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8성 투사 재필
사내는 흙먼지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다가, 뒤통수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고는 즉시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뿌지직…!
그가 몸을 엎드리자마자 강한 힘이 그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가고, 옆에 있는 나무가 순식간에 박살나며 굉음과 함께 쓰러지자, 사내는 한숨을 내쉰 뒤, 고양이처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수풀 속으로 빠르게 기어 들어갔다.
사내는 마치 포식자에게서 달아나는 도마뱀처럼 빠른 속도로 바닥을 기며 웃음을 지었다.
‘흐흐…만 육천 골드야, 자그마치 만 육천 골드라고!’
그의 눈앞에는 이미 거금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바닥을 기어가던 그의 귓가에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빠른데?”
“아, 아니 어떻게……”
다음 순간 사내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 기괴한 쇳덩이였다.
* * *
“헉…헉…됐어. 저기까지만 가면 돼.”
한 사내가 평화로운 숲 속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려가다가, 귀신에게 머리채를 잡힌 듯 덤불속으로 질질 끌려 들어갔다.
“안 돼! 아악!”
이윽고 사내를 뒤쫓아 온 그림자 하나가 그의 가슴을 후려치자, 사내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사내를 습격한 그림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시꺼먼 쇳덩이를 휘둘러 그의 숨통을 끊었다. 사내가 최후를 맞이한 자리에서는 흙먼지가 날리고 비릿한 피냄새가 풀내음과 뒤섞여 역한 냄새를 풍겼다.
준이 용병단과 추격전을 벌인지 이틀, 희생자의 숫자는 어느 새 15명이 되어있었다.
지금 준의 실력은 검은 송곳의 제약이 없는 상태에서라면, 7성 투사라도 20합 이내에 숨통을 끊을 수 있는 수준에 올라있었다. 물론, 상대에게 그와 같은 수준의 무투기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기는 하지만…이런 시골 용병단에 그런 무투기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는 추격전을 벌이며 자신이 죽인 용병단의 입에서 여러 가지 정보를 캐냈다. 희생자들의 말에 따르면 늑대머리 용병단의 최강자는 단장인 2성 무투사 ‘강헌’으로, 그 아래로는 9성 투사 한 명과, 8성 투사 한 명이 서열 2위와 3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즉, 그 세 사람을 제외한 누구도 1대1로는 자신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었다.
소년은 발아래 놓인 사내의 시체를 힐끗 바라본 뒤 가볍게 몸을 날려 나무 위로 올라가 동태를 살폈다.
“강재, 이제 시작이다.”
* * *
늑대머리 용병단 주둔지.
“이런 빌어먹을!”
강헌은 부하들의 보고를 듣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집어던졌다.
“고작 이틀 만에 벌써 열다섯 명이 죽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제 그 배후가 이준인 것은 확실합니다……”
강재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자, 강헌은 더욱 화를 내며 길길이 날뛰었다.
“그 애송이의 실력이 너랑 비슷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어떻게 7성 투사 세 명이 모두 그 놈 손에 골로 갈 수 있는 거지? 그 사이에 그렇게 실력이 올랐다고? 3개월이다 3개월! 3개월에 8성 투사라도 됐단 말이야?”
아버지의 추궁에 강재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해서는 놈을 잡을 수 없어. 방법을 바꾼다. 일단 지금 투입된 놈들을 당장 철수시켜. 그리고 이틀 뒤에 5인 1조로 다시 투입한다. 놈을 발견하면 즉시 신호탄을 쏴라. 내가 직접 놈의 숨통을 끊겠다.”
“알겠습니다 단장님!”
옆에 있던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 뛰쳐나가자, 강헌은 즉시 다른 부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재필이, 재필이는 어디 있느냐?”
질문을 받은 사내는 곤란한 표정으로 우물쭈물 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재필 3단장은 몇 몇 형제들을 거느리고, 난꽃주점의 안 행수와 함께 천둥산에 눈꽃여우를 잡으러 갔습니다.”
“뭐! 지금 상황이 이 모양 이 꼴인데 여자랑 눈꽃여우를 잡으러 가?”
분노한 단장이 또 다시 개거품을 물고 길길이 날뛰자, 다른 사내 하나가 그를 진정시키려 했다.
“단장님, 3단장은 8성 투사이니 만약 이준을 만나면 그 자식을 잡아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재필이 그 놈이 돌아오거든 내가 죽여 버리겠다고 전해!”
* * *
은은한 달빛 아래 천막 몇 개가 숲 속에 세워져 있고, 그 주위에는 몇 개의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준은 높은 나무 위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추격자들의 야영지를 느긋하게 바라보았다.
빼곡하게 들어찬 나뭇가지 덕분에 누구도 그를 발견하지 못 했고, 덕분에 이준은 느긋하게 적의 전력을 분석할 수 있었다.
‘5성 투사 열다섯, 8성 투사 한 놈. 저놈이 서열 3위인 재필이라는 놈이겠군. 1대1이라면 어렵지 않은 상대지만…저놈하고 붙을 때 협공을 당하면 쉽지 않겠어. 우선 잔가지부터 치고 시작해볼까.’
찬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날리자, 이준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난 듯 웃음을 지으며, 저장반지에서 아라에게 받은 약봉지를 꺼내들었다.
‘5성 투사 정도면 효과가 있겠지.’
그 때, 준은 자신이 숨어있는 나무 둥치 아래로 두 사내가 걸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몸을 웅크렸다.
‘젠장…걸린 건가!’
* * *
“이런 염병…아니 저깟 계집애 비유 하나 맞추자고, 이 밤까지 이게 무슨 지랄이야 지랄이…”
“입 조심해. 3단장이 애지중지 하는 계집이야.”
“얼마 전에는 작은 단장이랑 있던걸?”
“쉿! 아, 이 사람이 못하는 말이 없네. 괜한 쓸데없는 소리해서 분란 일으키지 말고 볼일 다 봤으면 얼른 돌아가자고.”
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을 숨겼다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조심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둘은 그저 볼 일을 보기 위해 야영지를 벗어난 것 뿐 인 것 같았다.
‘이거…생각지도 않게 일이 쉬워지겠는걸.’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준은 두 명의 용병이 자신이 있는 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주위를 둘러보고 즉시 몸을 날렸다.
……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가 소리 없이 둘을 덮치고, 그렇게 늑대 머리 용병단에는 또 두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준은 쥐도 새도 모르게 두 시체를 수풀 속에 던져놓고 다시 나무 위로 올라가 때를 기다렸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야영지를 향해 바람이 불자 소년은 즉시 손 안에 든 약가루를 천천히 바람에 실어 보냈다.
이윽고 천막 주위에 있던 용병들이 하나 둘 쓰러지자, 이준은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나무에서 내려와 방금 전에 수거한 검을 손에 쥐고, 중앙에 있는 천막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중앙에 있는 천막으로 다가가자, 3단장의 목소리와 함께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이거… 정말이지 한심한 용병단이군. 자신이 소속된 용병단의 수하가 이틀 동안 10명 이상 죽어나가는 판에 3단장이라는 작자가…’
준은 검을 움켜쥐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귀를 기울여 천막 밖으로 새어나오는 재필의 목소리를 통해 상대의 위치를 가늠해보았다. 정면으로 대결을 펼쳐도 자신이 있었지만, 기습이 성공해서 끝을 볼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았기 때문이다.
‘여기쯤인가…’
준의 손에 들린 검이 서늘한 빛을 발하며 천막을 찢어내는 순간, 재필은 뒷목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아 잽싸게 앞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빗겨 간 칼날은 멈추지 않고 은빛 원호를 그렸고, 이번에는 재필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쳤다.
“아아아악!!!”
갑자기 벌어진 참극에 재필과 이야기를 나누던 여인이 소리를 지르자, 준은 잽싸게 흡장을 펼쳐 장작 하나를 빨아들였다가 그녀를 향해 쏘아냈고, 목덜미에 장작을 얻어맞은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누구야? 감히 내 여자를 건드려? 내가 늑대머리 용병단 3단장인 거 몰라?”
“그래서 너를 죽이러 왔다.”
“뭐라고?”
사내는 갑작스런 야습에 이어 새파란 애송이가 자신을 죽이러 왔다고 선언하자, 눈을 가늘게 뜨고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하다가, 이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이준이라는 애송이가 너냐?”
“저를 알아봐 주시다니 참으로 영광입니다.”
“푸하하!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 다닌다 했더니, 아주 머리가 나쁜 놈이군. 어쨌든 고맙다, 찾는 수고를 덜어주다니.”
재필은 말을 마치자마자 발로 땅을 힘껏 박차며 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꺼져!”
하지만 소년이 나지막이 읊조리며 손을 펼치자, 손바닥에서 강력한 힘이 뿜어져 나와 재필의 몸을 강타하고, ‘쿵’하는 소리와 함께 재필이 멈춰 섰다.
‘역시…8성 투사정도 되면 이렇게 되는 건가.’
준은 상대가 척력장을 버텨내는 모습을 보고는 잽싸게 염력을 끌어올렸다. 지금까지는 자신보다 현저하게 실력이 떨어지는 상대였기에, 척력장과 흡장만으로도 충분했지만, 8성 투사인 재필은 역시나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제법인데? 바위의 힘!”
재필이 주먹을 불끈 쥐자 그의 온 몸이 하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준은 태연한 표정으로 재필을 바라보다가 그의 주먹이 지척에 다가오는 순간, 슬쩍 몸을 틀어 상대의 공격을 피해낸 뒤, 그대로 상대의 뒷목을 내리쳤다.
퍽!
그러나 재필은 준의 공격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고, 놀란 것은 오히려 준이었다. 재필의 몸은 마치 바위처럼 단단해 돌이라도 때린 기분이었다.
준은 이를 악물고 번개처럼 팔 다리를 휘둘러 주먹과 발, 무릎과 팔꿈치를 모두 이용해 재필을 두들겼다. 하지만 재필은 가렵지도 않다는 듯, 쏟아지는 공격을 모두 몸으로 받아내다가, 귀찮다는 듯 준을 붙잡아 땅바닥에 집어던졌다.
쾅!
“억…!”
“정말이지 어이가 없군. 겨우 이 실력으로 나를 찾아온 거냐?”
재필은 벌떡 일어나 다시 자세를 취하는 준을 바라보며 염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입에서 하얀 기체가 뿜어져 나오고, 온 몸의 근육이 불끈거리며 전신이 더욱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죽어라.”
눈 깜짝 할 새에 준의 눈 앞에 살기가 가득한 표정을 지은 재필이 나타나더니, 집채만한 주먹이 바람을 가르며 그의 머리를 노렸다.
이준은 황급히 척력장을 사용해 몸을 뒤로 뺐지만 재필을 뿌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 다시 집채만한 주먹이 준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치자, 더 이상 피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준은 전력을 다해 주먹을 휘둘렀다.
쾅!
준은 재필과 부딪히자마자, 뼈가 부러질 듯 한 통증을 느끼며 뒤로 후퇴했다.
“호오…나와 정면으로 부딪히고도 살아있다니. 생각보다 튼튼한 놈이군.”
이쯤 되자 이준 역시 검은 송곳을 매고 싸우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쿵……
소년의 등에 매고 있던 검이 떨어지자, 묵직한 소리와 함께 땅이 움푹 패였다. 검은 쇳덩이가 땅에 떨어지는 육중한 소리는 상대로 하여금 그 쇳덩이의 무게를 짐작하게 하고도 남았다.
“미안하군. 8성 투사를 연습상대로 생각했다니.”
이준이 실력을 발휘하자, 재필은 상대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순식간에 재필의 시야에서 이준이 사라지기를 두 세 번, 결국 그는 뒤를 잡히고 말았다.
“태초의 힘…!”
퍽!
그러나 이번에도 바위를 두드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준의 주먹은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 했다.
“하하…! 쥐새끼, 속도만 빨라졌지 힘은…”
우직…
재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섬뜩한 소리와 함께 그의 입에서 피와 함께 찢어진 내장이 쏟아져 나오자, 소년은 싱겁다는 듯 손을 툭툭 털고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