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고튼
만석은 몹시 기분이 좋은지 준을 바라보며 연신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미 공회에 등록을 했으니 우리도 일부 공적인 일을 마무리 해야지. 음…등록한 자료를 보면 스승님 성함이 맞지 않는 것 같은데 말이야. 가한제국에서 약로라는 이름을 쓰는 연금술사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
“제가 나올 때 스승님께서 절대 본인의 정보를 노출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공회에 한 번도 등록을 하신 적이 없으니 공회 명단에는 스승님 이름이 없을겁니다.”
준의 단호한 태도에 만석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도 억지로 캐묻지는 않겠네. 가한제국 내에도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강자들이 많으니 말이야.”
그 때, 옆에 있던 오탁이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준에게 다른 질문을 던졌다.
“네가 사용한 불꽃은 무엇이냐? 천지의 불꽃은 아니겠지?”
“하하, 그랬으면 좋겠지만 아닙니다. 이 보라색 불꽃은 하늘사자의 불꽃입니다. 구체적인 것은 말씀드리기가 어렵지만…우연히 천둥산에서 하늘사자를 만났고, 그 불꽃을 맞고 나서 이렇게 됐다는 것 정도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하늘사자?”
말을 들은 만석과 오탁은 그제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늘사자의 불꽃! 일전에 수 많은 연금술사들이 천지의 불꽃 대신 그 불꽃을 얻으려고 했었지! 죄다 타죽고 말았지만 말이야…그런데 정말 대단하구나. 살아서 그 불꽃을 얻어내는데 성공하다니…”
그들은 원하는 것을 모두 묻고난 뒤 준의 부탁이 무엇인지를 물어봤다.
“아까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지? 무엇이냐?”
“음…제가 꼭 좀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요. 혹시 두 분께서 중개를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래, 말해보거라. 어떤 물건이냐?”
“얼음의…심장이요.”
“얼음의 심장? 너 얼음의 심장이 얼마나 희귀하고 진귀한 보물인 지는 알고 있느냐? 그리고 지금 너의 실력으로는 그 물건이 필요치 않을 것 같은데?”
“아뇨. 저는 지금 그 물건이 필요합니다. 혹시 어느 분이 갖고 있는지 알려주시면 거금을 들여서라도 거래하고 싶습니다.”
“거금? 그 물건을 구하고 있다면 돈으로 값을 매길 수 있는 레벨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지 않느냐?“
“네, 저도 잘 알지요. 그래도 누가 갖고 있는지 찾아 주세요. 제가 그 사람이 만족할 만한 물건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만석은 준의 단호한 태도에 무언가를 느낀 듯 오탁과 눈빛을 주고받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탁이 몸을 일으켜 서재 안족으로 들어가고, 만석은 조용히 차 한모금을 들이키며 준을 바라봤다.
……
한참 뒤 오탁이 두꺼운 서적을 안고 나와 준을 바라봤다.
“가한제국내에서 가장 최근까지 거래 된 물건들을 몽땅 찾아봤지만, 얼음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는 자는 없구나. 그 물건은 워낙 귀하고 보관도 어려우니까 말이야…10년 전쯤에 가한제국의 4레벨 연금술사가 가까스로 구하기는 했지만 보관을 못 해서 안개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가장 최근에 들은 이야기다.”
“흠…그렇군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준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키자, 오탁은 잠시 머뭇거리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깐만!”
“네?”
“너 그 얼음의 심장이 꼭 필요하느냐?”
오탁의 행동에서 무언가를 눈치 챈 준은 눈을 반짝이며 그에게 바짝 다가갔다.
“네, 꼭 필요합니다! 오탁 대사님, 혹시 대사님한테 얼음의 심장이 있습니까?”
옆에 선 만석도 놀란 눈빛으로 오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도 전혀 모르는 듯한 눈치였다.
“허허, 나한테 그런 물건이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내가 아는 녀석에게서 그 물건을 본 적이 있다.”
“네? 그게 누군데요? 어디에 있어요?”
“어…그게…하지만 그 녀석한테서 네가 필요한 물건을 얻으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것도 보통 준비로는 안 되지.”
그 때, 오탁의 말을 듣고 있던 만석이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특이한 녀석이라…설마 고튼은 아니겠지?”
“맞네. 저번에 갔을 때 얼음의 심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거든.”
“그 고튼이라는 분은 뭐하시는 분이세요?”
만석의 반응으로 보아 고튼이라는 사내가 보통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준은 불개를 진화시키기 위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얼음의 심장을 구해야했다.
“3레벨 연금술사다. 하지만 가한제국의 누구라도 탐낼만한 물건들을 잔뜩 가지고 있지.”
“그는 연금술사 공회 소속이 아닌가요?”
“아니…공회소속이긴 하지. 하지만 성격에 문제가 많아. 재능은 흠 잡을데가 없지만 보물을 수집하는데 빠져서 3레벨에 머무르고 있는 자라고 하면 대충 짐작이 가나? 자기가 원하는 물건을 누가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남의 집 똥통에 잠복이라도 할 놈이지.”
만석이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아하니 그도 뭔가 겪은 것이 있는 듯 했다.
“하하, 그러니까 왜 입이 근질근질해서 힘들게 얻은 보물을 자랑해. 1년이나 쫓아다니는 놈도 미친놈이지만, 그런 놈에게 왜 보물 자랑을 하나.”
오탁도 그 사건을 알고 있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어…근데 두 분 레벨이 그 사람보다 높은 데 어찌 감히 마음대로 하게 놔두세요?”
“하하…그럴만한 사정이 있지. 그 놈 형이 아주 무시무시한 자거든.”
“형이요? 그게 누구예요?”
“가한 제국 최고의 연금술사…형만 아니었다면 그 자식 보물 창고는 벌써 백 번도 털렸을 걸?”
“고하요?”
고하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인물이었다.
“아, 오해는 하지 말게. 고튼 그 친구가 좀 괴팍해서 그렇지 나쁜 사람은 아니네. 그리고 혹시라도 고튼을 만나거든 형 얘기는 꺼내지 말고. 그 놈 앞에서 고하 얘기가 나오는 순간 얼음의 심장은커녕 땡전 한푼 건질 수 없게 될 테니까 말이야.”
“그럼 그 분은 검은 바위성에 계십니까?”
“음, 있어.”
오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는 듯한 말투로 준에게 질문을 던졌다.
“진짜 그를 찾아갈 생각이야?”
“다른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지요. 전 얼음의 심장이 꼭 필요해요.”
오탁은 다시 한참을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하…그래. 그럼 날 따라오거라.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데려다 줄수는 있지만, 얼음의 심장을 거래할 수 있을지 아닌지는 순전히 너에게 달려 있다는 거야.”
……
서재를 나서 오탁은 준을 데리고 성내를 한참이나 걸어 성의 남쪽 구석에 있는 괴상망측한 건물 앞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여기가 고튼 그 자식이 사는 곳이야.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 번 말해주는 데…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거다. 바가지를 써도 보통 쓰는 게 아닐 테니까.”
* * *
오탁이 괴상한 건물의 문을 밀자, 새까만 가루가 온 하늘을 뒤덮었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이준은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서며 황급히 검은 송곳을 붙잡았다.
하지만 오탁이 팔을 흔들자 강한 바람이 나타나 검은색 가루를 전부 날려버렸고, 검은색 가루가 걷히자 쓰레기통 같은 건물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그 검은색 가루가 피부에 조금이라도 묻으면 일주일 동안은 온 몸이 근질거려 견딜 수 없게 되지. 이 정도는 가벼운 인사니까 신경 쓰지 말고…조심히 따라와. 절대 이 집안 물건에 손대지 말고.”
오탁을 따라 어두운 방안에 들어서자, 방문이 저절로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집안의 상태는 더욱 엉망이어서, 이제는 쓰레기통이라는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오탁은 계속해서 걸음을 옮겨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 건물의 가장 높은 층까지 이동했다. 마지막 계단을 지나자 이준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저기인가 보죠?”
그 때, 자신의 옷에 이상한 구멍이 뚫린 것을 발견한 오탁이 인상을 구기며 머리를 저었다.
“빌어먹을 놈이…이건 또 왜 이렇게 된 거야. 대체 제대로 된 연금술은 안하고 뭘 만든 거야 또!”
“제대로 된 연금술이 어떤 건데! 내가 한 것들도 다 제대로 된 것이구먼. 이 노인네는 왜 허구한 날 찾아와서 지랄이야. 이 몸이 연금술사 공회 부회장 따위라고 봐줄 것 같아?”
하지만 오탁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준의 손을 붙잡은 뒤 성큼성큼 복도 끝으로 걸어가 고튼의 목소리가 들려온 방의 낡은 나무문을 걷어 쳤다.
쾅!
“악!”
하지만 그가 걷어찬 것은 썩은 나무처럼 보이는 두터운 강철문 이었다.
“하하, 맛이 어떠냐. 늙은이! 저번에 내 문을 박살내준 대가다!”
“으아아…미친놈이!”
오탁은 분을 참지 못 하고 염력을 끌어올려 전력으로 두터운 철문을 때려 부쉈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준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펑-!
묵직한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지며 두꺼운 철문이 휴지처럼 구겨져 날아가자, 10년은 안씻은 것 같은 꼬질꼬질한 노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튼, 내가 당신 보물 창고에 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적어서 전부 밖에 공개 해줄까?”
“헤헤, 왜 이러실까……장난 좀 친 걸 가지고.”
“이준, 들어와.”
“어?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어? 무슨 속셈이야?”
준은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져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욕의 꽃? 혈정초? 쪽빛돌?”
“어이, 어이. 꼬마야. 지금 뭘 본거야? 내 보물들에 눈독 들이지 마.”
“어…죄, 죄송합니다. 고튼 대사님. 제가 여태 살아오면서 이렇게 귀한 것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것을 본 적은 처음이라서…가한제국의 황실 창고를 뒤져도 이런 광경은 못 볼 것 같아서요.”
준의 천연덕스러운 아부에 고튼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연신 웃음을 흘렸다.
“하하, 사실이긴 하지. 그래도 남의 입에서 들으니 기분이 좋구만. 근데 여기는 웬일이야? 빨리 말해. 이 몸은 바쁘다고.”
“나 말고 이 녀석이 당신한테 볼 일이 있어.”
오탁이 미간을 찌푸린 채 용건을 전하자 고튼은 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오? 그래? 난 이 꼬맹이를 모르는데 말이야. 혹시 뭔가 기이한 보물이라도 가지고 있나?”
“어…그게 아니고요. 고튼 대사님, 저는 보물을 팔려고 온 게 아니라…그…얼음…”
“없어! 없어! 사람을 잘못 찾아왔어. 나는 그런 물건이 없어!”
고튼은 준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 봐, 그만 억지 부려. 저번에 나한테 얘기하지 않았나? 다른 사람한테서 얼음의 심장을 얻어 왔다고…”
“꺼져, 멍청한 노인네. 앞으로 내 앞에 얼씬거리지도 마.”
버럭 화를 내는 것이 보니 오탁의 말이 사실인 것이 분명했다.
“나는 너를 여기까지 데려와서 만나게 했으니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이제 그 얼음의 심장을 어떻게 얻을지는 네 능력이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오탁은 더 이상 고튼을 상대하기 싫다는 듯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갔고, 고튼은 오탁이 나가자마자 막무가내로 소리를 질러댔다.
“몰라, 몰라! 꺼져! 얼음의 심장은 안돼! 어디 감히 귀여운 내 새끼를!”
“고튼 대사님, 저는 세상에 절대 성사되지 못할 거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래가 성사되지 못하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하, 물건이 꽤 있나 보지? 미리 말해두는데 염력 수련법 같은 건 내놓지 않는 게 좋아. 난 그따위 물건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건…희소성이 있는 진귀한 보물들이거든!”
바로 그 때, 가만히 고튼을 바라보던 준이 저장반지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든 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