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방문
이윽고 아라는 다급히 가슴 속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더니 그 속에서 붉은색 액체를 몇 방울 떨어뜨려 이준의 손바닥에 문질렀다.
“뭐 하는 거야?”
“방 안에 퍼진 향은 만성 독약이야. 몸속에 들어가면 죽는 수가 있다고.”
“뭐?”
“괜찮아. 내가 만든 해독제를 바르면 면역력이 생겨. 방금 바른게 그 해독제고.”
“방 안에까지 독약을 퍼뜨릴 줄은 몰랐네……”
아라는 안심한 듯 웃으며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를 뒤로 넘겼다.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실력이 없으니 이런 방법으로 내 몸을 지킬 수밖에.”
“뭐? 이런 독을 방안에 뿌려놓고 사시는 분이 무슨 약한 소리를…그보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준의 질문에 아라는 즉시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바깥 쪽을 바라봤다.
“날 감시하고 있어.”
“이런”
“늑대 머리 용병단에서 내가 보물을 얻었다는 소문을 온 마을에 퍼뜨렸거든 이 만약 상회의 주인도 그 물건에 눈독을 들였지. 그래서 내 손에서 칠색독경을 빼앗으려 혈안이 되어 있는데 매번 내가 이리저리 둘러대면서 숨기고 있는 중이야.”
아라의 설명에 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왜 안 가고 여기 있는 거야? 독약을 만드는 능력이 있잖아.”
“칠색독경을 연습하려면 대량의 약재로 실험을 해야 해. 그리고 여기는 그 연습 장소고. 하지만…오늘 떠나야 할 것 같아. 그 자식이 나한테 사흘이라는 시간을 줬는데 오늘이 그 마지막 날이거든.”
아라는 상 위에 놓여있는 약가루들을 작은 병에 밀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만날 때 마다 사람 놀라게 하는구나. 천둥산 내부에서 살아나오다니…게다가 실력도 엄청 높아진 것 같은데?”
“하하, 운이 좋았을 뿐이야.”
준은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자. 늑대 머리 용병단에 빚을 갚아줘야지.”
바로 그 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아라님, 안에 있나요?”
질문을 던진 사내는 아라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문을 벌컥 열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이런…이럴거면 안에 있냐고 왜 물어보는거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내와 눈이 마주친 준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라님, 이 분은?”
중년의 사내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고 상 위에 있는 물건을 정리하는 아라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이준이라고 합니다.”
소년의 짤막한 대답에 중년의 남자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준을 환대하는 척 했다.
“이준? 천둥산 안쪽까지 쫓겨 들어갔다는? 아니, 여긴 어떻게…아니, 그보다…하하, 대단하시군요. 죽음의 산으로 불리는 곳에서 혼자 몇 달씩이나…”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제가 아라와 함께 나가야겠다고 하면…역시 곱게 내보내 주지는 않겠죠?”
준이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자 사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즉시 문 밖에 있는 호위들을 불러들였다.
“네, 안 될 것 같군요. 저희도 그녀에게 볼 일이 있거든요. 그리고 기왕 오신김에 잠시 머물다 가시지요. 이준님에게도 궁금한 것이 있어서요.”
중년의 사내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서자 무기를 든 호위 무사 넷이 입구를 막아섰다. 그들의 살벌한 태도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준이 산굴에서 얻었다는 보물까지 얻어내려는 속셈인 듯 했다.
“주석 선생님, 선생님 오른손바닥을 한 번 보세요. 조금 퍼렇게 변하지 않았나요?”
바로 그 때, 짐을 다 정리한 듯한 아라가 보자기를 어깨에 묶으며 중년의 사내에게 말을 건넸다.
그녀의 한 마디에 중년의 사내는 황급히 자신의 오른손을 펼쳐 내려다 보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이미 그의 손바닥에 멍이 든 것처럼 퍼런 반점이 생겨나 있었다.
“너, 너 설마 나한테 독약을……”
“하하, 연약한 여자라서요. 제가 선생님의 호위들과 싸워서 이기기는 힘들지 않겠어요?”
“이 년……!”
아라의 여유로운 태도에 주석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가 만든 독약의 효과에 대해서는 주석 선생님도 잘 아시죠? 제가 해독약 처방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앞으로 한 달도 안 돼 온 몸에 독이 퍼질거에요. 운이 나쁘면 죽을거고, 운이 좋으면 정신이 이상해지거나 어딘가 불구가 되겠죠. 그건 제가 보장할게요.”
목숨과 보물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주석은 가까스로 화를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해독약 처방이 먼저야. 그럼 가게 해 주지.”
“제가 고수약재에 이렇게 오랜 시간 있었는데 주석 선생님이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시는지 아직도 모를까요? 내보내주시면 처방을 드리죠.”
“너……”
아라의 태연한 모습에 주석은 화가 나서 얼굴이 벌개졌지만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호위들에게 손짓을 한 뒤 몸을 돌렸다.
“가자.”
주석이 뒤로 물러서자 아라가 머리를 돌려 이준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어휴…역시 보통이 아니야.’
준은 해맑게 웃는 아라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척 들어 보인 뒤 그녀와 함께 방을 나섰다.
잠시 후 그녀가 가슴 팍에서 피리를 꺼내 불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독수리가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모습을 확인한 준은 아라를 들어 올린 뒤 허공을 빙빙 돌다 천천히 내려오는 독수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아라는 안전이 확보되자 씨익 웃으며 해독제의 처방을 성의없게 툭 집어던지고는 그대로 허공을 가로질러 자리를 떴다.
* * *
준은 독수리의 등 위에 올라 점점 작아지는 마을을 내려다 보았다.
아라는 손으로 독수리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멍하니 지상을 내려다보는 준을 바라보고는 장난스레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 소란이가 탐나?”
소년은 아라의 질문에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욕심나는 건 사실이지만 뺏을 생각은 없어. 뺏고 싶어한다고 뺏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준은 일반적으로 마수와 짝을 이루게 되면 그 마수는 다른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마수들은 포악하긴 하지만 일단 우정을 쌓고 나면 절대로 배신하지 않아. 그런 면에서는 인간보다 나을지도 모르겠네.”
아라의 말에 준도 공감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였다.
“그런데, 늑대 머리 용병단의 본부는 어디야?”
“늑대 머리 용병단 본부는 청산 마을 남쪽에 있어. 그쪽 지역은 거의 대부분 그들이 장악했다고 보면 돼.”
“청산마을에 오래 살았으니 늑대 머리 용병단의 수와 실력은 대충 알겠지?”
준의 질문에 아라는 당연하다는 태도로 말을 이어나갔다.
“늑대 머리 용병단은 청산마을에서 만들어졌고, 이제 10년 정도 됐지. 핵심인원은 70~80명, 실력은 2성 투사에서 5성 투사까지 다양해.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세 명의 단장. 재필은 네 손에 죽었다고 했으니 강호와 강헌 둘이 남은 셈이지. 이만하면 충분하지?”
“강호? 오는 길에 만나서 저승으로 보내줬어. 그러니 그 놈도 이제 전력외야.”
아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준을 몇 번이나 훑어봤다.
“뭐? 강호는 9성 투사인데? 그럼 너는 그 이상이라는 소리? 몇 달 사이에?”
“하하.”
소년은 민망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늑대 머리 용병단에서 너와 겨룰만한 사람은 강헌 한 명이라고 보면 되겠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할거야? 네 적수가 못된다고 해도 수가 너무 많다고.”
아라의 말을 들은 준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준의 표정을 보더니 무슨 뜻인지 눈치채고 즉시 가슴 팍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들었다.
“너…역시 너도 보통 꼬마는 아니야. 자, 이게 내가 이번에 새로 만든 독약이야. 안타깝게도 아직 미완성이라, 한 번에 그 정도 수를 죽이거나 할 수는 없어. 하지만 실력이 5성 이하인 사람들이라면 잠깐 동안 전투력을 잃게 만들 수는 있어. 내가 하늘에서 이 약을 뿌려줄게.”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또 다른 약병을 하나 꺼내들어 준에게 내밀었다.
“이건?”
“이건 해독약. 네가 먼저 내려가서 주의를 끌면 내가 약을 뿌릴거야. 모여있지도 않은데 뿌리면 괜한 약만 낭비하게 될 수 있으니까. 그럼 너는 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싸울 수 있는거지.”
“음…”
준은 아라에게 건네받은 약을 잠시 구경했다. 아라는 연금술사가 아니었으니 아마도 이 약은 여러 가지 약초를 섞은 뒤 일반적인 불로 제조해낸 것 같았다.
그는 약을 구경한 뒤 단숨에 해독약을 입 안에 넣고 꿀꺽 삼켰다.
“강헌의 실력에 대해 자세히 알려줘. 그가 익힌 염력 수련법이나 무투기에 대해서도 알려주면 더 좋고.”
“강헌의 실력은 아마 2성 무투사쯤 될 거야. 그가 익힌 염력 수련법은 ‘바람의 죽음’이라고 불리는 수련법이고, 4격 상 레벨의 수련법으로 알고 있어.”
준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아라의 이야기를 머리에 새겼다.
“그리고 강헌이 주특기로 하는 무투기는 세 가지. 그 중 하나는 공격 투기이고, 하나는 방어 투기, 나머지 하나는 무술투기야. 그 세 가지 모두 4격 상의 투기고.”
아라는 말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는 준의 표정을 보고 왠지 안심이 되었다. 지금 준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때? 이길 자신이 있어?”
“좋은 구경할 준비나 해.”
* * *
늑대 머리 용병단 본부.
“이게 이준이 한 짓이라고?”
강헌은 처참한 모습으로 죽음을 맞이한 강호의 시체를 앞에 두고 분노로 온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네, 단장님…놈이…살아있었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천둥산이야! 천둥산! 안쪽에 2레벨은 물론이고 3레벨 이상의 마수들도 우글거리는 곳이라고!”
하지만 윽박을 질러도 사실은 사실이었다. 강헌의 고함소리에 기가 죽은 사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신이 목격한 것을 이야기했다.
“정면 승부였는데…강호 단장이 순식간에 쓰러졌습니다. 제대로 된 반격 한번 하지 못했고…아주 일방적인 승부였습니다. 제가 보기에는…분명 9성 투사 이상의 실력이었습니다.”
부하의 보고를 듣던 강헌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느라 몇 번이나 주먹을 움켜쥐었다.
“시끄러워! 닥치고 밖에 나가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놈의 흔적을 찾아라. 이번에 반드시 놈의 숨통을 끊어야 한단 말이다!”
바로 그 때 그 때, 한 용병이 급히 문을 열고 헐레벌떡 강헌에게 달려왔다.
“단장님, 이준이 왔습니다!”
“뭐라고?”
그 사내의 말에 자리에 있던 모든 용병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몇 명이나 왔던가?”
“그게…혼자 왔습니다!”
“뭐? 혼자 왔다고?”
“예!”
혼자왔다는 한 마디에 강헌의 입 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하…미쳐버리겠군. 우리를 어지간히 우습게 본 모양이구나. 강재! 사람들을 불러 대문을 막아라. 오늘 그 놈을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을테니.”
……
용병단 본부의 입구로 걸어간 강헌은 준을 발견하자마자 웃음을 터뜨렸다.
“미친놈, 정말로 혼자 왔어?”
대문 입구에는 검은 옷을 입은 소년 하나가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서있었고, 그의 주위에는 이미 십 여명의 용병들이 나자빠져 있었다.
“강헌 단장님? 오랜만이네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당당하게 걸어 오는 모습을 발견한 강헌이 손을 번쩍 들자, 거대한 철문이 내려와 출구를 완전히 틀어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더 많은 용병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나타나 준을 에워쌌다.
준은 주위를 둘러보며 용병들의 수를 대충 세어보다가 이내 포기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