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74화 (74/818)

제74화. 9성 투사

은지는 손으로 소년의 몸을 받쳐 천천히 풀숲에 눕힌 뒤 이마를 흥건하게 적신 땀을 닦아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잠에 빠진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저은 뒤 손을 뻗어 이준의 손가락에서 저장반지를 빼냈다.

“고마워…”

은지는 준의 저장반지에서 하늘 사자의 수정을 회수한 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윽고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얼굴을 붉히며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그녀는 옷 속에 입고 있던 금속 갑옷을 벗어 내려놓고는 부랴부랴 다시 옷을 걸치고, 준의 머리 옆에 갑옷을 내려놓았다.

“이 바다의 갑옷은 6레벨 바다 마수의 뱃속에서 나온 기이한 금속으로 만든 갑옷이야. 이 갑옷의 방어력은 주인의 힘에 따라 달라지지만…지금 네 실력이라도 무투사의 공격 정도는 쉽게 막을 수 있겠지. 네가 여러 번 나를 도와 줬으니 너한테 주는 감사의 표시라고 할게.”

그녀는 몸을 일으켜 자리를 뜨려다가 다시 준을 돌아보고는 저장반지에서 두루마리 두 개를 꺼내 갑옷 위에 올려두었다.

“이건 3격 상의 불 속성 수련법과 3격 중 무투기야…도움이 됐으면 좋겠네.”

은지는 그렇게 작별인사 대신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꺼내놓고는 새근새근 잠이 든 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푸른 날개를 펼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 * *

준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석양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천천히 눈을 뜨고 손가락을 움직여 보니 온 몸에서 농밀한 에너지가 넘쳐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이제까지 자신이 느껴왔던 강력한 기운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새로운 기운은 파도처럼 몰아친다거나, 격렬한 힘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묵직하고 안정된 것이 마치 오래된 바위 같은 단단함과 무게감이 있었다.

소년은 왠지 모르게 몸 안이 개운하고 편안해진 것을 느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 때 그의 눈에 곱게 개어놓은 하늘색 금속 갑옷과 두루마리 두 개가 들어왔다.

준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 물건들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벌써 간 거야?”

그는 허탈하게 웃으며 나무에 기대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느릿느릿 손을 뻗어 금속 갑옷을 집어 들었다.

갑옷에서는 차가운 기운은 커녕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고, 겉보기와는 달리 무척이나 부드러워서 마치 비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갑옷을 천천히 펼치자 하늘 사자의 발톱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쩝…참 정 없네. 인사라도 하고 가지.”

준은 천천히 손을 놀려 은지가 남겨놓은 두루마리를 저장반지 안에 집어넣은 뒤 손가락에 끼워진 검은색 반지를 힐끗 바라봤다.

그러자 반지가 부르르 떨리며 약로가 나타나 묘한 웃음을 띠며 준에게 말을 걸어왔다.

“요놈 보게…뭔가 달라진거 모르겠느냐?”

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눈을 감고 자신의 염력을 느껴보았다.

“말도 안돼…어떻게 갑자기 9성 투사가 된거죠? 설마…그 액체 때문에?”

“허허…그 여자에게 고마워 하거라. 하늘 사자의 정수에 담긴 기운은 강한만큼 무척이나 사납고 광폭하지. 그 여자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너는 그 기운을 다스리지 못 하고 타 죽었을게야.”

“아…”

소년은 은지의 도움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동시에 이렇게 큰 도움을 주고 말도 없이 떠나버린 그녀의 태도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앞으로 한 달간은 적어도 1레벨 상급의 마수 다섯 마리 이상을 사냥해야 한다. 전투만이 갑자기 증가한 염력을 탄탄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 그렇지 않다면 앞으로 천지의 불꽃을 만나도 그걸 네 것으로 만들지 못 할게다.”

소년은 한치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 뒤 저장반지에서 검은 송곳을 꺼내 등에 짊어졌다.

* * *

한 달 뒤 천둥산.

어두운 숲 속, 1레벨 흡혈쥐 한 마리가 시뻘건 두 눈으로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후 흡혈쥐가 머리를 숙여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나뭇가지의 즙을 빨아먹고 있을 때, 하얀 그림자 하나가 날아들어 놈을 꽁꽁 얼려 집어 삼켰다.

온 몸이 흰 털로 뒤덮인 늑대의 머리에는 새하얀 뿔이 솟아 있었다. 그 흰 늑대의 이름은 얼음뿔늑대로, 1레벨 마수중에서는 단연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 놈이었다.

흡혈쥐를 뱃속에 삼킨 얼음뿔늑대는 입을 다시며 새로운 목표를 찾으려고 어슬렁 거렸다.

쿵!!!

그 때, 가벼운 진동과 함께 늑대 주변의 나뭇잎들이 갑자기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바닥으로 흩뿌려졌다.

위협을 느낀 얼음뿔 늑대는 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두어 발짝도 움직이기 전에 그림자 하나가 번개처럼 날아들어 놈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퍽!

늑대는 아찔한 통증에 머리를 흔들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흡혈쥐를 얼려버린 그 새하얀 입김을 다시 내뿜어 보았다.

하지만 늑대를 덮친 그림자의 몸 표면에서 연한 황색 불꽃과 보라색 불꽃이 피어오르자 하얀색 기운이 힘없이 녹아내렸고, 이 장면을 본 마수는 황급히 몸을 돌려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늑대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안개로 변한 냉기를 뚫고 달려와 발을 크게 발을 구르며 늑대에게 달려들었다.

“폭풍걸음!”

낮은 기합 소리와 함께 그림자의 발 위에 연한 노란색의 빛이 피어오르더니, 발과 땅 사이에서 폭발음이 울려 퍼지며 그림자가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발이 땅에 닿을 때 마다 폭발음이 울리고, 고작 여덟 걸음 만에 그림자는 천둥산에서 빠르기로 유명한 얼음뿔늑대를 추월해 다시 마수의 정수리에 주먹을 날려댔다.

퍽! 퍽! 퍽!

연달아 묵직한 주먹 소리가 울려 퍼지고, 딱딱한 늑대의 머리가 박살나며 진득한 피와 함께 뼛조각이 사방에 흩날렸다.

“후…좋아.”

마수의 숨통을 끊은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이준이었다. 불과 한 달 사이에 그의 체격은 몰라볼 만큼 단단해져 있었다. 하지만 외모보다 더욱 크게 바뀐 것은 그의 전신에서 풍기는 강인한 기운과 진한 피비린내였다.

근 한 달 동안 끊이지 않는 마수와의 싸움으로 인해 그의 염력은 빠르게 안정을 찾고 있었다.

그는 한 달 내내 마수와 싸우고, 하늘 사자의 정수에서 흡수한 염력을 자신의 염력 회오리에 녹여내는데 전념했다.

지금 그의 몸 속에 있는 염력 회오리는 한 달 전보다 훨씬 작아져 있었지만, 그의 실력은 한 달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에 올라있었다.

그 사이 일어난 또 다른 변화는 바로 은지가 남기고 간 3격 무투기, ‘폭풍걸음’를 수련했다는 점 이었다. 그녀가 남긴 무투기는 염력을 폭발시켜 그 충격으로 속도를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주는 용도로 쓰이는 것 이었다.

아쉽게도 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한 번에 열 번 이상을 사용하지 못 했지만, 1레벨의 마수에게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은지가 남긴 염력 수련법도 제법 상급의 물건이었으나, 준에게는 ‘불개‘가 있었으니 그것은 쓸 일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지난 한 달 동안 이준의 실력은 두 배 이상 성장했으며, 검은 송곳을 벗으면 이성 무투사와 대결을 펼쳐도 웃돌 수준에 이르러 있었다.

“이제 빚을 갚을 때가 온 것 같네.”

천천히 수림 속을 걸으며 점점 작아지는 수풀을 바라보던 이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천둥산의 외곽이었다.

‘휴…오늘도 노숙이군.’

준은 천둥산을 벗어나면서 검은 송곳을 천으로 가려두었다. 약로가 준 이 괴이한 물건은 이미 용병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드러내놓고 다니기는 조금 신경이 쓰였다.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지자, 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몸을 숨길만한 장소를 찾았다. 바로 그 때, 멀지 않은 숲속에서 모닥불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사람인가?”

그는 불이 피어오르는 곳을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모닥불 주위에는 3명의 남자와 2명의 여자가 각자 무기를 지니고 앉아 있었고, 왼쪽 가슴에 똑같이 생긴 휘장이 붙어있었다.

이준이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자, 모닥불 옆에 앉아있던 사내 중 하나가 갑자기 머리를 홱 돌리며 소리를 질렀다.

“누구야!”

그 소리에 옆에 있던 세 사람이 곧장 무기를 꺼내 들고 중년 남자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일제히 머리를 돌렸다. 그 중 나이가 어려 보이는 한 소녀는 두 번이나 힘을 써서 겨우 검을 뽑아 들더니 창피함에 얼굴을 빨갛게 붉히고 있었다.

“저는 그냥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인기척이 느껴지길래 걸어와 봤을 뿐입니다. 그렇게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두운 나무숲에서 준수하게 생긴 소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에게 악의가 없음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텅 빈 두 손을 들어 보였다.

소년의 모습에 다섯 사람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검을 거두었다.

“대체 예의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그렇게 인기척도 없이 다른 용병단 구역에 뛰어들면 어떡해? 우리 대화를 엿듣기라도 하려는 거야? 응?”

화를 내는 것은 방금 전 칼도 제대로 뽑지 못 하던 어린 소녀였다.

이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소녀에게 눈길을 돌렸다. 외모로 보아서는 자신보다 한두 살 정도 어린아이인 것 같았다.

“라엘! 예의없게 굴지 말거라!”

중년의 사내 하나가 소녀를 꾸짖고는 인자한 표정으로 준을 바라봤다.

“자네도 용병인가? 어쩐 일로 혼자서 이 위험한 곳에 들어왔나?”

“저는 의술사입니다. 약재가 고갈이 나서 혼자서 약재를 찾으러 나왔는데 시간이 이렇게 지체된 줄 몰랐네요.”

이준이 웃으며 가슴 속에서 약초 몇 줄기를 꺼내 보이자 중년 사내의 표정이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얼른 이리 와서 앉게. 밤이 깊어지면 야수들이 더 활개를 치니 혼자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위험하네.”

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뒤 모닥불 옆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카은이라고 하네. 5성 투사지.”

중년의 사내는 용병단 휘장 아래에 자리한 다섯 개의 별을 가리키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이준이라고 합니다. 의술사에…실력은 염력 8단 정도 됩니다.”

“하하, 담도 크셔! 고작 염력 8단 주제에 천둥산에 혼자 들어 올 생각을 하다니! 오늘 저녁에 우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너는 아마 진작 마수 뱃속에 들어갔을 거야.”

이준의 소개에 라엘은 어이가 없다는 듯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준은 소녀의 말에 반응하지 않은 채 담담하게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바라봤다.

“청이 라고 부르시면 돼요. 4성 투사입니다.”

초록색 옷을 입은 여자가 이준을 향해 머리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진수라고 합니다. 4성 투사에요. 하하, 사자라고 불러도 돼요.”

자신을 진수라고 소개한 남자는 상당히 덩치가 컸고, 목소리도 그에 못지 않게 컸다.

마지막으로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입을 열려고 하는데 옆에 있던 소녀가 말을 가로챘다.

“이쪽은 우리 재목 오빠야. 5성 투사인데 우리 단장님도 자질이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셨지.”

준은 한 눈에 라엘이라는 소녀가 재목이라는 청년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서로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후 부드러운 분위기속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카은이라는 사내는 아직 준을 완전히 믿지는 않는 듯 은근슬쩍 의술에 관련된 질문을 던졌지만, 완벽한 준의 대답에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심을 거두었다.

대화 중에 이준은 놀랍게도 이들이 바로 청산마을의 3대 용병단 중 하나인 흑표용병단의 단원들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라엘이라는 소녀의 아버지는 용병단의 고위간부라고 했다.

분위기가 조금 풀리는 듯 하자 준은 은근슬쩍 청산마을과 늑대머리 용병단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카은의 답변으로 미루어보아 3대 용병단이 연합해 자신을 잡으려고 한다거나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그의 실력으로는 늑대머리 용병단 따위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으니, 유일하게 신경쓰이는 것 정도는 3대 용병단이 연합하는 것 정도였다.

자신이 얻고자 하는 정보를 얻은 후 준은 자리를 떠나려고 했지만 카은이 위험하다며 말리는 통에 결국 그들과 함께 그 곳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물론 이준이 함께 묵는다는 결정에 라엘이라는 소녀는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고는 싫은 소리를 해댔지만 이준은 그녀를 무시한 채 천막 안에 들어간 뒤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