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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90화 (90/818)

제90화. 대결

어두컴컴한 통로를 벗어나자 눈앞이 천천히 환해지고, 태양을 받아 화려하게 빛나는 성안의 건물들이 시야에 가득히 들어왔다.

‘스승님, 이제 어디로 가야 하죠? 바로 사막으로 가는 건가요?’

‘에잉…이놈아. 아무런 준비도 없이 사막에 들어갔다가는 바로 말라죽고 말게다.’

‘사막은 처음이라구요.’

‘우선 타르 사막의 지도를 하나 구하거라. 지도는 가장 정확한 것으로 구해야 한다. 성 안에 지도를 파는 상점이 몇 개 있을게다. 물도 충분히 준비하고. 사막에서는 물이 가장 중요하니까. 그리고 약재 가게에 가서 뱀 쫓는데 쓰는 약도 구해야한다. 타르 사막의 뱀 인간들은 독사를 부려 사람들을 습격하니까. 아마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준비하고 나면 날이 질게다. 그러니 오늘은 이곳의 객잔에서 하루 묵고, 내일 출발하도록 하자꾸나. 수련에 필요한 기력의 조각은 네가 자는 동안 내가 준비하도록 하마.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고.’

약로의 입에서 줄줄이 나오는 준비물들을 머릿속에 새기며 준은 길을 가는 사내 하나를 붙잡아 지도를 파는 가게에 대해 물어봤다. 사내는 처음에는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가, 준의 가슴에 붙어있는 연금술사의 표식을 발견하고는 공손한 태도로 가게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

사내가 알려준 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니 간판에 ‘지도’라고 대충 써있는 낡은 지도 가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로 지도라고만 써있네… 엄청나게 무성의하군. 이 가게, 믿어도 되는 거야?’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주름이 가득한 노인 하나가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노인의 머리는 눈이라도 맞은 듯 새하얗게 새어 있었고, 눈가에는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으나 지도를 그리는 손만큼은 젊은이의 그것처럼 힘이 넘쳤다.

노인은 준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지도를 그리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준은 노인을 방해하지 않고 조용히 가게 안의 지도들을 훑어보다가 가게 구석에 놓은 낡은 진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낡은 진열장에는 오래된 구멍들이 가득했고, 그 위에는 누렇게 변색된 지도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변색된 지도들을 뒤적여보자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으으…”

바로 그 때, 코를 찌르는 냄새에 미간을 찌푸리던 이준의 눈이 반짝였다. 변색된 지도들 틈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것 이다 .

“설마…”

그는 매캐한 악취를 내뿜는 지도들을 치워내고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낡은 지도 하나를 집어 들었다.

“틀림없어…”

준은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낡아빠진 지도를 손에 들고 흥분으로 눈을 빛냈다.

‘틀림없어. 이건 정화의 불꽃이 있는 곳을 표시한 지도 중 다른 한 조각이야.’

“허허…정말로 놀랍구나. 이런 곳에서 다른 한 조각을 찾다니.”

약로 역시 그 귀한 지도 조각이 이런 곳에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 했는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준은 당장이라도 저장반지 안에 있는 다른 지도 조각과 손에 든 지도 조각을 맞춰보고 싶었다.

바로 그 때, 등 뒤에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타르사막 지도를 사려는겐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준은 몸을 돌려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노인은 하던 일이 거의 마무리가 되어가는 듯 손에 들고 있던 펜과 지도를 접고 있었다.

“어르신, 이 곳에서 가장 정확하고 자세한 사막 지도를 살 수 있을까요?”

“물건은 전부 저 안에 있으니 알아서 고르게.”

노인의 무관심한 태도에 준은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계속해서 예의바른 태도를 유지하며 손 안에 쥐고 있던 지도 조각을 노인에게 내밀었다.

“어르신, 혹시 이곳에 이런 조각들이 더 있는지요?”

노인은 준이 내민 지도 조각을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노인과 눈이 마주치자 자기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왼쪽 볼에서 눈가까지 깊은 흉터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자네…이것과 비슷한 다른 조각을 본 적이 있나?”

노인의 눈빛에서 무언가를 느낀 준은 즉시 거짓말로 둘러댔다.

“경매장에서 이런 조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별 생각 없이 경매에 붙었는데 상대가 너무 높게 가격을 부르는 바람에 포기를 했어요. 그런데 이 지도 조각이 그것과 비슷한 것 같아서요.”

“없네. 나도 우연하게 얻은 조각이야.”

“그럼 이걸 혹시 어디에서 얻었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사막에서 파냈지.”

“그럼 이 지도를 저에게 파시겠습니까? 값은 아주 후하게 쳐드릴…”

“안 팔아.”

노인은 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매몰차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준 역시 지도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위대한 천지의 불꽃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든다는 정화의 불꽃이 아니던가. 그렇게 이준이 어떻게 하면 저 지도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 사이, 약로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조심하거라. 저 노인네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 않구나.’

‘네?’

‘저 노인은 투황 레벨의 강자가 틀림없다. 하지만…무언가 기이한 힘에 의해 본래 실력을 발휘하지는 못 하는 것 같구나. 그래도 투령 수준은 되니, 너 정도는 순식간에 죽일 수 있을게다.’

‘투황이요? 그럴 리가요… 가한제국의 10대 강자 중에도 투황은 셋뿐이라구요.’

‘그야 나도 모르지. 하지만 네가 말한 강자들은 세상에 알려진 자들뿐이지 않느냐.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 강자들이 널린 것이 바로 이 투기 대륙이다. 내 눈이 틀릴 리가 없다.’

준이 약로와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노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봐, 젊은이. 그 지도는 줄 수 없으니 그냥 가게. 얼마를 준다 해도 그 지도는 줄 수 없네. 사막 지도나 가지고 떠나게.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힘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도 하지 말게.”

”그럼요. 한때는 투황 강자였던 사람 앞에서 제가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준의 말에 손끝에서 천천히 움직이던 지도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두 동강이 났다.

노인은 먹물로 흐트러진 지도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천천히 머리를 들어 이준을 노려보았다. 둔탁한 눈동자 속에 한기가 차츰 번지고 있었다.

“젊은이…정체가 뭔가?”

노인의 몸에서 서늘한 냉기가 피어오르자, 약로가 영혼의 힘으로 준을 감싸 준을 보호했다.

“어르신…오해 마시지요. 저는 어르신의 정체를 모릅니다. 다만 제 영혼 탐지 능력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것뿐이에요. 그리고 이 지도 조각이 꼭 필요해서 부탁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이 물건이 꼭 필요해서 그러니, 혹시 제가 가진 것 중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이 지도와 바꿀 수 있을까 싶어 여쭤보는 것입니다.”

“호오…그래?”

이준은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으며 다시 한 번 노인의 의사를 물었다.

“어떠십니까?”

“방금 말했다시피 나는 그걸 팔 생각이 없네.”

노인은 차가운 말투로 다시 한 번 준의 제안을 거절했고, 그의 몸에서는 또 다시 서늘한 냉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선생님,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저는 이 물건이 꼭 필요합니다.”

“끌끌…! 내 참 오래 살다보니 별 꼴을 다 보겠군. 2레벨 연금술사가 내 물건을 빼앗아 가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 내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겐가?”

이준의 행동에 노인의 얼굴에 섬뜩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순식간에 가게 안에 새하얀 안개가 가득 차며 준의 시야를 완전히 가려버렸다.

* * *

서늘한 백색 안개가 방안에 가득 차자 준은 방향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안개가 그의 몸을 감싸는 순간, 준은 자신의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지는 것을 느꼈다.

준은 정신을 집중해 자신의 염력회오리에서 하늘 사자의 불꽃을 끌어냈다. 보라색 화염이 혈관을 타고 흐르며 그의 몸에 염력 보호막을 형성하자 뜨거운 열기가 주위에 가득한 하얀색 안개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검은 송곳을 바닥에 꽂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칠흑같은 송곳이 땅속 깊숙이 꽂혀 들어갔다. 준은 검은 송곳을 손에 꼭 쥔채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선생님, 저는 악의가 없을뿐더러 선생님의 은둔생활을 방해 할 생각도 없습니다. 다만 그 지도 조각이 꼭 필요해서 그런 것 입니다!”

“흥! 헛소리!”

쉭!

이윽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하얀색 얼음 가시가 안개 속에서 날아들어 검은 송곳에 부딪혔다. 한기가 가득한 얼음 가시들이 새까만 송곳에 부딪히자마자 새하얀 서리가 송곳을 감싸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검은 송곳의 손잡이를 통해 끔찍한 한기가 파고들었다.

“치익…!”

하지만 준이 잽싸게 하늘 사자의 불꽃을 끌어내 검은 송곳을 뒤덮자 금세 새하얀 서리가 녹아내렸다.

“보라색 불? 어린 나이에 보물들을 많이도 가지고 있구나! 하지만 나에게 맞서기에는 아직 이르다!”

잠시 후, 준이 검은 송곳을 휘두르며 돌진해오자 노인은 즉시 손을 앞으로 내밀며 염력을 끌어올렸다.

“얼음 거울!”

그러자, 순식간에 하얀 안개들이 빠르게 응집하며 백색 얼음 거울이 만들어져 준을 날려버렸다.

잠시 후, 노인의 손끝에서 수십 개의 뾰족한 얼음가시가 나타나 준을 향해 날아들었고, 준은 공중으로 몸을 날려 가시를 피하는 동시에 손에 들고 있던 송곳을 노인에게 집어던졌다.

하지만 노인은 눈썹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얼음실을 만들어 검은 송곳을 붙잡았다. 곧이어 가느다란 줄들이 순식간에 불어나면서 두터운 얼음 벽을 만들어내자, 검은 송곳은 거대한 얼음 기둥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흥…”

노인은 얼음으로 둘러싸인 송곳을 바라보며 차갑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가 손을 휘두르자 얼음이 산산 조각나며 얼음 실에 묶인 검은 송곳이 준을 향해 날아들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송곳을 보며 준은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날개를 펼쳤다.

“설마…비행 투기? 어린놈이 정말로 귀한 것을 많이도 가지고 있구나!”

소년은 노인이 놀란 틈을 타 보라색 불꽃을 날려 검은 송곳을 둘러싸고 있던 얼음 실들을 녹여냈다.

얼음실이 사라지자 검은 송곳은 힘 없이 바닥으로 떨어졌고, 준은 즉시 두 날개를 펄럭여 자신의 무기를 회수한 뒤 천장을 향해 솟구쳤다.

그러나 노인은 지붕을 뚫고 나가려는 준을 보며 코읏음을 칠 뿐 준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탕-!”

지붕을 찌르려던 송곳은 무언가 단단한 물건에 부딪힌 듯 카랑카랑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작은 얼음조각들이 우수수 준의 얼굴에 떨어졌다. 차가운 느낌에 준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아래를 돌아봤다.

‘이런…그 사이에 완전 얼음굴을 만들어놨군.’

“비행투기에 정체불명의 보라색 불, 그리고 기이한 무투기까지…정체가 뭐냐 꼬마야?”

노인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준을 바라보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자신의 뺨에 난 긴 흉터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큭큭…하긴,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은 없지. 네가 대가문의 후예라도, 아니 황실 사람이라도 네 실력이 무투사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곱게 떠나겠다면 이쯤에서 용서해주마. 그렇지 않으면…이제부터는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 할게야.”

말을 마친 노인의 몸에서 무시무시한 한기가 피어오르자, 준은 마른 침을 삼키며 약로를 불렀다.

‘스승님, 이제 스승님이 나서야 할 것 같아요. 이제 정말 위험하다구요.’

‘하하. 알고 있다. 네 실력으로 투령을 이길 수는 없지. 하지만 저 노인네가 본격적으로 힘을 쓰지 않으니 너도 경험을 쌓아보라고 잠시 두고 본 것 이다. 하지만 이제 저 자가 진심으로 널 죽이려는 마음이 생긴 것 같으니…내가 나서야겠구나. 경험을 쌓게 한답시고 소중한 제자를 잃을 수는 없으니 말이야.’

……

잠시 후 준의 몸에서 은은한 백색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소년은 노인을 향해 어깨를 으쓱하더니 갑자기 두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리고 이 모습을 바라보던 노인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점점 강해지는 기세를 느끼며 노인의 평온하던 얼굴에 드디어 충격에 휩싸인 듯한 표정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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