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세 가지 준비물
약병을 받아 쥔 아라가 병마개를 열자 은은한 옥색이 나는 연금비약이 신비로운 빛을 내뿜었다.
“이게 진짜 연금비약이야? 역시 내가 일반 불꽃으로 약재들을 섞어 만든 것과는 비교가 안 되네…”
약병을 받아든 아라가 또 다시 울적한 표정을 짓자 준은 왠지 마음이 아팠다. 아마도 그녀에게 연금비약을 만들 능력이 있었다면…독술사가 되지는 않았으리라.
“됐어! 우울한 표정하지마! 그러라고 준 거 아니니까. 이 연금비약의 이름은 기력의 조각이야. 빠른 시간 안에 몸 속의 염력을 회복시켜주는 효과가 있어.”
준의 설명을 들은 아라는 강헌과의 싸움을 떠올렸다.
“아, 저번에 네가 강헌과 싸울 때 너무 오래 버틴다 했더니 이런 보물이 있었구나?”
소년은 아무런 말도 없이 빙긋이 웃더니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 보았고, 아라 역시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둘은 그렇게 한참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준은 자신이 어느새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오두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하늘 위에는 이미 파란 독수리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깼어?”
다행히도 아라는 아직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준은 무언가 결심한 듯 아라에게 걸어가 은빛성 경매장에서 낙찰받았던 저장 반지 중 하나를 그녀에게 끼워주었다.
“이별 선물이야. 이게 있으면 약재들을 보관하기가 훨씬 쉬울 거야.”
아라는 준의 선물을 건네받은 뒤 조심스럽게 자신이 채집한 약재와 칠색 독경 등을 모두 저장반지에 집어넣었다.
“너는 약재 안가지고 갈거야? 밖에 나가면 구하기 어려운 약재들도 꽤 많을텐데…”
“하하, 난 이미 다 넣어뒀어.”
“어휴…빈틈없기는…”
아라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짓고는 피리를 불어 자신의 마수를 호출했다.
“가자, 마지막 동행이야.”
두 사람은 나란히 파란 독수리의 등에 올랐고, 말없이 아스라이 멀어지는 오두막을 바라봤다.
* * *
천둥산 동쪽 변방의 산 봉우리.
준은 하늘에서 빙빙 돌고 있는 독수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다.
“여기서 헤어지자. 앞으로 인연이 된 다면 다시 만나겠지!”
“그래, 잘 지내!”
아라는 아쉬운 듯 한참 동안 손을 흔들고 나서야 파란 독수리와 함께 몸을 돌려 서쪽 하늘로 점이 되어 사라졌고, 준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
지금 준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성은 가한제국 동쪽의 검은 바위성으로, 가한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거대한 도시였다.
현재 준의 가장 큰 목표는 하루 빨리 검은 바위성에 도착하는 것 이었다. 이곳에서 타르 사막까지 걸어서 가려면 4-5달은 걸리지만, 검은 바위성의 민간 비행단을 이용하면 며칠이면 충분했다.
준은 일단 근처 마을에 들러 잠시 휴식을 취한 뒤, 그곳에서 가장 빠른 마차를 빌려 검은 바위성으로 향했다.
해질 무렵이 되자, 검은 바위들로 질서 있게 쌓아 올려진 도성의 거대한 성벽이 눈에 들어왔고, 준은 통행료를 지불한 뒤 순조롭게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자 갑자기 눈 앞이 훤해지며 대도시의 소란이 그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몇 달 동안이나 산에 쳐박혀 있던 그에게 갑작스런 도시의 소음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크게만 느껴졌고,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준이 잠시 멍하니 서있는 동안 머릿속에 약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선 하룻밤 묵을 만한 곳을 찾아보거라. 검은 바위성에 연금술사 공회가 있다면 찾아가서 연금술사 시험도 보도록 하고.’
‘연금술사 공회요?’
‘……’
‘그러면 제가 연금술사인게 밝혀지지 않나요?’
‘……’
‘거참…이상한 놈일세. 나는 처음부터 너에게 연금술사가 아닌 척 하라고 한적이 없다. 다 네놈이 알아서 감춘 것 이지. 그리고 연금술사가 두려움의 대상인 것은 실력이 강해서가 아니야. 연금비약을 기반으로 쌓은 탄탄한 인맥 때문이지. 일전에 나에게 원한을 품은 어떤 자가 투종 한 명, 투황 세명, 투왕 다섯명을 데려온 적이 있었다. 그 때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으냐?’
투종에 투황에 투왕이라니…듣는 것만으로 머리가 아찔해지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하셨는데요?’
‘내가 영혼의 메아리를 사용했지. 음… 영혼의 메아리라는 게 뭔지는 너도 곧 알게 될 테니까 설명은 생략하마. 그러자 투종 셋에 투황 여덟, 투왕 열둘에 투령 열여덟… 그리고 또 누가 왔더라… 여튼 그랬다. 그게 일류 연금술사의 무서움인 것 이지.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약로가 말한 정도의 인원이라면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 정도의 힘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준은 일류 연금술사의 무서움에 대해 실감하자 기대와 두려움으로 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일리가 있네요. 그럼 내일 연금술사 공회에 가보죠!’
‘음, 그리고 시간이 되면 이 곳 경매장에 가 보거라. 그리고 3레벨의 마정석이 있으면 사두고.’
‘3레벨 마정석이요?’
‘그래, 가능성은 낮지만 천지의 불꽃을 만났을 때를 대비해둬야지. 만에 하나라도 운 좋게 천지의 불꽃을 만나더라도 준비물이 없으면 아까운 기회만 날려버리는 꼴이니까.’
‘3레벨 마정석이면…… 피의 결정을 정제하는 데 필요한 마지막 재료를 말씀 하시는 거죠?’
‘그래. 피의 결정은 네가 이화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필수품 중 하나지. 그게 없다면 투황 수준의 강자라고 해도 천지의 불꽃을 손에 넣지 못 하니까. 그리고 피의 결정이 너의 몸 밖을 보호해주고, 얼음의 심장이 너의 몸 속을 보호해줄거다. 마지막 한가지는…납령이라는 것인데 이 물건은 네 몸 속에 특수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지. 바로 그 공간에 천지의 불꽃을 담아두는 것이야. 천지의 불꽃은 너무나 강력하기 때문에 완전히 연화시키지 전까지 그런 특수한 공간이 없으면 그것을 손에 넣으려는 자를 잿더미로 마들어 버리거든.’
약로의 설명에 준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천지의 불꽃은 그럴만한 가치가 있고도 남았다.
‘하지만 납령은 최상급의 납석에서만 찾을 수 있지. 그리고 최상급의 납석을 높은 레벨의 저장반지를 만드는데 쓰이는만큼 희소성이 매우 높은 물건이고…심지어 최상급의 납석이라고 모두 납령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 수준이면 천지의 불꽃을 찾는 것보다 재료를 모으는 것이 더 힘들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얼음의 심장이랑 납령은 대체 어디가서 찾는건데요…전 그런거 듣도보도 못 했다구요.’
‘납령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일전에 이화를 찾아 다닐 때 남겨놓은 것이 있어서 그걸 사용하면 될 것이야. 그러니 지금 필요한 것은 얼음의 심장과 3레벨 마정석이다.’
납령은 구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 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3레벨 마정석과 얼음의 심장 뿐 이었다.
‘얼음의 심장은 어디서 얻을 수 있는데요?’
‘극도로 추운 곳이거나 극도로 더운 곳……’
‘네?’
‘네가 운이 좋으면 다른 사람의 손에서나 경매장에서 얻을 수도 있겠지만…그런 일은 없다고 봐야 할게다. 제 정신이 박힌 놈이라면 그걸 돈받고 팔지는 않을테니까.’
‘음…만약 그것들을 준비하지 못한 상태에서 운 좋게 천지의 불꽃을 만나면…어떻게 해요?’
‘포기. 아무리 아쉬워도 할 수 없어. 셋 중 하나라도 없으면 만지는 순간 죽음이니까.’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은 없는 건가요?’
‘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물건은 내가 수 차례 실험을 거쳐 발견한 것이야. 만약 네게 이화를 연화시키는 성공률을 아주 크게 높일 수 있는 비법이 있다고 하면 세상의 모든 연금술사들이 와서 네 발바닥이라도 핥으려 들게다.’
약로의 말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아마도 그는 이 세 가지 재료를 찾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으리라.
‘알겠어요. 어떻게든 3레벨 마정석과 얼음의 심장을 구해볼게요. 근데…그렇게 구하기 힘든 물건을 구할 수 있다고는 말을 못 하겠네요.’
‘그래, 일단 오늘은 들어가서 하룻밤 쉬고 내일 연금술사 공회에 다녀 오거라. 그 다음에 여기 경매장 구경이라도 가보자꾸나.’
* * *
이른 아침부터 검은 바위성의 거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끔 호위무사들이 줄을 서서 지나가기도 했고, 갑옷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퍼져 도시에 소란을 더했다.
준은 약로의 말대로 연금술사 공회를 찾았고, 연금술사 공회의 건물은 마치 준의 약솥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소년은 등 뒤에 맨 검은 송곳을 한번 쓱 만져보고는 연금술사 공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앞에 도착하자 그를 한참 동안 관찰하던 무장한 장정 두 명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어이, 젊은이. 여기가 어딘지 알고 들어가려는 거야? 스승님의 추천서가 있어?”
“추천서?”
‘스승님, 추천서가 뭐에요? 그런 얘기 안하셨잖아요!’
준이 마음속으로 버럭 소리를 지르자 약로가 난처하다는 듯 말을 얼버무렸다.
‘그게…나도 모르겠구나…연금술사공회의 규칙은 제국마다 다르거든…나는 가한제국에 자주 와 보지 않아서…’
그 때, 등 뒤에서 진한 향기가 풍겨왔고, 이준이 자리를 비키자 작은 그림자가 입구를 지나 달려갔다.
“스승님, 빨리요!”
“아이쿠, 이른 시간인데 뭐가 급하다는 거야. 만석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준은 갑작스런 소란에 고개를 돌렸다가 노인의 가슴에 박혀있는 휘장을 보고 거기서 눈을 떼지 못 했다. 노인의 낡은 휘장에는 네 개의 은색 물결이 그려져 있었다.
노인은 준과 눈이 마주치자 다정하게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먼저 인사를 건넸고, 준은 4레벨 연금술사의 친절한 행동에 잠시 멍해졌다가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곁에는 여자 하나가 서있었는데, 나이는 스무살 정도로 보였고 작은 키에 한 눈에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보이는 보라색 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에 아무런 표식도 없는 것으로 보아 연금술사도, 투사도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당당한 태도로 문을 가로막고 있는 두 장정을 향해 걸어가 시비라도 거는 듯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길 좀 비켜 주시죠?”
“하하, 린셀 아가씨! 드디어 오늘 연금술사 시험을 보시는 건가요? 고작 3년 만에 연금술사가 되다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스승님이신 오탁 대사님도 대단하군요.”
두 사내의 태도나 여자의 옷차림으로 보아 그녀는 제법 잘 나가는 집안의 자제인 듯 했다.
“어서 가자 이녀석아, 그리고 오늘은 실수하지 말거라! 시험에서 실수를 하면 만석 그 영감탱이가 두고 두고 놀려먹을게야.”
“걱정 마세요, 스승님. 연금비약 한 알 정제하는 일이 뭐가 어렵다고요! 그 정도도 못하면서 어찌 제가 스승님의 애 제자라고 할 수 있겠어요?”
린셀이라는 여자는 4레벨 연금술사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연금술사 공회 건물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
“스승님, 방금 그 사람한테 왜 그렇게 친절하게 웃으셨어요? 스승님답지 않은데요.”
“허허, 그냥 저 아이가 뭔가 평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딱히 뭐라고 말은 못하겠다만…”
린셀은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젓고는 오탁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