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화. 사막에서의 고행
이준이 동의하자 동해는 가슴 속에서 얇은 양 가죽으로 제작된 지도 하나를 꺼냈다.
“내 추측에 따르면 이 세 곳 중에 한 곳에 천지의 불꽃이 있을 걸세.”
지도를 받아 쥔 준이 조심스레 그것을 펼쳐 보았다.
지도에는 타르사막의 자세한 지형과 오아시스, 또 뱀 인간의 거주지 등이 자세히 표기 되어 있었다.
“지도 위에 불 표시 세 개가 보이나?”
동해의 말대로 지도를 자세히 훑어보자, 과연 지도 위의 동, 서, 북 세 방향에 불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이 세 곳이 타르 사막에서 이화가 숨어 있을 확률이 가장 높은 곳이라네.”
얼음왕이 손가락으로 불꽃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짚었다.
“그리고 중요한 게 있는데, 먼저 동쪽과 북쪽 방향의 불 표시가 있는 곳으로 가 보게. 그리고 서쪽은…… 웬만하면 가지 않을 것을 추천하네.”
노인이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요?”
“거기는 뱀 인간들의 여왕 메두사가 인간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덫을 쳐놓은 곳일세.”
“아…네, 알겠습니다. 가급적이면 그곳은 피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동쪽과 북쪽에서 천지의 불꽃을 찾지 못 한다면 서쪽으로 가야한다. 위험하다고 가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자, 이제 내가 줄 수 있는 정보는 모두 주었네. 부디 자네가 뱀독말풀과 천지의 불꽃을 찾길 바라지.”
“네? 조합표는요?”
“조합표와 지도조각은 내가 가지고 있다가 자네가 돌아오면 넘겨주지.”
“네.”
준은 머리를 끄덕인 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선배님 거처를 엉망으로 만든 점은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동해는 잠시 고개를 돌려 방안을 바라보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괜찮네. 나도 곧 은둔생활을 끝낼 참이었어.”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선배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소년은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 나갔고, 노인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어지럽혀진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 * *
한편, 얼음 왕의 가게를 빠져 나온 준은 거리를 걸어가며 약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스승님, 저 자의 말이 사실일까요?’
‘글쎄다. 어쨌든 그가 봉인에 걸린 것만큼은 사실이다. 의심스럽다고 해도 할 수 없지. 정화의 불꽃이든, 사막에 있는 천지의 불꽃이든, 급한 것은 네놈이니까.’
‘흠……’
‘그리고 내 생각에는 그 지도가 우리에게 꽤 도움을 줄 것 같구나. 불 표시가 있는 세 곳은 나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거든. 게다가 봉인을 정말 풀고 싶다면 너에게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너무 걱정 말거라.’
‘네…그럼 오늘은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고 내일 아침 일찍 타르 사막에 들어가는 걸로 해요.’
‘그러자꾸나.’
이후 준은 가까운 약재 가게에 들려 뱀을 물리치는 약을 구하고, 근처 잡화상에 들려 깨끗한 물을 저장반지 하나에 가득 채운 뒤 즉시 객잔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
태양이 모래바람성의 금빛 건물들을 더욱 노랗게 물들일 무렵, 준은 객잔에서 나와 저장반지를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그 안에는 스승님이 밤 새워 정제한 기력의 조각 50알이 들어 있었다.
‘좋아…! 완벽해! 이제 천지의 불꽃만 찾으면 되는 거야!’
* * *
금빛 모래가 끝도 없이 펼쳐진 사막에 발을 들이자, 바람에 날린 모래가 쉴 새 없이 준의 뺨을 때렸다.
준은 염력 보호막을 펼쳐 모래를 막아내며 이를 악물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백 여 미터를 걸었을 뿐 인데 온 몸에서 땀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준은 숨을 헐떡거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낸 뒤 저장반지에서 물 한 병을 꺼내 벌컥 벌컥 들이켰다.
갈증을 어느 정도 해소한 준은 품속에서 얼음왕에게 받은 지도를 꺼내든 뒤 약로에게 말을 걸었다.
‘스승님, 이제 어느 쪽으로 갈까요?”
‘먼저 동쪽으로 가보자꾸나.’
‘지도를 보니 동쪽 불 표시가 있는 곳까지 가려면 적어도 열흘은 걸릴 것 같은데요…’
‘하하, 그러니 가자는 것이다. 불속성의 투사는 이 타르 사막을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수련이 된단 말이다.’
약로의 말에 준은 긴 한숨을 내쉬며 자비 없이 내리쬐는 매정한 태양을 올려다 본 뒤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등에 맨 검은 송곳이 뜨끈한 열기에도 불구하고도 계속해서 시원한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 이었다. 준은 뜨거운 햇볕에 의해 현기증이 일어날 것 같을 때 마다 검은 송곳을 풀고 끌어안아 열을 식혀가며 열심히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동쪽으로 이동한지 1시간.
갑자기 준이 검은 송곳을 발아래 가득히 쌓인 모래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끼익-!”
그 순간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새빨간 피가 모래를 적셨고, 송곳을 뽑자 검은 송곳에 몸을 꿰뚫린 작은 마수 한 마리가 딸려 나왔다.
준의 송곳에 목숨을 잃은 마수는 황사전갈이라는 타르 사막의 마수로, 사막에서만 서식하며 모래 속에 숨어 있다가 사냥감이 지나가면 갑자기 독을 뿜어내는 놈이었다.
‘흠…’
이준은 가만히 황사전갈의 몸을 훑어보다가 전갈의 독이 담긴 꼬리를 잘라 저장반지에 넣은 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사막에서의 훈련은 천둥산 이상으로 고독했다. 아무리 걸어도 사람은커녕 짐승이나 마수조차 보이지 않았고, 온종일 작열하는 태양 아래 걸음을 옮기는 것만이 하루의 전부였다.
그리고 타르 사막에 들어온지 삼일 째 되는 날, 준은 약로의 말에 따라 윗옷을 모두 벗고 반바지 하나만을 걸친채 사막을 걸어야했다. 약로의 말에 따르면 피부를 드러내야 더 효과적으로 불속성의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다고 했지만, 옷가지 하나 없이 내리쬐는 태양을 온 몸으로 받아내자니 생 고문이 따로 없었다.
……
태양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나는 모래로 가득한 사막의 벌판 한 가운데, 준은 이를 악물고 철판처럼 달아오른 모래 위에 몸을 뉘였다.
잠시 후, 약로가 약병을 기울이자 붉은 액체 몇 방울이 새카맣게 그을린 소년의 등 위로 떨어졌다.
“으윽…!”
소년은 나지막한 신음 소리를 내뱉으며 뜨겁게 달구어진 모래를 두 손 가득 움켜쥐었다.
“이 타르 사막의 태양과 열기가 불의 숨결의 효과를 더욱 끌어올려줄게다. 그만큼 고통도 더 심하겠지만…”
도저히 참기 어려운 고통임이 분명했지만, 준은 억지웃음까지 지어보이며 괜찮은 척을 했다.
“걱정마세요. 이제 적응 되어서 참을 만해요. 제가 적응력 하나는 강하잖아요?”
“하하!”
“스승님…그런데, 이제 곧 2성 무투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자가 웃으며 스승의 의견을 묻자, 약로가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구나. 어서 수련을 시작해라.”
약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준은 배를 뜨거운 모래에 찰싹 붙인 뒤 얼굴을 투기 보호막으로 덮고 한껏 달아오른 모래 속으로 두더지마냥 고개를 묻었다.
이 괴상망측한 수련 자세는 약로가 특별히 가르쳐준 것으로, 사막에는 어디든지 불 속성 기운이 있지만 모래 속에 순수한 불속성 기운이 가장 많기 때문에 사막에서는 이렇게 수련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은 준이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안정시키자, 등 뒤에 바른 불의 숨결이 햇살을 받아 더욱 무지막지한 열을 내뿜으며 몸속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불의 숨결이 피부를 자극하자 사막의 공기에 빈틈없이 들어찬 농밀한 불속성의 에너지들이 준의 몸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잠시 후 등 뒤에 바른 불의 숨결이 완전히 소모되자 보라색 염력 회오리 안에 또 다시 보라색 액체 한 방울이 나타났다.
이준은 보라색 액체를 보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염력 회오리 속 액체가 열다섯 방울 정도 모이면 곧 2성 무투사가 될 수 있을 것 이다. 그리고 지금 그의 염력 회오리 속에는 열 세 방울의 염력 회오리가 형성되어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돼…’
* * *
거대한 모래 언덕 위. 반바지만 입은 소년 하나가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타르 사막에 들어온 지도 어느 덧 열흘째, 준은 어느 새 얼음왕에게 넘겨받은 지도에 있는 지점에 도착해 있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는 천지의 불꽃에 대한 작은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왜 아무 것도 없을까요? 설마…그 노인네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겠죠?”
“글쎄다…어쨌든 아직까지는 뭔가 특이한 점을 찾을 수 없구나.”
“휴…열흘 동안 헛고생만 했네요.”
“하하, 헛고생은 아니지. 어찌됐든 네 실력이 올랐지 않느냐.”
“그래도 아쉽잖아요. 일단 표시된 구역도 넓고 지형도 복잡하니까 주변을 샅샅이 뒤져보죠.”
“그래, 그럼 좀 더 찾아보고 이틀 뒤에 북쪽으로 가보자꾸나. 북쪽으로 가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릴게다.”
준은 한숨을 내쉬며 습관적으로 등 뒤에 멘 검은 송곳을 한번 쓰다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준은 쉬지 않고 내리쬐는 햇볕을 뚫고 30분 정도 걸음을 옮기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앞에 있는 모래 언덕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오다가 모래 언덕에서 발을 헛디뎌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흔들며 그에게 다가간 뒤 저장반지에서 깨끗한 물 한 병을 꺼내 사내의 얼굴에 천천히 들이 부었다.
물이 얼굴에 떨어지자 의식을 잃었던 남자가 천천히 눈을 떴다.
사내는 의식을 찾자마자 눈앞에 선 소년을 보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가 준이 자신에게 적의가 없는 것이라고 여겼는지 안도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준은 사내가 정신을 차리자 저장반지에서 깨끗한 물을 두세 병 정도 더 꺼내 내려놓고 몸을 돌렸다. 사내의 상태를 보니 무언가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이 뻔해보였기 때문이다.
“저기…… 젊은 친구.”
하지만 말없이 몸을 돌리려는 순간, 사내가 쉬어터진 목소리로 준을 불러 세웠다.
“젊은 친구, 잠깐만! 지금 우리 용병단이 뱀 인간들에게 습격을 당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모래바람성에 가서 우리 본부에 도움을 좀 청해주시오.”
불길한 예감이 적중했다. 하지만 준은 천지의 불꽃을 찾기에도 시간이 부족했다.
“미안하지만 저는 시간이 없어요.”
소년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짤막한 말 한마디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젊은 친구! 젊은 친구, 이렇게 부탁 할게요. 부디 모래바람성의 사막의 칼날 용병단으로 가서…!”
하지만 ‘사막의 칼날’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준은 발걸음을 멈추고 황급히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막의 칼날 용병단? 모래바람성의 사막의 칼날 용병단을 말하는 건가요?”
“맞아요. 젊은 친구가 우리 용병단을 어떻게…?”
사내는 소년이 갑자기 몸을 돌리자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준이 자신이 속한 용병단에 적대적인 사람은 아닐지 걱정하는 듯 했다.
“단장의 이름이 이정, 이찬. 맞습니까?”
준의 표정에서 악의나 적의가 느껴지지 않자, 남자는 다시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소년은 갑자기 너그러운 표정으로 남자의 다리에 있는 상처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약을 하나 꺼내들었다.
“해독제입니다. 뱀에 물렸나보군요.”
급히 약을 받아 든 남자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소년이 건네준 해독제를 꿀꺽 집어 삼켰다.
“그리고 이건 상처 치유제입니다. 상처 부위에 바르세요. 그리고 당신들 용병단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세요.”
이준이 저장반지에서 치유약을 꺼내 건네자 사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거길 간다고요? 안됩니다. 거기에는 뱀 인간이 여덟이나 있습니다. 게다가 그 중 셋은 9성 투사라구요. 그러지 말고 모래바람성으로 가서 도움만 요청해주시면 됩니다. 단장님께서…”
“휴…시끄러워요. 빨리 약을 바르고 그곳으로 안내 해주세요. 다 수가 있어서 이러는 거니까.”
사내는 오만하게까지 느껴지는 소년의 자신만만한 태도에 잠시 망설이다가 다리에 상처 치유약을 바른 뒤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