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8화. 상처를 치유하다
사자왕은 자신의 공격이 막힌 것 따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보라색 눈을 더욱 빛내며 거대한 앞발을 들어 여인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여인은 청색 날개를 움직여 거대한 보호막을 만들어내, 사자왕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냈다.
잠시 후 보라색 빛을 내뿜은 마수가 허공을 화려하게 오가며 공격을 하고, 신비한 여인은 절묘하게 그 공격을 피해내며, 한 치의 틈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늘 사자는 방어력과 육체가 강하고 저 여인은 바람속성의 대단한 무투기들을 가지고 있구나. 게다가 둘 다 투황급의 강자인 만큼 실력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 내놓을 만한 확실한 비책이 없으면, 이 싸움은 쉽게 끝나지 않을게다.”
약로의 말을 들은 준이 조용히 한마디를 거들었다.
“하늘 사자는 불 속성이니 햇빛에서 싸우는게 유리하고, 밤이 되면 약해지니 해가 지기 전에 이 전투를 끝내려고 하지 않을까요?”
“녀석, 눈썰미가 제법이구나. 하늘 사자가 태양의 도움을 받은 걸 알아채다니.”
“몸에 붙은 저 보석이 태양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것 같아요. 몸속의 보라색 불길도 그 물건의 도움을 받아 만드는 것 같구요.”
소년은 한참이나 둘의 싸움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스승을 바라봤다.
“스승님, 하늘 사자의 불꽃도 연금술사가 이용할 수 있나요?”
“허허, 녀석…저런 불꽃은 마수의 몸속에 살기 때문에 천지의 불꽃보다 다루기가 더 힘들다. 그러나 위력 면에서는 이화에 감히 비할 바도 못 되니, 그야말로 쓸모없는 불꽃이지.”
준은 잠시 시선을 돌려, 자신처럼 두 강자의 대결을 바라보고 있는 마수들을 관찰했다.
천둥산의 깊은 곳에 사는 마수는 대부분 3레벨 이상의 마수로, 어느 정도의 인지력과 지혜를 가지고 있어, 바깥에서 만날 수 있는 마수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하지만 이 전투를 가까이서 구경하고 있는 마수는 고작 몇 마리로, 대부분의 마수들은 꼬리를 말고 멀찍이 떨어져, 이 싸움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듯 했다.
약로의 말에 의하면, 앞에 있는 세 마리는 5레벨의 마수로, 인류로 치면 투왕의 레벨에 속하는 강자이지만, 결코 이 싸움에는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저 하늘 사자는 이 일대의 왕이다. 왕의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그를 모욕하는 일이지.”
약로의 그 설명을 끝으로 약로와 준, 마수들은 멍하니 두 강자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하늘 위에서의 전투는 석양이 질 때까지도 계속 되었다.
“하늘 사자의 수정을 준다면 앞으로 절대 귀찮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나절에 걸친 싸움에도 여인은 여전히 태평한 모습이었다.
사자왕은 몹시 자존심이 상했는지, 온 몸에서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며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이윽고 사자왕의 몸에서 보라색 빛이 점점 더 커지더니, 마침내 석양이 보라색으로 덮어버릴 정도가 되었다.
그 순간, 5레벨 마수를 포함한 모든 마수들이 황급히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하늘과 땅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은, 여인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도 얼굴색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곧이어 천지를 뒤덮던 보라색 섬광이 춤을 추듯 일렁이더니, 1미터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보라색 기둥으로 압축되고, 이를 본 약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봉인?”
“봉인이요?”
“일부 높은 레벨의 마수들은 천성적으로 봉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보아하니 저 여자가 크게 혼쭐이 나겠구나.”
약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라색 기둥이 번개처럼 날아가더니, 순식간에 신비한 여인의 앞 쪽에 나타났다.
“사자왕의 봉인”
보라색 기둥이 눈앞에 나타나는 순간, 신비한 여인 역시 준비한 비장의 수를 펼쳤다.
“폭풍의 춤!”
영롱한 청색 불꽃이 일렁이며 거대한 칼 모양의 바람으로 변화하고, 청색 바람과 보라색 불기둥이 어지러이 맞부딪히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안개 같이 희미한 기류가 사방을 뒤덮었다가 안개가 서서히 걷히자, 바람 회오리는 온데간데없고, 색이 연해진 보랏빛 기둥만이 남아있었다.
바람 회오리를 물리친 보랏빛 기둥은 여인 앞에 세워 놓은 몇 십 개의 보호막들을 뚫어 버리고 신비한 여인의 몸을 꿰뚫었다.
보랏빛 기둥이 여인의 몸에 들어간 후, 하늘사자의 커다란 몸은 어느새 그 여인의 앞에 나타나 있었다.
“가소로운 년.”
사자왕의 발끝에서 뾰족한 가시 다섯 개가 발톱 끝에서 뿜어져 나와, 여자의 가슴을 호되게 후려치는 순간, 그녀의 손에 든 검이 살아있는 듯 부르르 떨리며 그 속에서 찬란한 청색 빛을 뿜어냈다.
“비술, 바람의 창…!”
검에서 나온 청색 빛이 사자왕의 머리를 향하자, 사자왕은 다급히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청색 섬광은 하늘 사자의 몸에서 가장 단단한 부위인 뿔을 두 동강내고 말았다.
“크르르…!”
뾰족한 뿔이 잘린 하늘사자는 엄청난 고통을 느낀 듯 신음을 내뱉으며, 커다란 발바닥으로 그 여인의 가슴을 내리쳤다.
“아악!”
하늘 사자의 공격을 정통으로 받은 여인은 피를 토하더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즉시 날개를 펼쳤다.
푸른 날개가 날개짓을 거듭하자, 신비한 빛이 번쩍이며 여인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뿔이 잘린 하늘 사자는 미친 듯이 날뛰며 자신의 뿔을 자른 인간을 찾았다.
“당장 찾아 와라! 그 여자를 당장 내 앞에 데려 와!”
마수의 왕이 보라색 눈을 번쩍이며 포효하자, 온 산 속의 마수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달려 나갔다.
* * *
온 산의 마수들은 미친 듯이 그 신비한 여자를 찾아다녔다. 준은 약로의 보호 속에 마수들을 건드리지 않고, 조심스레 그의 은신처로 향했다.
“우와…스승님, 이런 건 처음 봤어요! 그 여자가 사용한 마지막 무투기, 대체 뭘까요? 사자왕이 제 때 피하지 못 했으면 목이 달아났을 거에요.”
결투가 끝났음에도 소년의 심장은 미친 듯이 방망이질을 거듭했다.
* * *
폭포가 있는 은신처로 돌아온 준은 약솥과 약재들을 정리하는 내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니, 이미 세상이 다 자기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은신처로 돌아온 그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폭포의 하류에 방금 전 자신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 여인이 떠내려 오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은 그 상태로 가만히 얼어붙어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녀를 구하면 마수들이 자신을 덮칠지도 몰랐다.
그 때 그의 귓가에 천둥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으…역시, 안 구해주면 하늘 사자에게 끌려가서 죽고 말겠지?’
준은 잠시 초조한 듯 다리를 떨며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빙글빙글 돌다가 이를 악물고 물속에 뛰어들었다.
……
여인을 업고 산굴 입구에 도달하자, 준은 그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산굴 주위에는 약로가 뿌려둔 신비한 가루로 인해 마수들이 오지 않았다.
신비한 여인을 산굴 안까지 옮긴 이준은, 그녀를 자신의 침대 위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방금 전까지 신처럼 하늘을 날며 전설속의 마수와 전투를 벌이던 인물이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을 보니, 준은 자꾸만 가슴이 뛰었다. 소년은 전설속의 인물을 직접 만난듯한 기분마저 들어, 잠시 상처를 치료하는 것도 잊고 말았다.
‘아니야 아니야, 정신 차려야지. 지금 이 사람 죽어가고 있잖아.’
준은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몸에 새겨진 마수의 발톱자국을 바라봤다.
“으으…이미 틀린 거 아닐까…”
상처의 크기로 보나 출혈량으로 보나,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용할 정도로 끔찍한 상처였다.
준은 이마를 찌푸리며 저장반지에서 옥병을 꺼내, 그녀를 치료할만한 약을 찾아보았다.
“우욱…”
바로 그 때, 나지막한 신음소리와 함께 그녀가 눈을 떴다.
준은 그만한 상처에도 그녀가 스스로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그만 비명을 지를 뻔 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의 온 몸에는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묻어 있었고, 얼굴은 이미 죽은 사람의 그것만큼이나 창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는 의식을 잃을법한 출혈량에도 불구하고, 준을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무서워… 이 정도나 되는 상처인데 살아 있는 게 더 무섭다고. 투황 정도 되면 생명력도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게 되는 건가…’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약병을 슥 내밀었다.
“이…이거 바르세요. 상처 치료약인데, 제법 효과가 좋거든요.”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주…죽었나. 이게 죽기 전의 마지막 뭐 그런 건가… 아닌데…’
준은 지금까지 나이에 맞지 않게 많은 사람을 죽여 왔지만, 이런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투황급 강자는 죽을 때도 뭔가 다른 건가? 아…무섭게 왜 이래. 여차하면 스승님을 불러야 하나?
소년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약간의 공포를 느꼈다. 방금 전까지 산을 뒤엎고 6레벨의 마수와 사투를 벌이던 여자다. 혹시 정신을 잃고, 미쳐 날뛰기라도 하는 날에는 마수에게 습격을 당하는 수준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저…저기요?”
이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눈앞에 손을 가져다대고 흔들어보았다.
“안 움직여.”
“네?”
“안 움직인다고.”
여인이 입술을 깨물고 자신을 바라보자, 소년의 머릿속에 퍼뜩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아, 봉인술! 그건가?’
“저기…내가 지금 지금 사정이 있어서 움직일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약을 못 바른 다구.”
“그…그럼 제가 발라 드려야 해요?”
“응.”
“도와줄 수는 있는 데요…그…”
소년이 우물쭈물거리며 얼굴을 붉히자, 신비한 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으니까, 발라줘.”
여인의 말에 준은 느릿느릿 앞으로 걸어가 조심스럽게 여자의 옷을 찢었다. 여인의 옷 속에는 하늘색 갑옷이 둘러져 있었고, 갑옷 위에 감도는 기운을 보니 평범한 물건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엄청 견고한 갑옷이야. 이 물건이 아니었으면 틀림없이 죽었을거야.’
“어…저기, 그…상처가 갑옷 안쪽에 있는 것 같거든요. 지혈하고 약을 바르려면 갑옷을…”
준이 더듬더듬 입을 열자 여자는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눈을 감은 뒤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풀어 줘.”
소년은 괜스레 민망해져 여자를 일으켜 등을 돌리게 한 뒤, 갑옷을 벗겨냈다.
“으윽…”
“으아아… 죄송해요.”
준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갑옷을 벗겨냈지만, 여인이 고통스러운 듯 나지막한 신음을 토하자 괜히 겁이 났다. 소년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여인이 하늘 사자의 뿔을 날려버리던 장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됐어…어쩔 수 없지. 큰 부상이니까.”
준은 검은색 망토를 꺼내 여자의 몸에 덮어준 뒤, 다시 그녀의 몸을 돌려 침대에 눕혔다. 이 정도가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상처를 씻어낼게요.”
준은 저장반지에서 깨끗한 천을 꺼낸 후, 옥병에서 상처 치료약을 꺼내 천천히 상처 부근의 핏자국을 닦아냈다.
핏자국이 대충 닦아지자, 소년은 옥병에서 하얀 가루를 쏟아 조심스레 상처에 뿌렸다. 그러자 여인은 고통스러운 듯 다시 한 번 나지막한 신음을 토하며 이를 악물었다.
“으윽…”
“금방 끝나요. 조금만 참아요.”
준은 침착하게 지혈에 사용할 천을 꺼내 그녀의 상처를 감은 뒤, 뒤로 물러났다.
“다 됐어요. 이게 제가 해드릴 수 있는 전부예요. 몸이 안 움직이는 건… 제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