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강호
……
달이 뉘엿뉘엿 기울고 반대 편에서 해가 솟을 무렵, 준은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왔다가 이미 야영지를 정리하고 있는 카은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다가가 그들을 거들었다.
“어쭈, 이제 일어났어? 우리는 힘들게 밤새 교대로 보초를 섰는데…너는 편하게 잠만 잘 자더라. 도련님이 따로 없네. 참.”
소녀는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끊임없이 준에게 시비를 걸어왔지만, 준은 그녀를 무시하고 조용히 다른 사람들을 도왔다.
하지만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이준의 태도가 그녀를 더욱 화나게 만들고 있었다.
대충 정리가 끝나자 이준은 그 사람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한참을 걸은 후 앞에 보이는 넓은 길을 발견하자 준은 저도 몰래 웃음이 나왔다.
‘지난번에 도망치다가 지나 온 곳이군.’
“카은 아저씨, 여기서 각자 갈 길을 가도록 하죠.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준 자네 청산마을에 가는 것 아니었나? 우리랑 같은 방향인데 같이 가는게 낫지 않겠어?”
준은 웃으며 머리를 저었다. 크게 기분이 상하거나 않았지만, 쉬지 않고 쏘아붙여대는 라엘이 어지간히 귀찮았기 때문이다.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아직 할 일이 좀 남아서요. 반 나절 정도 더 있다가 가야 될 것 같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가요, 가요. 카은 삼촌. 어차피 짐만 되는 녀석이잖아요.”
라엘이 또 다시 준을 씹어대자 민망해진 카은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작별인사를 하고 고개를 돌렸다.
“재수 없게, 왜 하필 여기서 저 녀석을……”
자리를 뜨려던 이준은 카은의 말을 듣고 도로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먼 곳에서 말을 탄 사람들이 줄지어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고 있었고, 그 바람에 행인들은 도망가기에 바빴다.
“저 자는 누구에요?”
준은 제일 앞에 선 바짝 마른 남자를 가리켰다.
“늑대 머리 용병단 2단장, 강호. 저 자식을 만날 때마다 좋은 일이 없어. 근데 실력차가 나니 할 수 없지…놈은 9성 투사니까.”
“늑대머리용병단의 2단장이라고요?”
소년은 카은의 말을 듣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 또 저 녀석이네요. 카은 삼촌, 우리 빨리 가요. 빨리요!”
말을 탄 남자가 이쪽으로 뛰어오는 것을 발견한 라엘이 황급히 자리를 뜨려했지만 이미 비쩍 마른 사내가 지척에 와있었다.
“어이쿠, 이게 누구야? 흑표 용병단의 카은 아니신가? 이번에 또 천둥산에 들어갔다던데, 수확은 좀 있었나?”
강호의 비아냥에 카은은 대꾸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라엘은 점점 더 예뻐지는구나…참 예뻐.”
강호의 음흉한 시선을 느낀 라엘은 사시나무 떨 듯 전신을 바들바들 떨며 카은의 뒤에 몸을 숨겼다.
“오늘은 내가 급한 일이 있어서 너희들과 놀아 줄 시간이 없구나, 하지만 다음에 만나면 그냥 보내주지 않을 거야, 하하!”
강호는 다시 한번 라엘을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만 말이 한걸음을 떼기도 전에 묵직한 폭발음과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번개처럼 말 위에 오른 강호를 향해 날아들었다.
검은 그림자는 순식간에 말 머리 위에 나타나 몸을 홱 돌리며 오른발로 마른 남자의 턱을 힘껏 걷어찼고, 그 바람에 강호의 몸이 공중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땅에 철퍼덕 떨어졌다.
“푸웁!”
그림자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몸을 날려 강호의 가슴을 짓밟았다.
“잘 만났군요. 하나 하나 찾아가기 귀찮았는데.”
카은 등은 순식간에 피를 뿜으며 쓰러진 강호의 모습에 너무 놀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지금 강호를 밟고 있는 사람은 바로…어제 밤에 만난 그 염력 8단의 의술사였다.
카은 뒤에 몸을 숨긴 라엘도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충격을 받은 듯 몇 번이나 준과 강호를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강호는 그녀의 아버지보다 강한 사내였다. 하지만 자신이 어제부터 하루 종일 시비를 걸고 비아냥거린 소년이 그 강호를 한 방에 제압한 것 이다.
“콜록…콜록…”
강호는 이준의 일격에 정신을 잃었다가 가슴 위에 느껴지는 묵직한 통증에 정신을 차렸다.
“너 내가…누군지…”
“늑대머리용병단의 2단장?”
“그런데…감…”
“미안하지만 당신의 신분을 알아서 이러는 거야.”
이준은 발아래에서 꿈틀대는 강호를 다시 한 번 짓밟았다.
강호는 자신을 자근자근 밟고 있는 소년의 얼굴을 노려보다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새파랗게 질려 소리를 질렀다.
“이준…? 천둥산 안쪽으로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가 있지?”
강호의 말이 떨어지자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늑대머리 용병단이 모든 인원을 동원해 이준이라는 소년을 천둥산 안쪽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은 청산 마을에서는 꽤나 유명한 이야기였다.
“이준? 늑대 머리 용병단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그 이준?”
카은은 더욱 놀란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죽여!”
사람들 앞에서 치욕을 당한 강호가 분을 참지 못 하고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리자, 그의 부하들인 다급하게 무기를 꺼내 들고 이준을 향해 달려왔다.
강호는 준의 시선이 부하들을 향하자마자 즉시 염력을 끌어 모았다. 하지만…
쾅!
무시무시한 폭발음과 함께 강호의 가슴에서 노란색 염력이 폭발하고, 준은 이미 바람처럼 몸을 날려 늑대 머리 용병단의 수하들을 향하고 있었다.
강호는 다시 한번 시뻘건 피를 분수처럼 뿜은 뒤 창백해진 얼굴로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등 뒤에 매고 있던 쇠몽둥이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가 이준을 향해 몸을 날리기도 전에 이미 상황은 끝나 있었다.
강호가 쓰러진 몸을 일으켜 쇠 몽둥이를 집는 그 짧은 시간동안 이미 이준은 시커먼 송곳을 휘둘러 5성 투사 네 명을 쓰러뜨리고 강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큭…”
소년은 강호와 눈이 마주치자 검은 송곳을 가볍게 휘두르며 다시 한 번 발을 굴렀다. 다시 한번 폭발음과 함께 그의 몸이 화살처럼 날아들자, 강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황급히 쇠몽둥이를 휘둘렀다.
쾅!
쇠 몽둥이와 검은 송곳이 맞부딪히는 순간, 강호는 거짓말처럼 자신의 두 발이 땅속으로 박히는 것을 느끼고 사색이 되었다.
이윽고 준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감돌자, 노란색 염력이 검은 송곳을 감쌌고, 그와 동시에 강호의 손에 들려있던 쇠몽둥이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자신의 무기가 허무하게 잘려진 것을 본 강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몸을 웅크리더니 두 발로 땅을 박차고 급히 뒤로 내뺐다.
“어딜…”
쾅!
또 다시 귀가 찢어지는 듯한 폭발음이 들리고, 강호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의 등 뒤에 준의 발이 날아들었다.
“풉…!”
발차기 한 방에 9성 투사가 검붉은 피를 뿜으며 힘 없이 나뒹굴자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모든 이들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강호는 바람에 날린 쓰레기마냥 한참이나 힘 없이 바닥을 구르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그의 눈에는 시뻘겋게 핏대가 서 있었다.
“이준, 언젠가 내 손에 잡히면…”
강호가 울컥 거리며 목을 넘어오는 피를 삼키며 입을 열자, 이준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코웃음을 쳤다.
“풋…언젠가는 무슨 얼어죽을. 내 생각에는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나갈 걱정이나 하는게 맞을 것 같은데?”
소년의 싸늘한 한 마디에 강호는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것 같았다. 이준이 내뿜고 있는 살기는 한치의 에누리도 없는 진심이었다.
그 때 강호의 눈에 문득 라엘과 흑표 용병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같이 있었지…’
강호의 시선이 자신들을 향하자 카은 등은 위험한 낌새를 느끼고 급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그러나 강호의 목표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멍하니 서있는 라엘 이었다.
“라엘! 조심하거라!”
카은의 고함 소리에 라엘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강호를 바라봤다. 그러나 그녀는 사시나무 떨 듯 덜덜 떨며 달아날 생각조차 하지 못 하고 있었다.
그 사이 강호는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이동해 있었고, 라엘은 너무나 겁을 집어 먹은 나머지 하얗게 질려 털썩 주저 앉고 말았다.
쾅…!
하지만 강호가 막 라엘의 손목을 움켜 쥐려고 하는 순간, 둘 사이에 시커먼 그림자가 끼어들었다.
“늑대머리용병단은 과연 쓰레기들만 모였군.”
쾅!
눈 깜짝할 사이에 시커먼 송곳이 번개처럼 날아들어 강호의 가슴을 강타하자, 뼈가 으스러지는 섬칫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강호의 입에서 새빨간 피와 함께 내장이 튀어나왔다.
쾅!
강호는 그대로 몇 미터나 날아가 들판에 서 있는 나무에 쳐박히며 그대로 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준은 차가운 눈으로 강호의 시신을 바라보다가 검은 송곳을 다시 등에 매고 카은에게 목례를 한 뒤 천천히 청산마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오랜만에 사람들이 북적이는 풍경을 보자 준은 자기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고 말았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하하…몇 달만 더 산에 있었으면 정신이 이상해졌을지도 모르겠어.’
준은 지나가는 행인을 하나 붙잡고는 고수 약재의 위치를 물은 뒤 그 사람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몇 개인가 더 지나자 시끄러운 소리가 차츰 잦아들고, 작은 골목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가니 특이하게 생긴 별장 같은 집이 눈에 들어왔다.
별장의 입구에는 열 댓 명의 무장한 호위들이 험악한 표정을 하고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런…’
준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별장을 빙 돌아 조심스레 담을 넘었다. 별장 안에도 호위가 몇 정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아직 침입자를 발견하지는 못 한 듯 했다.
소년은 몸을 숨긴 채 조심스레 안쪽으로 들어가 시녀복을 입고 있는 소녀 하나를 붙잡았다.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소녀를 보며 이준은 조용히 질문을 던졌다.
“아라가 여기 있어?”
“읍, 으응……”
이준의 손에 입을 막힌 소녀는 겁을 집어먹고 몇 번이나 머리를 끄덕였다.
“아라가 어느 방에 있지? 똑바로 대답해. 허튼 수작부리면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
이준의 살기 등등한 목소리에 어린 소녀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방 하나를 가리켰다.
툭!
아라의 행방은 알아낸 준은 그 소녀의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시킨 후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기고 조심스레 아라가 있는 방으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몇 번인가 호위를 피해 몸을 숨기고 방에 접근했지만, 입구에도 네 명의 호위 무사가 방을 지키고 있었다.
“보아 하니 편히 지내지 못하나 보군.”
준은 건물 밖을 둘러보고 창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아라가 있는 방 뒤에는 호수가 붙어있었는데, 뒤쪽이 호수라서 방심한 탓인지 그 쪽에는 감시가 붙어있지 않았다.
그는 호숫가 둘레에 있는 나무 울타리를 밟고 살금살금 몸을 움직여 아라가 있는 방의 창문을 통해 방안에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약초향이 풍겨왔다. 준은 분홍색 커튼 뒤에 여자 하나가 서성이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겨 그 안을 엿보았다.
커튼 안에 마련된 공간에서는 하얀색 치마를 입은 여자 하나가 머리를 숙이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약가루를 분류하고 있었다.
하얀색 치마를 입은 여자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눈치챈 듯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가 자신의 앞에 있는 소년을 발견하고는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감시 당하고 있는 거야?”
이준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자, 아라는 황급히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쉿, 조용히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