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비행
준의 약병에서는 보라색 기운과 함께 엄청난 열기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그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고튼의 방이 순식간에 가마솥처럼 달아올랐다.
“젠장, 좋은 걸 가지고 왔구만!”
고튼은 준이 내민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챘는지 갑자기 몸을 돌려 쓰레기 더미에서 수정 그릇 하나와 속이 빈 가느다란 침 하나를 꺼냈다.
잠시 후 그가 침을 약병속에 넣자, 침 끝에 진한 보라색 액체가 묻어 나왔고, 수정 그릇에 그 액체를 옮겨담자 수정 그릇 위에 보라색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건…”
고튼은 준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또 다시 쓰레기 더미를 뒤져 책 한권을 꺼내들고는 열심히 뒤적거리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찾았다! 찾았어! 이거, 이거 맞지? 하늘사자의 정수! 하늘사자가 새끼와 함께 아주 가끔 낳는다는 그 물건! 어떻게 구했어?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물건이라는데! 어떻게 구했냐고! 엉?”
“운이 좋아 우연히 얻었을 뿐입니다.”
준은 고튼이 하늘사자의 정수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확신하자 드디어 입을 열었다.
“어때요? 고튼 대사님. 제가 내 놓은 물건이 마음에 드십니까?”
“내가 아직 그쪽 이름도 모르는 것 같은데?”
“이준입니다.”
“하하, 이준씨, 얼음의 심장을 찾고 있다니 잘 알겠구먼? 얼음의 심장이 얼마나 희귀하고 신기한 물건인지.”
“당연히 잘 알지요. 모르면 제가 하늘사자의 정수 같은 귀한 물건을 꺼냈을까요?”
“좋아. 그럼 정확하게 평가해보지. 네 물건도 희귀하기는 하지만, 이 물건은 불속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쓸모가 있지.”
하지만 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가 약병의 뚜껑을 덮은 뒤 즉시 몸을 일으켰다.
“알겠습니다. 할 수 없지요. 참고로 저는 내일 가한제국을 떠납니다. 언젠가 연이 닿으면 다시 뵙지요.”
준은 태연한척 걸음을 옮겨 문고리를 붙잡았다. 하지만 그 때까지도 고튼이 말이 없자 그도 조금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젠장…어쩌지.’
준의 머릿속에 잠시 흥정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고튼이라는 인물의 행동으로 보아 여기서 물러서면 절대로 얼음의 심장을 손에 넣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결국 준이 눈을 질끈 감고 방문을 열어젖히는 순간…고튼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젊은이, 앉아. 거래를 할 줄 아는구만. 사실 나도 하늘사자의 정수는 처음보거든. 다른 물건이었다면 오늘 진짜 빈손으로 돌아갔을 거야.”
준은 티나지 않게 식은땀을 훔치며 다시 약병을 꺼내들어 고튼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감사합니다.”
“어디서 이런 놈이 나타난 거야…에잉…”
고튼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하늘사자의 정수가 담긴 약병을 열어 다시 한번 그 뜨거운 열기를 느끼더니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서 기다려. 다른 건 함부로 만지지 말고.”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갔다가 잠시 후 무엇인가를 안고 다시 방안으로 돌아왔다.
방으로 돌아온 고튼의 손에 들린 것은 작은 백옥함으로, 물샐 틈 없이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서는 으스스한 한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마치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를 쓰다듬듯 몇 번이고 애정이 가득한 손길로 옥함을 어루만지다가 눈을 질끈 감고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가 열리는 순간 방안에는 한겨울의 설원 같은 냉기가 감돌았고, 그 속에는 망치로 내리쳐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두꺼운 얼음에 둘러싸인 약병 하나가 들어있었다.
“가져가. 이게 바로 네가 찾는 얼음의 심장이야.”
준은 떨리는 손으로 약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약병에 닿은 부위에서 뼛속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전해지며 그의 피부에 얇게 얼음이 생겨나 온 몸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익…”
준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극한의 냉기에 깜짝 놀라 황급히 몸속의 불꽃을 불러냈고, 그러자 보라색 불꽃이 차가운 한기와 잠시 씨름을 하다가 천천히 얼음을 녹여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고튼은 깜짝 놀라 머리를 절레절레 젓더니 다시 한번 준을 위아래로 천천히 훑어보았다.
“물건을 이제 손에 넣었으니 그만 가지?”
고튼은 준의 저장반지로 사라진 얼음의 심장이 있는 곳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리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가장 필요한 물건을 얻은 이준은 안도의 숨을 내 쉬고 고튼을 향해 웃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기회가 또 있으면 다시 거래하러 찾아오겠습니다.”
“흥, 내놓을만한 보물이 있을 때 다시 와. 그렇지 않으면 얼굴도 못 보고 가는 수가 있으니.”
“그럼요. 내놓을만한 물건이 없으면 어찌 감히 찾아오겠습니까?”
막 방문을 나서려던 준은 무심코 고개를 돌려 고튼에게 다른 물건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고튼 대사님, 혹시 3레벨 마정석을 갖고 계십니까? 만약 있으시면…”
“3레벨 마정석?”
하지만 고튼은 3레벨이라는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네 생각에는 내가 그런 하찮은 물건이나 모을 사람으로 보이느냐? 하지만 5레벨 마정석은 있지! 어때? 가지고 싶어? 하하, 하늘사자의 정수 한병, 어…아니, 아니지. 반 병!”
“하하…… 고튼 대사님 참 재밌는 분이시군요. 아까 그게 전부입니다. 그럼 전 이만.”
준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갔고, 고튼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채 혼잣말을 중얼 거렸다.
“이준? 이 이름을 어디에서 들어본 것 같은데? 어디에서 들어봤지?”
……
“얻었어?”
“하하, 네.”
밖에서 준을 기다리던 오탁은 준이 정말로 고튼에게서 얼음의 심장을 뜯어내는데 성공했다는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크게 치켜떴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 정말 대단하군. 걸물이야 걸물. 잘했네. 어차피 저 빌어먹을 변태한테는 뭘 갖다 줘도 장식품일 뿐이야. 보물도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 보물이라는 걸 몰라.”
……
고튼의 집을 나서던 오탁은 준의 이야기를 듣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3레벨 마정석이 필요하다고?”
“네. 그래서 오늘 검은 바위성을 떠나 제국의 동쪽 변방에 다녀오려구요.”
“제국 변방에?”
“네.”
“그럼 나와 함께 연금술사 공회에 가 보지 않겠나? 그 3레벨 마정석은 내가 직접 사람을 경매장에 보내 거기 집사한테 가서 받아 오라고 하지. 네가 경매할 시간도 절약하고.”
“정말입니까?”
“하하, 우리 검은 바위성 연금술사 공회에 등록을 했으니 한 배를 탄 것이나 마찬 가진데 이런 도움쯤이야 어렵지 않지.”
……
두 사람이 연금술사 공회에 도착하자마자 오탁은 사람을 불러 경매장에 가서 3레벨 마정석을 구해오라고 명을 내린 뒤 준과 함께 널찍한 응접실에 마주 앉았다.
“이번에 제국 변방에 가면 약 얼마 정도 머물러 있을 생각인가?”
“반 년 정도요.”
“반년이라…”
오탁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의미심장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면 반 년 뒤에 가한제국의 수도에 가보는 건 어떠냐?”
“수도요?”
말을 들은 이준은 멍 해졌다가 입을 꾹 다물고 머리를 끄덕였다. 아마도 오탁 역시 그에게 뭔가 제안할 것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탁 대사님, 그냥 말씀하시지요. 뭔가 하실 말씀이 있으신 듯 한데…”
“음, 좀 있기는 하지. 부탁은 아니고, 자네에게도 좋은 얘기일세. 반 년 뒤에 수도에서 연금술사 대회가 열리거든. 자네 정도 재능이라면 참가해 보는 게 어떨까 싶어서. 가면 배울 것도 많을 걸세. 투기 대륙의 연금술사들의 축제 같은 거니까. 참가하겠다면 그 때 수도에서 연금술사 총회로 와서 나와 만석을 찾게.”
“시간이 되면 꼭 가보겠습니다.”
이준이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하자 오탁도 웃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이후 그는 준에게 연금술사 공회의 규칙이라든지, 주의사항에 대해 일러주었고, 그 사이 3레벨 마정석을 구매하러 간 사람이 마정석을 구해왔다.
게다가 3레벨 마정석이라면 몇 만 골드는 하는 물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탁은 반쯤 강제로 준의 손에 마정석을 쥐어주기까지 했다.
물론 연금술사 공회의 재력이라면 그 정도 돈이야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그는 별 다른 요구도 없이 공회의 규칙에 대한 설명과 시덥잖은 잡담을 하다가 자리를 떠났다.
* * *
처음 보는 거리들을 지나 길을 물어가며 걷기를 십 여분, 준은 열 몇 마리의 커다란 비행조류들이 늘어서있는 광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광장에 있는 조류들은 검은 바위성 비행단의 이동수단으로, 마수가 아니라 덩치가 큰 것뿐인 온순한 동물이었다.
이 새들은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지만 지구력이 강해 한끼만 배불리 먹어도 안정된 속도로 4~5일은 거뜬히 날 수 있었고, 성년이 되면 자기 체중의 5배나 되는 물건들을 업고도 하루 이상을 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새들 앞에는 긴 줄이 늘어서 있었고, 준은 한숨을 내쉬며 또 다시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 광장 남쪽에서 매표소를 찾아 표를 구매하러 가야했다.
그러나 매표소 앞에도 앞이 보이지 않는 긴 줄이 있었고, 결국 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줄을 서야했다.
‘에이…정말이지…나도 아라처럼 마수를 하나 키우든지 해야지 원…’
“어디로 가십니까?”
이준이 혼자서 비행마수에 대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어느새 자기 차례가 다가와 있었다.
“제국 동쪽 변경에 타르사막과 가장 가까운 성이요. 아무 곳이나.”
매표소에 앉아있던 점원은 특수한 마수 가죽으로 만든 표를 찢어 준에게 건네다가 갑자기 표를 움켜잡았다.
“어…? 왜 이러세요?”
“선생님은 연금술사이십니까?”
“네…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닙니다. 제국의 규정에 의하면 연금술사는 무료로 비행 제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를 따라 이쪽으로 오세요. 저희는 비행단에서는 연금술사들을 위해 따로 마련된 이동수단이 있습니다.”
뜻밖의 횡재에 준은 싱글벙글 웃으며 점원의 뒤를 따라갔다.
긴 복도를 지나자 방금 전 보았던 새와 비슷한 커다란 조류 한 마리가 이준의 시야에 들어왔다.
‘오…이건 마수네?’
준은 커다란 조류를 발견하자마자 놈의 주위에서 맴도는 바람속성의 기운을 느끼고는 더욱 크게 웃음을 지었다. 게다가 이 마수의 등 위에는 놓인 거대한 탑승실에는 비행 도중에도 혼자 있을 수 있도록 마련된 작은 방이 몇 개나 놓여 있었다.
“선생님, 이것은 가한제국 동쪽 변경인 사막성에 가는 비행 마수입니다. 거기가 타르사막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성입니다.”
점원이 공손하게 안내를 마치자 준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건넨 뒤 마수에 올라탔다.
‘이야…연금술사가 되길 잘했어…’
……
이준이 비행 마수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한 명의 연금술사가 비행 마수에 올라타고, 조련사가 나타나 마수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준은 마수의 등 위에 마련된 작은 방으로 들어가 저장반지에서 피의 연꽃열매와 신선초, 3레벨의 마정석을 꺼내들었다.
“벌써 피의 결정을 정제하려고?”
테이블 위의 세 가지 재료를 본 약로가 웃으며 질문을 던지자 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리 준비해야죠. 언제 천지의 불꽃을 만날지 모르니까요.”
“흠흠…그래. 좋은 자세다. 피의 결정은 5레벨에 속하는 고급 연금비약이야. 정제 시간도 이틀이나 걸리니 미리 만들어 두는 편이 좋지.”
“5레벨 연금비약이라고요?”
이준은 피의 결정이라는 게 필요하다는 말만 들었지, 그게 그렇게나 대단한 연금비약이라고는 생각하지 못 했기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약로를 바라봤다.
“자, 이것도 공부다. 잘 보거라. 고급 연금비약의 제조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아주 좋은 경험이다.”
이윽고 약로가 손을 뻗자 그의 손바닥 위에서 아름다운 하얀 불꽃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