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연합작전
준은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느낌에 잠에서 깨어났다.
몽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리자 은지가 두 다리 사이에 검을 놓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오늘 그녀는 처음 보았던 날처럼 깔끔한 차림을 하고 있었고, 머리 역시 단정하게 틀어 올린 모습이었다.
지금 그녀는 완전히 회복이 된 듯 전신에서 당당하고 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은지는 준이 일어난 것을 눈치챘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깼어?”
“봉인이…… 풀렸어요?”
“응. 이제 가자. 내 비술이면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깜짝 놀랄만한 힘을 얻을 수 있을거야.”
그녀는 준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즉시 몸을 일으켜 산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준은 산굴을 나서는 은지의 뒷모습을 보며 왠지 모르게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어제나 오늘이나 다를 것 없는 사람이었지만, 오늘의 그녀는 왠지 모르게 다가가기 어렵고 차가운 인상이었다.
“네가 무투사 수준의 실력을 가질 수 있는 힘을 줄게. 그리고 나는 바람 속성이니 내 비술을 통해 속도도 더 빨라질 수 있을거야. 하지만 혹시라도 마수를 만나면 맞붙지 말고 그냥 도망쳐. 그게 안전하니까”
“네.”
준은 은지의 얼굴도 보지 않고 태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할까?”
“네.”
소년이 머리를 끄덕이자 은지는 천천히 손을 앞으로 향해 이준의 등에 갖다 댔다.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염력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준의 몸속으로 들어가고, 소년은 그 즉시 이전에는 느껴본 적 없던 강력한 힘이 온 몸에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준은 시험 삼아 가볍게 몸을 움직여 보았다.
‘이게 무투사 수준의 힘이란 말이지…?’
확실히 지금 자신의 몸은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웠고, 온 몸의 혈관에서 염력이 샘솟는 듯한 느낌마저 들고 있었다.
“아마 두 시간정도는 지금 같은 상태가 유지될 거야. 그러니까 두 시간 안에 하늘 사자의 수정을 꺼내와 줘. 내가 시간을 끌어보기야 하겠지만, 다른 마수들을 생각해보면, 내가 준 염력 없이는 위험할 테니까. 게다가 하늘 사자는 어지간한 인간보다도 머리가 좋으니까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면 기회가 사라질지도 몰라. 나도 주의할 테니까, 너도 놈이 눈치 채지 않도록 주의해.”
은지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결의는 보통이 아니었다.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발걸음을 옮겼다.
“알겠어요. 이제 갈까요?”
“응.”
은지가 머리를 끄덕이며 몸을 가볍게 움직이자 그녀의 등 뒤에서 예전에 보았던 청색 날개가 천천히 뻗어 나왔다. 준은 날개가 펼쳐지자마자 그녀에게 쪼르르 달려가 팔을 벌렸다.
“뭐하는 짓이야?”
은지는 준이 갑자기 포옹하려는 듯 팔을 벌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이마를 찌푸렸다.
“이렇게 먼 거리를 저 혼자 뛰어가라고요? 가는 도중에 강한 마수라도 만나면 전 거기에 가기도 전에 죽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됐든 이번 일은 자신이 도움을 받는 입장이니 불만을 토할 수도 없었다.
……
잠시 후 그녀의 날개가 펄럭이자 순식간에 지상이 멀어지며 시원한 바람이 볼을 스쳐 지나가고, 산뜻한 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히는 것이 느껴졌다.
‘정말 대단하네…내 매의 날개랑은 비교도 안 되는 수준이야. 이게 투황급의 실력이라는 거구나…’
그는 문득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러야 그녀처럼 강해질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아, 맞다. 대체 몇 성 투황 이에요?”
“3성.”
“그럼 그 하늘 사자는 몇 성 투황 이에요??”
“마수는 정확한 레벨 구분이 없긴 해. 굳이 따지자면 그의 무투기나 염력은 겨우 2성 투황과 겨룰 수 있는 실력이야. 하지만 마수는 육탄전에 강하니까 몸으로 맞붙으면 4성이나 5성 투성에게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 되지.”
은지는 준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종합적으로 따지면 그의 실력도 3성 투황 정도는 될 거야.”
“흠…그럼 그 때는 근접전을 펼쳐서 졌다고 볼 수 있나요?”
이준의 질문에 은지는 기분이 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시끄러워…자꾸 조잘거리면 땅에 던져버린다?”
“알았어요…그나저나 그 때 하늘 사자에게 당해서 생긴 흉터 말이에요. 꽤 심하게 남을 것 같은데…오늘 일이 끝나면 흉터 지우는 약을 만들어줄게요.”
“괜찮아. 오늘 볼 일을 다 보고 나면 앞으로 마주 칠 일 없을 테니까.”
준은 그녀의 차가운 태도에 조금 마음이 불편해졌다. 어제 일 때문인지, 실력이 돌아왔기 때문인지, 혹은 큰 싸움을 앞두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오늘 그녀는 자신과 며칠 동안 같이 생활했던 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서운한 마음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은지는 막상 준이 입을 다물자 왠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 * *
“이 부근이야.”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준은 은지를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건너편의 큰 산을 바라보았다. 산의 정상 부근에는 울창한 수풀 사이로 거대한 동굴의 모습이 보였다.
“저기가 하늘 사자의 동굴인가요?”
바위 뒤에 선 이준이 조심스레 동굴 쪽을 올려다보며 묻자 은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 입구에 높은 레벨의 마수들이 숨어있어. 지난번에는 이렇지 않았는데…나를 죽이지 못 했으니 나름대로 대비책을 마련해 놓은 것 같네…휴…내가 저 마수들을 치워줄 테니까 너는 기회를 보다가 몰래 동굴로 들어가.”
“알겠어요.”
은지는 말을 마치고 몸을 날리려다가 잠시 멈칫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몸 조심해.”
“누나도 조심해요.”
그러나 그녀는 아직도 무언가 할 말이 남은 듯 잠시 머뭇거리며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쉰 뒤 입을 다물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윽고 푸른빛이 허공을 가르고 하늘 사자의 동굴로 향하자 마수들의 포효소리가 산골짜기를 가득 매우기 시작했다.
은지가 마수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 정면으로 모습을 드러낸 채 검을 뽑아들고 숲속으로 들어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처참한 마수의 비명소리가 온 숲을 뒤덮었다.
곧이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는 준의 눈에 숲을 빠져나와 꽁지가 빠지게 달아나는 마수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드디어 하늘 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건방진 계집…감히 내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
거대한 포효소리와 함께 보라색 섬광이 허공을 찢고 날아들자 청색과 보라색 빛줄기가 어지러이 얽히며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준은 멀리서 이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두 강자의 싸움이 점점 격렬해지며 동굴에서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몸을 움직였다.
……
준은 바짝 긴장한 채로 은지가 들쑤셔놓은 숲을 가로질러 동굴로 향했다. 숲 여기저기에는 그녀에게 당한 마수들이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대부분의 마수는 3레벨 이상의 강력한 마수였지만,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 해보고 일방적으로 당한 듯 했다.
‘휘유…투황이 대단하긴 대단하구나…’
소년은 3레벨 이상 마수들의 시체가 널려있는 것을 보고 마정석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 마수들의 몸에서 마정석을 몇 개만 건져도 떼돈을 벌 수 있을 것 이다.
‘에휴…포기하자. 괜히 여기서 꾸물거리다 다른 마수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그는 아쉬운 듯 자꾸만 마수들의 시체를 돌아보며 걸음을 옮겼다. 십 여분 정도 열심히 숲을 달리자, 갑자기 시야가 훤해지며 거대한 동굴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이를 어쩌지…’
동굴 앞에는 3레벨의 마수 두 마리가 하늘 사자와 은지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도 하늘 사자가 나타나는 탓에 모든 마수를 처리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저장반지에서 약 가루를 꺼내 온 몸에 바르기 시작했다. 이 약가루는 그가 직접 정제한 것으로, 사람의 체취를 지워 마수들에게서 몸을 숨기는데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
그는 약을 바르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바위 틈새에 몸을 숨겨가며 천천히 동굴로 다가간 뒤 어느 정도 동굴에 가까워지자 다시 저장반지에서 부드러운 천을 꺼내 발바닥에 감았다.
‘후…가자.’
준비가 끝나자 이준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은 뒤 동굴 위쪽에서 아래로 조심스럽게 뛰어내렸다.
탁…
소년은 발이 땅바닥에 닿자마자 몸을 앞으로 구부려 번개처럼 산굴 안으로 몸을 날렸다.
……
동굴 안은 생각보다 어둡지 않았고, 산굴 벽면에는 보라색 수정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크고 넓은 산굴 안은 보라색 수정 조각들이 내뿜는 빛으로 인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햐…마수도 투황급 강자가 되면 이렇게 멋진 곳에서 사는구나.’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가니 은지 말대로 산굴 안에는 다른 마수는 보이지 않았다. 산굴 안에는 이준이 발을 옮기는 낮은 소리 외에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고 있었다.
기나긴 산굴의 통로를 지나 한참을 걸으니 두 갈래의 갈림길이 눈 앞에 나타났다.
‘흠…’
소년은 팔짱을 끼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이상하게도 동굴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숨이 막힐 정도로 공기가 뜨거워지고 있었다. 준은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걸음을 재촉했다.
‘젠장…왜 이렇게 더워.’
열기를 뚫고 몇 분 정도를 더 걸어가자, 거대한 크기의 방이 하나 나왔다. 준은 사람이 만든 것처럼 깔끔하면서도 거대한 방의 모습에 압도되어 감상하듯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방의 중앙에는 보라색 수정이 쌓여있고, 그 위에는 네모난 받침대에 올려진 보라색 구체 하나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소년은 보라색 구체가 내뿜는 아름다운 광채에 잠시 넋을 잃었다가, 문득 동굴 안을 가득 메운 열기가 그 물건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더욱 놀라 천천히 그 구체에 다가갔다.
“이게 하늘 사자의 수정인가…? 그런데 왜 이 수정구슬이 반응을 안 하지?”
투황이 준 물건이니 고장이 났을리는 없었다.
“스승님, 스승님. 이게 뭐에요? 빨리 좀 나와 보세요.”
제자의 부름에 반지에서 나온 약로는 보라색 구체를 보자마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 설마 하늘 사자의 정수인가?”
“하늘 사자의 정수요? 수정이 아니고요? 그게 뭔데요?”
준은 약로의 표정을 보고 그 물건이 범상치 않은 물건이라는 것은 느꼈지만, 그 물건이 어떤 물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물건이야말로 평생 한 번도 보기 힘든 보배 중에 보배다. 하늘 사자는 매번 새끼를 낳을 때 마다 아주 적은 확률로 자신의 생명력과 에너지가 담긴 정수를 만들어내지…이 물건은 사자왕의 뱃속에 오랜 시간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하늘 사자의 수정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를 품고 있다. 그리고 이 정수를 삼킨 하늘 사자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지게 되지.”
소년은 이전에 보았던 하늘 사자의 위력을 생각하고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 상태에서 더 강해진다구요?”
“그래…내 평생 이 물건을 구하기 위해 8번이나 하늘 사자의 동굴에 들어갔지만 이 물건을 구하는데 성공하지 못 했었다. 그 정도로 귀한 물건이지.”
약로의 설명에 준은 눈을 빛내며 하늘 사자의 정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앗!”
그러나 그는 보라색 구체에 손이 닿자마자 황급히 손을 떼며 인상을 구겼다. 아주 잠깐 닿았을 뿐인데 그의 손은 불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라도 한 듯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으으…”
준은 엄청난 열기에 놀라 감히 다시 손을 뻗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저장반지에서 상처치료약을 꺼내 손에 바르며 약로를 바라봤다.
“엄청 뜨겁네요. 이걸 어떻게 가져가요?”
“하하, 더 큰 문제는 이 하늘 사자의 정수가 이미 이 보라색 수정 받침대에 붙어 있다는 점이다. 이걸 가져가려면 산굴에서 파서 가야 될 것이야.”
“파야 된다고요?”
약로의 설명에 준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받침대의 상태로 보아하니 단단한 것도 문제지만, 대체 얼마나 깊은 곳까지 박혀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점 이 더 큰 난관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몇 달을 파도 이 보물을 가져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