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산굴에서의 동거
준은 작은 산봉우리 뒤에 엎드려 주위를 살펴봤다.
요 며칠 사이 천둥산내의 마수들은 그 여인을 찾느라 온 산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다행히 약로가 뿌린 기이한 약 가루 때문에 산굴 근처에 가끔 마수들이 출몰했다가도, 자극적인 냄새 때문에 산굴에 가까이 오지는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다.
한참을 엎드려 주위를 살피고 있는 사이, 약로가 준의 머릿속에 말을 걸어왔다.
“이놈아, 지금 네 수련이 급한데 왜 저런 걸 주워 와서 사서 고생을 하느냐.”
“투황이잖아요.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죠.”
“그리고 그 이상하게 버벅거리는 건 또 뭐냐. 언제부터 그렇게 순진하고 순박했다고 말이야. 나는 네가 그 꼬마 계집을 놔두고 첫 눈에 사랑에 빠지기라도 한 줄 알았다.”
“어휴…스승님, 저 여자 싸우는 거 못 봤어요? 까불다가 심기 거스르면 악 소리도 못 내고 황천 가게 생겼다구요. 일단 순박하고, 착한 소년. 완전히 선의로, 그냥 도와줬다, 조금도 계산이나 흑심이 없다, 그런 느낌으로 가야 목숨이라도 건질 것 같아서 그래요.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서 무슨 수련법이라도 하나 던져주면 더 좋구요.”
너무나 뻔뻔한 제자의 말에 약로는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어이구…어린놈이 정말이지, 속에 능구렁이를 천 마리는 키우는구나.”
“그냥 좋게 생각해주세요. 사람 하나 구한다 치고…찝찝하잖아요. 나한테 뭐 잘못한 게 있는 것도 아닌데, 눈앞에서 죽어가는 걸 어떻게 버려요. 그리고… 저도 지금 골치가 아프다구요.”
제자가 한숨을 내쉬자, 약로는 코웃음을 한번 치고는 그대로 조용해졌다.
준은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고, 산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산굴에 들어서니 정체불명의 투황이 손으로 턱을 고인 채 가만히 앉아있다가 준을 발견하고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왔어?”
준은 웃으며 머리를 끄덕인 뒤, 저장반지에서 방금 잡은 물고기 몇 마리를 꺼내며 불을 피웠다.
“좀 나아진 것 같아요?”
그 여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소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주저앉았다.
“상처는 괜찮은데, 봉인술이 며칠 걸릴 것 같아.”
“당분간 여기에서 지내요. 여기는 마수들도 잘 안와요.”
여인은 물고기에 간을 하는 준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너, 담도 크구나. 아직 무투사도 못 된 애가, 마수 소굴로 들어 올 생각을 하다니.”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사람들한테 추격당하다 보니……”
“흠…그래? 보아하니 꽤 복잡한 사정이 있나보네?”
준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물고기에 간을 했다.
“그런데, 이름은 뭐야? 생명의 은인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야지. 나는 은지. 나이는 내가 많은 것 같으니까, 누나라고 부르면 돼.”
“저는 이준 이에요.”
소년은 물고기를 구우며 가만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가한제국에서 그런 이름의 투황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투황이 흔한 것은 아니니, 그녀는 신분을 감추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어색한 대화를 끝으로 잠시 정적이 감돌고, 소년이 손에 든 물고기를 건네주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연금술사니?”
자신을 은지라고 소개한 투황은 소년의 옆에 놓은 약병들을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어…의술사요.”
준은 자신이 연금술사라는 것을 밝히고 싶지 않아 거짓말로 대충 둘러댔다.
투황 정도의 강자라면 가한제국내에 연줄이 많을 것이고, 혹여라도 나중에 그녀가 자신을 찾게 되면, 골치가 아플 것이 뻔했다.
스승이 없는 연금술사라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음…그렇구나. 내 친구 중에 연금술사가 하나 있거든. 가한제국에서 볼 일이 끝나면 너한테 소개 시켜 줄 수도 있어. 생명의 은인이니까. 신세는 갚아야지. 아마 꽤 도움이 될 거야.”
그녀의 갑작스런 제안에 준은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머리를 저었다.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저한테는 이미 스승님이 계시니까요”
연금술사라면 가한제국의 누구나 연을 맺고 싶어 하는 존재였다. 소년이 너무 단박에 거절하자, 은지는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준이 지금까지 그녀 앞에서 순박한 소년을 연기해왔기 때문에, 그녀는 별 의심 없이 그 문제를 넘어갔다.
아마도 그녀는 ‘정말 별 뜻 없이 나를 도와주었구나.’ 하는 식으로 생각해 준에게 호감을 갖게 된 듯, 괜히 더 다정한 표정을 짓기까지 했다.
“상처가 나으면 또 하늘사자를 찾으러 갈 건가요?”
준은 계속해서 물고기를 뜯으며,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응. 나는 그 하늘 사자의 수정이 꼭 필요해. 그리고 실력 차이가 그렇게 큰 것도 아니고, 그가 봉인술을 갖고 있는걸 알았다면, 조금 더 대비를 했을텐데 말이야…그걸 모르는 게 컸어.”
은지의 말에 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승산이 높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없다고도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그녀의 마지막 일격은 대단했다.
식사를 마친 준은 조용히 일어나 기지개를 켠 후 염력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은지는 구석에 기대 앉아 가만히 준을 바라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4격 공법이잖아…? 스승이 있다며…뭐하는 사람이길래 이런 걸 가르친 거지? 너무하잖아. 제법 재능이 있어 보이는데…이번일이 끝나면 이 녀석을 좀 도와줘야겠는걸. 마음씨도 착하고, 재능도 있고, 이대로 썩히기에는 너무 아까워.’
그녀는 속으로 준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며, 자세를 잡고 앉아 천천히 사자왕의 봉인을 풀기 시작했다.
* * *
산굴에서 함께 생활한지 일주일.
산굴 입구로부터 갑자기 들려오는 늑대의 울부짖음 소리가 정적을 깨자, 준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아차릴 리가 없었다. 천둥산에서 벌써 몇 달째다.
언제나 밖에 나갈 때면 약로가 만들어 준 가루를 뿌리고 다녔고, 냄새로 추적을 당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사자왕 사건 이후로 더욱 행동 하나하나를 조심해 왔었기에, 그는 절대로 마수들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준은 동굴 안을 서성이다가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은지를 보고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누나…오늘 나갔다 왔어요?”
은지는 이준의 질문에 정곡을 찔린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궜다.
“미안…일주일이나 못 씻었더니 너무 찝찝해서…”
소년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한숨을 내쉬고는, 즉시 검은 송곳을 짊어졌다.
“여기 꼼짝 말고 있어요. 제가 그 마수를 유인해 볼게요.”
“아니야…내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는 이준을 보자, 은지는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어 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꼼짝 말고 있으라니까요! 그 몸으로 나가긴 어딜 나가요!”
소년이 고개를 돌려 인상을 찌푸리며 자신을 혼내자, 은지는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산굴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마요! 아니면 우리 둘 다 여기서 죽어요!”
사라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며 은지는 멍하니 손만 만지작거리다가 이마를 찌푸렸다.
“쪼끄만 게 성질머리는 있어가지고, 도와주려고 했는데도 거절을 해…? 그리고 내가 누군 줄 알고 소리를 지르는 거야…”
***
이준이 나간 지 얼마 후, 은지의 귓가에 늑대의 울부짖음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자, 그녀는 걱정되는 마음에 동굴 안을 이리저리 빙글빙글 걸어 다녔다.
“이씨…그냥 나갈까? 죽은 거 아니야?”
이윽고 늑대의 울음소리가 잠잠해졌지만 소년이 돌아오지 않자, 은지는 끝내 참지 못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동굴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은지가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순간, 그림자 하나가 휘청거리며 동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준아, 괜찮아?”
은지가 달려가자 소년은 온 몸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된 채로, 씨익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누나, 이제 제발 나가지 말아요. 마수 한 놈이라도 더 오면 저 진짜 죽어요.”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준은 비몽사몽간에 자신의 머리가 무언가 폭신한 것에 기대어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천천히 정신이 돌아오려는 무렵, 입안이 시원해지며 차가운 물이 그의 입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물을 먹이는 손길이 여간 서툰 것이 아니라 물이 코로도 들이닥쳤다.
“켁, 콜록콜록……”
눈을 번쩍 뜬 이준이 급히 머리를 숙이고 기침을 하자 물을 든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은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으아…정말 서툴군요. 귀하게 자랐나 봐요.”
소년이 웃으며 자신을 놀리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사실 그녀는 누구를 보살펴 본 것이 태어나서 처음이었으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기는 한 것 이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준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머리를 흔들며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다행히 2레벨 마수였어요. 3레벨만 되었어도 못 돌아왔을 거에요.”
“미안…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은지가 미안하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거듭 사과하자 준은 웃음이 나왔다. 투황 정도의 강자라면 당연히 인성도 개차반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지만, 그녀는 좋은 사람 같았다.
“됐어요. 제가 미리 말을 안 해서 그런 거죠.”
그 때, 이준의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은지가 웃음을 터뜨렸다.
“넌 지금 환자야. 물고기는 내가 구워보도록 할게.”
“구울 줄 알아요?”
소년이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하는 걸 며칠 봤으니 할 수 있을 거야.”
은지는 당당하게 팔을 휘저으며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물고기를 구웠고, 준은 그런 은지를 잠깐 바라보다가 수련을 시작했다.
한편, 은지는 땀범벅이 되어 꼬챙이를 돌리며 한 번씩 머리를 돌려 준을 바라봤다.
“흥…내가 만든 요리를 맛보게 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해. 감히 이 몸을 비웃어…?”
그녀는 열심히 꼬챙이를 돌리다가 돌 위에 놓인 옥병을 둘러보더니 잠시 고민에 빠졌다가 이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가장 끝에 있는 옥병을 집어들어 안에 있는 가루를 손에 털어 물고기에 간을 하기 시작했다.
……
“얼른 일어나서 먹어.”
은지가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 앞에 있는 물고기를 바라봤다.
“이게 구운 물고기라고요?”
소년의 입가에는 묘하게 웃음기가 가득했다.
“내 생에 첫 요리야. 맛이 없더라도 다 먹어. 안 먹기만 해 봐. 내 몸이 회복되면 확……”
이준의 표정에 은지가 손에 든 고기를 들며 협박조로 말했다.
“우와…누나 진짜 너무 하는거 아니에요? 난 누나가 부상을 당했을 때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간호했는데…”
은지는 소년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꼬챙이를 집어 들어 자랑스럽게 물고기를 입에 넣었다. 하지만 물고기를 씹는 기묘한 그녀의 표정이 준을 더 불안하게 했다.
준은 불안한 가슴을 억지로 달래며 물고기를 한 입 베어물었다.
“응?”
물고기가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소년은 너무나 신선한 맛에 자신의 혀를 의심했다.
은지가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요리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의심할 만큼 ‘신비한’ 맛 이었다.
분명히 같은 물고기에 같은 소금에 같은 불이었을 텐데, 그녀의 요리는 생전 처음 겪어보는 충격적인 맛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건 탄 맛…이건…나무 맛일까…겉은 절묘하게 태웠으면서 속은 날생선이네…그리고 이 제6의 맛은 뭐지…신맛도 아니고 짠맛도 아니고, 단맛도 아니고…인간의 미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실로 파격적인 맛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