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무투사와 투사의 차이
마음의 변화를 느낀 이준은 순간 정신을 바짝 차리고 번개같이 약병에서 호수의 약을 꺼내 꿀꺽 삼켰다.
호수의 약이 몸속에 들어가자 뼈 속까지 차가운 느낌이 내려가며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다.
전에 없이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낀 준은 온 정신을 집중해 보라색 불꽃을 움직였다.
바로 그 때…선두에 있던 노란 불꽃이 보라색 불꽃과 융합되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이야! 정말 진화하는 수련법이었어!’
이윽고 노란색 염력과 보라색 불꽃이 혈관의 마지막 부분을 통과하는 순간, 두 개의 불꽃이 하나가 되며 연한 노란색을 띠던 그의 불꽃이 연보라색으로 변했고, 더 이상 준의 혈관을 공격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염력이 흐르는 속도가 상승하며 그의 몸 전체를 완벽하게 관통한 뒤 다시 아랫배에 있는 염력 회오리 안으로 돌아갔고, 그의 염력 회오리 역시 연보라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
한참동안이나 눈을 감고 있던 제자가 갑자기 번쩍 눈을 뜨자, 눈부신 보라색 빛이 눈에서 번쩍이다 사라졌다.
“성공했어요!”
약로는 제자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하듯 길게 숨을 내 쉬더니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지금 준의 염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해져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준은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느끼고는 약로를 바라봤다. 갑자기 주위에 있는 모든 에너지가 한번도 느껴본적 없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소용돌이 치기 시작한 것 이다.
“스승님, 왜 이러죠?”
“허허허, 이놈! 왜 그러긴! 무투사가 되는게지!”
“어서 준비를 하거라. 이 기회를 놓쳐선 안돼. 그렇지 않으면 또 하염없이 기다려야 할게다.”
준은 진화한 자신의 수련법을 확인할 겨를도 없이 황급히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이윽고 천지 사이에 가득한 에너지들이 폭풍처럼 몰아치며 준의 몸을 향해 미친 듯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죽기 살기로 통제하려해도 지금 준의 실력으로는 너무나 급격하게 빨려 드는 에너지를 감당하기가 힘들었고, 결국 그는 자신의 몸에 흡수되는 에너지 중 일부를 제멋대로 흘러가도록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부의 에너지는 준의 혈관을 따라 흐르며 순수한 염력으로 전환되고, 나머지 에너지는 몸 곳곳에서 충돌을 일으키며 바늘처럼 그의 몸을 아프게 찔러댔다.
어찌됐든 급한대로 수습한 에너지들은 순수한 염력으로 전환되었고, 그로 인해 준의 회오리는 더욱 급격한 속도로 회전하며 주위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이…이런…’
결국 준을 둘러싸고 있던 에너지들은 완전히 통제를 벗어나고 말았고, 그러자 탁한 기운이 뿌옇게 몰려들어 그의 주위를 완전히 에워쌌다.
‘이 녀석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더러운 에너지를 염력 회오리에 집어 넣겠다는거야?‘
약로는 미간을 찌푸리며 준을 돕기 위해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본디 자연의 에너지란 거대하기 이를데 없지만, 그 에너지를 염력으로 전환해 사용하려면 그 에너지를 걸러내고 또 걸러내 가장 순수한 힘만을 몸 안에 받아들여야 했다.
하지만 지금 준은 갑작스럽게 자신의 역량 이상의 에너지가 몰려들기 시작하자 그 에너지를 걸러내는데 실패하고 있었다.
한편, 준은 생전 처음 겪는 거대한 에너지의 폭풍에 거의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고, 통제를 벗어난 에너지는 미친 야생마처럼 길길이 날뛰며 그의 혈관을 찢어버릴 기세로 그의 온 몸을 쑤셔대고 있었다.
“젠장!”
그리고 준이 약로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순간, 갑자기 준의 염력 회오리가 점점 더 짙은 보라색을 띠기 시작하더니 통제를 벗어난 에너지들이 점차 얌전해지면서 그의 염력 회오리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순수하게 정화된 에너지들이 그의 보라색 회오리 안으로 빨려들어가고, 준의 염력 회오리가 점점 더 작아지면서 농밀한 에너지로 넘실대기 시작했다.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준의 혈관과 뼈가 더욱 튼튼해지고 깨끗해지면서 준의 보라색 회오리는 주먹보다도 더 작은 크기로 변했고, 불과 몇 분 전까지만해도 연보라색이었던 그의 회오리는 어느새 선명하다 못해 눈이 아플 정도로 진한 보라색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그의 보라색 불꽃은 한참이나 더 며칠을 굶은 짐승마냥 미친 듯이 주위의 에너지를 흡수하더니, 놀랍게도 역회전을 하기 시작했다.
‘으으…이건 또 뭐야…제발 아무 일이 없어야 할텐데…’
하지만 준의 걱정과는 달리 역회전을 시작한 회오리는 그를 털끝만큼도 상하게 하지 않았고, 단지 새롭게 회오리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정화된 에너지들을 튕겨낼 뿐 이었다.
그리고 튕겨나간 에너지들이 그의 온 몸 구석구석으로 날아가 그의 전신에 스며들기 시작하자, 마치 새로 태어난 듯 온몸에서 힘이 용솟음치는 것이 느껴졌다.
결국 기의 회오리는 반대방향으로 십 여분을 회전하다가 천천히 멈추섰고, 준의 주위를 방벽처럼 감싸고 있던 두터운 에너지의 회오리가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준을 둘러싼 에너지가 모두 흩어지고, 소년이 눈을 뜨자 머리카락과 옷이 바람에 날리듯 펄럭거렸다.
“껄껄! 축하한다!”
* * *
준의 옷은 폭풍을 만난 듯 부풀어 오른채로 한참을 펄럭이다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소년은 당장이라도 일어나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싶었다.
무투사는 투사의 서열 중 아래에서 두 번째에 속하는 것이니 어찌보면 별 것 아니라고도 볼 수 있었지만, 준의 또래에서 무투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였다.
한참동안이나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던 이준이 오른손을 내밀어 주먹을 쥐자 보라색 염력이 그의 몸 전체를 얇게 감싸고, 전신에서는 폭발할 듯 충만한 기운이 용솟음 쳤다.
‘강헌과 싸울 때 봤던 염력 방어막이야…이제 나도 쓸 수 있어!’
게다가 하늘사자의 불꽃을 삼킨 덕분인지 그의 염력 방어막에서는 조그마한 불씨가 떠다니고 있었다.
“끌끌…요놈아. 정신차리고, 이제 네 수련법이 얼마나 진화했는지도 좀 살펴보거라.”
스승의 말에 자신의 염력 회오리를 살펴보던 준은, 그 속에서 십 여 방울의 액체가 물속을 노니는 물고기처럼 자신의 회오리 안을 떠다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투사에서 무투사로 올라가게 되면 풍선처럼 부푼 염력이 단순한 염력 회오리보다 더욱 짙고, 복잡하고, 순수한 액체로 변화하게 되는데, 지금 준에게도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 이었다.
준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약로를 향해 어깨를 으쓱하더니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4격 중이에요. 고작 한 단계 올랐어요.”
“4격 중이라고? 허허, 예상했던 대로구나”
하지만 약로는 크게 실망하지 않은 듯 준을 위로했다.
“수련법을 진화시키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리고 투기 대륙에 그런 에너지를 가진 것은 천지의 불꽃 뿐이지. 본래 너의 그 보라색 불꽃은 천지의 불꽃이 아니니, 그 정도라도 대단한 성과다. 게다가 불개는 같은 레벨의 수련법 중에서는 항상 최상의 수준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니, 4격 중 레벨의 수련법 중에서는 아마 비교할만한 수련법이 거의 없을게다.”
약로의 말을 들은 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음을 급하게 먹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은가.
“그보다, 네가 진정한 무투사가 되었으니 이제 천둥산을 벗어날 때가 왔구나.”
”그것 참 잘됐네요. 저도 이제 이곳이 지긋지긋해지던 참이었거든요. 이제 나설아 그 계집과 약속한 시간도 8개월 밖에 남지 않았기도 하구요. 하루라도 빨리 실력을 올려야죠. 그 계집도 제법 실력이 올랐을테니까요.“
준은 나설아의 실력이 얼마나 증가했는지 내심 불안한 듯 했다.
“허허, 걱정 말거라. 대투사까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그 때까지 네 실력은 또 진보해 있을테니까. 가한 제국에서 이 몸보다 나은 스승은 없으니 그만 불안해 하거라.”
“헤헤, 당연하죠. 저는 처음부터 스승님의 능력을 의심한 적이 없어요!”
준은 한 번도 약로를 의심한 적이 없다는 말이 진짜인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요놈이…갈수록 아부만 느는구나. 일단 내일 이곳을 떠나 타르 사막으로 출발하는 것으로 알고 있거라. 그곳에서의 수련은 천둥산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될 것 이라는 것도 머릿속에 잘 새겨두고.”
약로의 말에 준은 마을을 떠나기 전 아버지가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타르사막이라…그곳에는 제 형님들도 있는데…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래, 그럴 수 있다면 그러자꾸나. 일단은 돌아가서 푹 쉬고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도록 하자.”
“네!”
말을 마친 약로는 반지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무언가 중요한 말이 남은 듯 다시 밖으로 나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예전에 타르사막을 찾았을 때 사막 어딘가에 천지의 불꽃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운이 닿는다면 그것도 한 번 찾아보자꾸나.”
약로의 마지막 말에 소년은 신이 난 듯 방방 뛰며 산굴을 벗어났다.
* * *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오는 초저녁, 오두막에서 은은한 빛이 퍼져 나오기 시작하고, 하얀색 치마를 입은 여인 하나가 작은 의자에 앉아 무언가를 읽고 있다.
그녀는 점점 가까워지는 익숙한 발소리에 고개를 들더니 밝은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오늘 수련은 다 끝났어? 집 안에 따뜻한 음식이 있으니 얼른 먹어.”
준은 아라를 바라보며 밝게 웃다가 그녀에게 다가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아마 내일 떠날 것 같아…”
“그래…”
아라가 서운한 표정을 짓자 준은 그녀를 달래주기 위해 더욱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이곳을 떠나 투기대륙을 돌아다닐 거라고 했지? 어딜 가볼 생각이야?”
“나는 가한제국을 떠나면 구름제국에 가 보려고 해. 그런 다음 또 여기저기 가보려고…”
“구름제국이라…나는 타르 사막으로 갈 것 같아. 서로 반대 방향이네.”
“그러게…”
준의 말에 아라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지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음…몸 조심해. 아마 앞으로 나는 이곳에 다시 돌아오지 않을거야. 음…아니다…언젠가 엄청난 독술사가 되면 다시 돌아오겠지. 그리고 이곳에서 마지막을 맞을거야.”
그녀의 말에는 깊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을 거야. 재난독체가 무섭기는 하지만…넌 독한 여자니까 참을 수 있지 않을까?”
준은 무거운 분위기를 깨기 위해 농담을 던졌지만, 아라의 표정은 조금도 밝아지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 정성스레 포장한 작은 주머니 하나와 약병을 들고 나왔다.
“이 약은 낙백산이라는 약이야. 칠색독경에서 찾은건데, 지금 내가 만들 수 있는 가장 높은 레벨의 약이야. 만약 네가 이길 수 없는 강자를 만나게 되면 이 약을 상대한테 뿌려. 상대가 대투사라고 해도 무방비 상태에서는 이 약가루가 뿜어내는 냄새 때문에 잠시 시력을 잃게 될테니까 그 기회를 타서 도망쳐.”
준이 눈을 반짝이며 복주머니를 열려하자, 아라가 그의 손목을 잡아채며 눈을 흘겼다.
“독약은 아군 적군을 구분 못 해. 그 독약을 쓸 때는 꼭 약병에 든 해독약을 먹도록 해. 아니면 너도 똑같이 시력을 잃게 되니까.”
소년은 그녀가 건네준 선물을 저장반지 안에 넣었다. 그러자 아라는 가슴속에서 또 다시 약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타르사막은 메두사, 뱀 인간들이 우글거리는 지역이야. 그리고 이건 내가 정제한 해독환이고…이걸로 뱀독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실력이 별로 강하지 않은 뱀 인간의 독이라면 꽤 효과가 있을거야. 이게…내가 줄 수 있는 전부야.”
준은 또 다시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선물을 저장반지 안에 집어 넣은 뒤 기력의 조각이 들어있는 약병을 꺼내들었다.
“청산마을에서는 진짜 연금비약을 본 적 없지?”
연금비약이라는 말에 아라는 눈을 반짝이며 준의 손에 들린 약병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이 안에 연금비약이 들어있다고?”
“응.”
준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머리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약병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