덕 위에 있던 남자가 상처 입은 다리를 끌고 뛰어 내려 왔다.
“담재! 넌 성으로 간 거 아니었어? 왜 여기 있는 거야?"
무리에 있던 여자 중 하나가 질문을 던지자, 담재라고 불린 사내가 준을 가리켰다.
“저기, 구원병 왔잖아.”
“저 사람? 우리 용병단 사람이 아니잖아. 우리를 왜 돕겠다는 건데?”
“나도 몰라. 모래바람성에 가서 상황을 전달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했는데?”
“처음에는 무시하고 가려다가…내가 사막의 칼날 용병단의 이름을 대니까 갑자기 태도가 변해서 해독약도 주고 상처 치유약도 주더라고…”
“누구지? 뭔가 우리 용병단하고 연이 있는 사람인건가?”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악의는 없는 것 같아. 안 그러면 굳이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우릴 도울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저 뱀 인간들 중에는 9성 투사가 세 명이나 있다고. 우리를 구하려다가 저 사람까지 위험해 지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글쎄…내가 뱀 인간들의 실력을 말해줬는데…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안내나 하라고 하더라고…”
“설마…저 사람이 무투사란 소리야?”
“그게…”
담재는 입을 벌렸다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스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소년이 무투사라니…있을 수 없는 일 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는 저 소년의 실력이 생각보다 뛰어나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이준이 가볍게 자신의 두 부하를 쓰러뜨리는 것을 본 뱀 인간들의 우두머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준을 바라보다가 삭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인간 따위가 타르 사막에서 우리 뱀 인간을 건드리다니…”
하지만 반바지를 입은 소년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검은 쇳덩이의 감촉을 확인이라도 하듯 검을 움직여 보고 있었다.
“건방진 인간놈이…”
자신을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소년의 태도 앞에 뱀 비늘로 뒤덮힌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모두 저놈을 죽여라!”
스읍-!
우두머리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주위의 뱀인간들이 혀를 날름거리며 무기를 들었다.
“부상자들은 여기에 남고 남은 사람들은 공격 한다!”
담재와 대화를 나누던 여인이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순간, 갑자기 준이 고개를 돌렸다.
“됐습니다. 거기 계세요. 당하는 거 구하러 가는 게 더 어려워요.”
“너……”
그리고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소년의 무례하기까지 한 언동에 이마를 찌푸리려는 순간, 시커먼 검에서 보라색 불꽃이 뿜어져 나와 소년의 몸을 감쌌다.
“투기 보호막? 저 사람, 진짜 무투사였어?”
“……”
모든 사람들이 서로 마주 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어. 저 나이에 무투사라니. 우리 단장님들도 이제 막 5성 무투사가 되었는데…”
담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여인이 고개를 돌려 부하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저 녀석은 대체 어디서 나타난 녀석이지? 저런 천재가 있다면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리 없잖아… 혹시 소년 무투사에 대해 들은 사람 없어?”
하지만 주위의 모든 용병들이 동시에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때, 투기 방어막을 꺼낸 이준이 자신의 무기를 꽉 붙잡고 당황한 뱀인간들을 보며 발을 들었고, ‘쾅’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발 주위에서 거대한 모래 폭풍이 일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시커먼 형체가 다시 나타나자, 둔탁한 소리와 함께 뱀 인간들 중 하나의 입에서 시뻘건 선지피가 터져 나왔다.
쿠웅!
순식간에 9성 투사 하나가 모래 언덕 위에 쓰러지고, 소년은 그를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뱀인간들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이윽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몇 명의 뱀 인간이 더 고꾸라졌다. 자리에 있던 용병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 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순식간에 자신의 부하들이 비명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나자빠지자 뱀 인간들의 우두머리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그는 다른 9성 투사와 말없이 눈길을 주고받은 뒤 좌우로 나뉘어 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두 개의 칼날이 주홍빛으로 빛나며 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하지만 준은 검은 송곳을 번개처럼 휘둘러 가볍게 두 개의 칼날을 막아냈다.
공격이 막히는 순간, 두 뱀인간은 동시에 입을 쩍 벌렸다. 그러자 역한 비린내를 풍기는 청색 공기가 준을 향해 뿜어졌다.
“뱀 독이에요! 조심해요!”
준의 뒤에 서있던 용병들 중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는 순간, 준의 보라색 투기 보호막이 더욱 치밀하게 몸을 감쌌고, 보호막에 닿은 청색의 연기가 깨끗이 불타 허공에 날렸다.
쾅!
차분한 표정으로 독가스 공격을 막아 낸 준은 발을 힘껏 내딛어 몸을 날렸다.
그의 몸이 순식간에 우두머리 뱀인간 앞에 나타나고, 시커먼 쇳덩이가 수직선을 그리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모래가 치솟았다.
뱀 인간은 자신의 코앞에 떨어진 무시무시한 검격에 파랗게 질려 꼬리를 놀려 몸을 뒤로 물렸다.
쾅!
숨 돌릴 틈도 없이 소년이 다시 한 번 발로 땅을 힘껏 밟자 그의 몸이 독수리처럼 하늘로 빠르게 치솟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검은 송곳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두개골이 으깨지는 소름 돋는 소리와 함께 뱀인간이 검붉은 피를 쏟으며 모래속에 파묻혔다.
자신들의 우두머리가 일격에 죽는 것을 본 마지막 뱀인간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기다란 뱀 꼬리를 빠르게 움직이며 사막 깊은 곳으로 도망쳤다.
소년은 멀뚱히 달아나는 뱀 인간을 바라보다가 몸을 크게 회전시켜 검을 집어던졌다.
그러자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시커먼 검이 뱀인간을 향해 날아가 그의 목을 날려버렸고, 마지막 뱀 인간의 목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치솟아 싸움의 끝을 알렸다.
……
“다들 괜찮아요?”
잠시 후, 이준이 검은 송곳을 주워들고 용병들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어린 무투사의 놀라운 실력을 목격한 용병들 중 하나가 얼이 빠진 채로 답했다.
잠시 후, 담재와 대화를 나누던 여자가 준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저기… 어떤 목적에서 우리를 도와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어요. 당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 참, 저는 설란이라고 해요. 이 분대의 분대장이고 우리는 사막의 칼날 용병단의 분대 중 하나예요.”
“저는 이준입니다.”
준이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이준? 익숙한 이름인데? 어디서 들어봤지?’
설란은 어딘지 낯익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며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만약 시간이 되시면 모래바람성으로 함께 가실래요? 우리를 도와 주셨으니…꼭 보답을 해드리고 싶어요! 모래바람성은 여기에서 반시간 정도 거리밖에 되지 않아요. 금방 도착할 수 있으니 시간을 많이 뺏지는 않을 거예요.”
설란의 제안에 준은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처럼 모래바람성에 왔으니, 그도 형들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몇 년간 얼굴을 보지 못 한 형제들이었지만, 어릴 적부터 세 형제는 우애가 매우 좋았다. 자신의 실력이 떨어지고 나서도 변함없는 애정을 표현한 것은 아버지와 두 형, 그리고 이은 뿐 이었다.
형들에 대해 생각하던 준의 머릿속에 문득 가녀린 소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은 그 녀석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벌써 1 년이 지났구나. 그 사이 또 더 강해져 있겠지? 나보다 강하려나…? 가람 아카데미에서는 잘 지내고 있을까?’
이은을 떠올리자 준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에는 혼자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 피식 웃는 준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일 뿐 이었다.
“이봐요, 괜찮아요? 혹시…중독 된 거예요?”
설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준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네? 아……아, 하하. 미안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괜찮아요.”
이준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을 발견하고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럼 바로 모래바람성으로 출발할까요?”
설란의 질문에 준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좋아요.”
“비호, 낙타차를 갖고 와.”
설란이 몸을 돌려 한 용병을 향해 명령을 내리자, 그 사내는 급히 모래 언덕으로 달려가 낙타마차 한 대를 끌고 왔다 .
마차에는 1레벨의 마수 두 마리의 시체가 있었는데 아직 피가 굳지 않은 걸 보니 설란의 분대에서 포획한 사냥물인 것 같았다.
“먼저 이 물건을 가지고 모래바람성으로 출발해. 그리고 단장님들한테 여기 일도 보고하고.”
설란이 손을 저으며 명령을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단장님들도 새로운 친구를 만날 수 있어서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그 용병은 준을 향해 친절하게 웃고는 낙타의 엉덩이를 힘껏 차 포획한 사냥물을 싣고 모래바람성을 향해 달려갔다.
준은 점점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며 저장반지에서 망토를 꺼내든 뒤 성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준이 움직이자 설란도 부하들을 챙기며 뒤를 따랐다.
“분대장님, 그런데… 이준이라는 소년이 두 단장님과 닮은 것 같지 않습니까?”
담재가 물건을 챙기면서 입을 열었다.
“어?”
말을 들은 설란은 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장님들의 동생도 이름이…아마 이준이라고 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