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포위하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용병들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3단장님!”
천막 밖에서 한 용병이 3단장을 불러보았지만, 천막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3단장님!”
불길한 예감을 이기지 못 하고 한 용병이 천막으로 뛰쳐 들어가자, 거무튀튀하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가슴팍까지 흘러내린 거한의 시신이 쓰러져 있었다.
“3단장님!”
* * *
“늑대머리 용병단의 3단장 재필이 습격당했대!”
“그 이준이라는 그 애가 이미 늑대머리용병단 단원들을 스무 명이나 죽였대.”
“쯧쯧, 늑대머리 용병단도 별거 없나보네. 스무 살도 안 된 어린아이에게…”
반나절도 채 지나지 않아, 청산 마을에는 재필의 죽음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조용한 방 안에서 문 밖의 시녀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약을 만들던 여자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얀색 옷을 입은 여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손에 들고 있던 약병을 내려놓았다.
“재필을 죽였다는 건 그 애가 적어도 8성 투사 레벨은 되었다는 소리인데…”
아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을 때, 밖에서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주석 선생님께서 오셨습니다.”
시녀의 말에 아라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주석은 만약상회의 주인으로, 최근 며칠간 늑대머리용병단에서의 소문을 듣고, 매일 같이 그녀를 찾아오고 있었다.
“들어오시라고 해.”
“하하, 아라 아가씨 요즘 잘 지내죠?”
시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값비싼 옷을 입은 남자 하나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라는 사내를 보자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는 몸을 돌려 차를 한잔 따랐다.
“주석 선생님께서 무슨 일로 절 찾아오셨나요?”
“하하.”
“……”
“아라 양도 그 이준이라는 아이의 소식을 들었겠죠?”
“네.”
“산 굴에 보물 찾으러 들어갔을 때, 그 사람도 같이 갔죠?”
사내의 뻔한 질문에 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왓다.
“아니요, 선생님께서 뭔가 잘못알고 계시네요. 저는 그 아이와 같이 간적이 없습니다. 제가 약을 채집하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질뻔 한 것을 그 아이가 구해줬을 뿐이에요. 저는 산골이니 보물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들은 적도 없고, 본 적도 없어요. 그러니 그 보물인지 뭔지에 관심이 있으시면, 직접 늑대머리 용병단에 가서 물어보세요. 저에게 물어봤자 저는 아는게 없으니까요.”
아라의 차가운 태도에 사내는 조금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겁니다. 하하. 아가씨가 이준과 안면이 있다고 하니…혹시 앞으로 그를 다시 만나게 되면, 우리 만약상회에 꼭 좀 찾아와 달라고 전해 주십사 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기회가 있다면 꼭 전해 드리죠. 하지만 저도 그냥 안면이 있는 정도일 뿐 가깝지는 않으니 기대는 하지 마세요.”
아라가 다시 한 번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자, 사내는 다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가볼 데가 있어서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사내가 문을 닫고 나서자 아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거짓말을 하려면 그럴싸하게 하든지… 에휴! 그나저나 그 꼬맹이는 무사할까?”
* * *
늑대머리용병단 주둔지.
넙적한 바위 위에는 거대한 사내의 시체 한구가 놓여있었다.
“내가 그 새끼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야!”
강헌은 재필의 입가에 말라붙은 핏자국을 보며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재필은 4격 상 레벨의 바위 속성의 수련법을 익혔고, 두 가지 4격상의 무투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었다. 같은 8성 투사 중에서도 상당한 투사였지! 하지만 그런 재필이 패배했다는 것은, 이준이라는 놈이 재필보다 더욱 높은 레벨의 수련법과 무투기를 지니고 있는 8성 이상의 투사라는 말이다. 내일부터 5성 투사 이상의 단원들은 모두 늑대머리 용병단의 표식을 떼고. 자유 용병으로 위장해 5인 1조로 천둥산에 들어가서 놈의 흔적을 샅샅이 찾아라! 그리고 놈의 흔적을 발견하는 즉시 나에게 직접 알리도록! 내가 친히 그 놈의 사지를 찢어 재필의 혼을 달래겠다!”
* * *
은은한 달빛이 온 대지에 뿌려져 숲 속에 신비스러운 빛을 더하는 밤, 약로는 오늘도 어김없이 준의 몸에 불의 숨결을 바르고 있었다.
“으읍……”
약로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소년은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고, 한참동안이나 불타는 듯한 통증에 시달리고 나서야 그 날의 수련이 끝났다.
“어떠냐, 이제 7성 투사가 될 것 같으냐?”
스승의 물음에 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6성 투사가 된지 한 달밖에 안 됐는데, 7성 투사가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모든 단계의 마지막 세 레벨이 가장 돌파하기 어렵다는걸 잘 아시는 분이…”
“우리가 밖에 수련하러 나온지 이제 곧 5개월이 된다. 네가 운남종의 그 애랑 약속한 시간이 이제 1년도 안 남았다는 말이야.”
나설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준의 눈이 차가운 빛을 발했다.
“그 애는 2년 전에 벌써 3성 투사였는데…재능도 뛰어나고 운남종을 등에 업고 있으니 저보다 뒤처지는 않겠죠?”
소년이 불안한 표정을 짓자 이번에는 스승이 한숨을 내 쉬었다.
“그래. 물론 너의 실력을 빠른 시간 안에 뛰어 오르게 할 방법은 많다. 하지만 그런 방법들은 모두 후유증이 심해 잘못 사용하게 되면 영원히 그 레벨에만 머물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는 네가 그 아이에게 진다고 해도, 그런 수련을 도와줄 수는 없다.”
“절대 그 애한테 지고 싶지 않아요. 지난 2년 동안 제가 얼마나 힘들게 수련했는지는 스승님이 제일 잘 아시잖아요. 그 애는 제가 수련을 하는 가장 큰 이유였어요.”
소년은 그대로 몸을 뒤집어 달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꼭 이기게 해 주겠다고 스승님께서 말씀 하셨잖아요.’
“내가 너의 실력을 향상시키려면 내 계획대로 수련을 해야지. 하지만 지금 산속에서 쫓기느라 시간만 낭비하고 있지 않느냐.”
약로의 말에 소년은 답답하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게요. 스승님께서 나서면 반나절도 걸리지 않을 텐데 말이죠.”
“이놈이! 매일 내가 나서서 해결해주면, 너는 뭘 배우겠느냐! 진정한 투사는 언제나 실전을 통해서만 태어나는 법이란 말이다!”
노인이 호통을 치자 소년도 지지 않고 한마디를 쏘아붙였다.
“언제는 시간을 뺏기고 있다면서요!”
“그러니까 네 손으로 빨리 정리를 하라는 말이다! 강해져서!”
“알았어요! 알았어!”
준이 입을 삐죽거리며 다시 벌렁 드러누워 등짝을 들이밀자, 약로는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지으며 불의 숨결 들어있는 약병을 집어 들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준은 풀숲에 몸을 숨긴 채 아래에서 올라오는 용병들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상하단 말이야…자유 용병 같은데 왜 저렇게 손발이 잘 맞을까?’
그들은 분명히 서로 모르는 사람인척 행동하고 있었지만, 분명히 오랫동안 한 팀을 이뤄온 듯 상당히 능숙하게 역할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이준은 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신중하게 이곳저곳으로 몸을 옮기며, 그렇게 몇 시간 가량이나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 * *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준은 수풀 속으로 들어가는 다섯 명의 용병을 보며 싸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속이려면 제대로 해야지. 왜 얼굴을 아는 놈을 섞어, 섞기를.’
준의 신중한 성격은 이번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5시간 이상 숲 속을 기어다니며 용병들을 관찰하던 준은 그 중 몇 명에 지난번 약초 채집 때 동행했던 늑대 머리 용병단의 용병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소년은 조급하게 행동 하지 않고, 깊은 수풀에 숨어 사냥감을 기다리는 독사마냥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결국 그 무리를 따라 한참 동안이나 숲을 기어가자, 마침내 기회가 왔다. 다섯 중 하나가 동료들을 떠나 작은 수풀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큰 나무 뒤에서 용병이 소변을 보려고 바지를 벗으려는 찰나, 그의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며 의식이 흐려졌다…
……
잠시 후, 소변을 보러갔던 용병이 동료들을 향해 달려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마수야, 3레벨 마수야!”
“미친 새끼…여기는 천둥산 바깥 주위야, 3레벨 마수…억…”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달려가던 용병이 쓰러지고, 동시에 욕지거리를 내뱉던 용병의 머리통에 비수가 꽂혔다.
그리고 순식간에 남은 셋 중에 하나가, 쓰러진 둘이 있던 방향으로 끌려가자, 나이가 있어 보이는 용병 하나가 짧은 피리를 꺼내들었다.
이준은 흡장으로 끌어당긴 용병의 목을 순식간에 도려내고, 단숨에 몸을 날려 피리를 꺼낸 용병의 가슴팍을 후려쳤다.
‘마지막 하나!’
순식간에 넷을 처리한 준은 마지막 하나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하지만 척력장이 그의 가슴을 후려치는 순간…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끝내 피리를 불고 숨을 거두었다.
삑. 삑, 삑-
피리소리가 메아리처럼 연달아 울려 퍼지자, 수풀 곳곳에서 웅성거리며 용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젠장…너무 쉽게 생각했어.’
이준은 사방에서 피리소리가 울리기 시작하자, 즉시 몸을 돌려 달아났다.
하지만 피리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마침내 사방에서 그를 포위하듯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잡아!”
마침내 고함 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적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준은 속으로 욕을 내뱉으며 머리를 돌려 풀숲으로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참을 정신없이 달리던 준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살기등등한 표정을 지은 중년의 남자 하나가 빠른 속도로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 *
조용하던 천둥산이 갑작스런 추격전에 소란으로 가득해지고, 곳곳에서 용병들의 고함 소리와 욕설이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대규모의 추격전에 마수를 포획하려던 다른 용병단들도 모두 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돌렸다. 호기심이 강한 용병들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면서 대열에 합류하기도 했다.
“잡아! 지금 저 자식 몸에 3격 수련법이 있어!”
순간 기지를 발휘한 강헌의 한마디에 늑대 머리 용병단이 맞장구를 치면서 ‘지금 추격을 받고 있는 누군가’ 에게 3격 수련법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런 상관도 없던 용병들까지 적극적으로 준을 찾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 많은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는 이준 역시 강헌의 거짓말을 들을 수 있었다.
준은 속으로 강헌을 욕하면서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멈추지 못 했던 것이지만…
다시 한참을 달리던 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수가 가장 많이 출몰하는 지역을 향해 방향을 돌렸다.
“꼬마야, 어디까지 도망갈 셈이냐!”
강헌이 고함을 지르며 숨을 내쉬자, 연한 청색의 염력이 그의 양발을 뒤덮기 시작했다.
“4격 무투기. 바람의 발자취!”
푸른 염력을 발에 두른 강헌이 땅을 박차자, 그의 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준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젠장!”
바람을 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린 준은 화살처럼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강헌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꼬마야, 도망가도 소용없다! 오늘이 네 제삿날이니까!”
소년은 이를 악물고 저장반지에서 기력의 조각을 꺼내 삼키며, 죽을 힘을 다해 달렸다.
연금 비약의 약효가 몸 안에 돌기 시작하자, 이준은 오른손을 뒤로 향해 강헌을 겨눈 뒤 척력장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