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화. 검은 구름 매의 날개
아라는 약초꾼이 돌아가자마자, 주위에 있는 용병들을 향해 나긋나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여러분, 늑대머리 용병단의 용병분들에게 다른 일이 좀 생겼다고 하네요. 혹시 다른 분들 중에 제 호위를 맡아주실 분이 없을까요?”
소의선의 제안에 다른 용병들은, 신이 나서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고 앞다투어 아라를 향해 달려왔다.
강재는 주먹을 꾹 쥐고 쓴 웃음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라는 그런 강재를 바라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강재 도련님, 그 이준이라는 친구가 떠날 때 저에게 전언을 남겼는데,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녀는 사내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재미있다는 듯,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다시 돌아오면 당신과 늑대머리 용병단을 박살내주겠다고 하더군요.”
준의 전언을 들은 강재가 눈썹을 파르르 떨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의 얼굴에는 짙은 살기가 배어 있었다.
“하, 좋습니다. 천둥산에서 살아나오면 다시 만나자고 하죠.”
강재는 그 말을 끝으로 부하들에게 손짓을 한 뒤 자리를 이탈했다.
분한 표정으로 등을 돌리는 강재의 뒷모습을 보며 아라의 웃음에 얼굴이 번졌다. 그녀는 기다란 손가락으로 머리칼을 넘기며 산 정상을 바라봤다.
산 정상에는 야영지에서 철수하는 용병단을 내려다보는 작은 그림자 하나가 서있었다.
* * *
풀 숲 위에 바짝 엎드린 소년의 몸 위로 나뭇잎들이 무수하게 쌓여있고, 그의 시야에는 피처럼 붉은 털을 가진 늑대가 어슬렁대고 있었다.
아라와 헤어진 후 이틀 동안 그는 쉬지 않고, 천둥산의 깊은 산 속까지 들어와 있었다. 약로가 요구한 수련 장소에 적합한 조건을 가진 곳이 마땅치 않아, 그는 마수를 피해 다니며 온 산을 헤집고 다니는 중 이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다 자란 1레벨 마수인 불 늑대였다. 수련용 검만 아니라면 1레벨 마수 따위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지만, 염력을 제한받은 상태로 정면 승부를 벌이기에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준은 가만히 누워 불늑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가, 번개처럼 몸을 일으켜 주먹을 뻗었다.
“태초의 힘!”
강력한 공격이 급소에 적중하자, 마수는 제대로 된 반격 한 번 해보지 못 하고, 그대로 나가떨어져 큰 나무에 부딪히더니, 이내 힘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소년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허리에 찬 비수를 꺼내, 늑대의 머리를 단숨에 잘랐다.
“마정석?”
준은 이틀만에 처음으로 불 속성의 마정석을 구하는데 성공했다. 지난 이틀간 이런식으로 몇 번인가 마수를 잡았는지, 마정석을 가지고 있는 마수는 이놈이 처음이었다.
소년은 마정석을 꺼낸 후 늑대의 시체를 대충 치워두고, 빠른 걸음으로 숲을 헤집고 걸어갔다.
그렇게 몇 분을 걸었을까…소년의 귀에 물줄기가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정신없이 달려 물가를 향했다.
다시 몇 분을 달리자 우렁찬 소리와 함께 물안개가 자욱하게 펼쳐졌다. 폭포였다. 이준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물소리가 나는 곳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산봉우리에서 시원하게 떨어지는 폭포가, 짙은 물보라를 만들어내며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폭포의 양 옆은 가파른 절벽이었고, 그 절벽 위에는 자그마한 동굴 몇 개가 보였다. 산굴 앞에 돌덩이를 옮겨 쌓아두면, 마수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수련에 적당한 장소를 찾았어.”
그는 두 팔을 벌린 채, 물 냄새가 느껴지는 시원한 공기를 깊게 들이 마시며 웃음을 지었다.
“하아…”
* * *
준은 천천히 폭포 주위를 둘러보며 마수가 없는지 확인했다.
비탈진 산벽을 타고 한참을 둘러보니 아래에서 보지 못 했던 산굴이 몇 개 정도 더 있었다.
준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땅에서 5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산굴을 자신의 주거지로 삼기로 정했다.
산굴 안은 꽤 시원했고 면적도 넓어, 혼자서 생활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게다가 산굴 내부의 바닥을 세심히 훑어봤지만, 마수가 남겼을 만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산굴을 깔끔하게 정리한 후, 은빛성에서 구매한 물품들을 하나하나 꺼내 거처를 마련했다.
실내가 대충 정리됐으니 입구를 만들 차례였다. 준은 밖으로 나가 커다란 바위를 하나 구해, 사람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만 남겨놓고 입구를 틀어막았다.
열심히 앞으로 생활할 거처를 마련하고 나니, 어느새 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준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저장반지 속에서 월광석을 꺼내, 산굴의 이곳저곳에 배치해보며 적절한 위치를 찾았다.
“좋아…”
월광석에 침대, 은빛성에서 마련한 간소한 몇 가지 도구까지 펼쳐놓으니 산굴은 어느새 제법 그럴싸한 거처가 되어 있었다.
소년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부드러운 침대에 올라 앉아 다리를 꼬고 눈을 감았다.
……
눈을 감고 염력을 모으기를 몇 시간, 이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을 쥐어보았다. 확실히 생사의 위기에 처했던 경험이 도움이 됐는지, 그는 예상보다 빨리 5성 투사가 되어 있었다. 이대로라면 늦어도 두 달 이내에 6성 투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준은 자신의 체력과 염력이 어느 정도 돌아온 것을 확인한 뒤, 저장반지에서 검은색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검은색 두루마리는 며칠 전 산굴에서 목숨을 걸고 얻어낸, 3격 상 수준의 비행 무투기였다.
아라는 비행 무투기가 뭐 그리 대단하냐는 식으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날 수만 있다면 그 날 하늘 수리의 도움이 없었어도 유유히 혼자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쓰기에 따라서 공격력이 없는 비행 무투기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유용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투령급 이상의 강자에게만 허락된 비행 능력은 소년의 가슴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이준은 중요한 의식을 치르기라도 하듯 숨을 고르며, 두루마리에 묶인 끈을 조심스레 풀어헤쳤다.
두루마리를 펼치자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섬칫한 검은 날개가 눈에 들어왔다. 두루마리 위에 그려진 그림인지라 크기는 대단치 않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열기가 느껴졌다.
검은색 날개 위에는 희미한 구름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준이 그림 위에 후 하고 숨을 불어넣자, 날개 위의 털들이 진짜 날개처럼 펄럭이는 것이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날개 옆에는 검은색 글씨로 무언가가 적혀있었다.
‘검은 구름 매. 5레벨 비행마수. 전설의 생물인 봉황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모든 마수 중 가장 빠른 비행속도를 자랑하며, 천성이 교활하고 흉악해, 생포하기가 매우 어려움. 투기대륙 남쪽의 구름산에만 서식함.’
“5레벨 마수?”
준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5레벨 마수라면 투왕급의 강자만이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의 강력한 마수였다.
‘무투기의 명칭은 매의 날개. 이 무투기는 본인과 몇 몇 벗들이 3년 이라는 시간에 걸쳐 검은 구름 매를 포획하여 만든 비법으로, 마수의 날개를 염력으로 옮겨 담은 것이다. 나는 이것이 필요치 않으나, 후세를 위해 남겨두니 부디 유용하게 쓰이기를 바란다.
추신 : 이 무투기는 생포한 마수의 날개를 염력으로 옮겨 담은 것 이므로 오직 한명만이 익힐 수 있음 ‘
준은 두루마리에 담긴 설명을 끝까지 읽고 난 뒤 감탄을 금치 못했다.
‘투왕 레벨의 마수를 포획해 그 날개를 염력으로 두루마리에 담을 정도라면 대체 어느 정도의 투사였을까?’
글귀에서 눈을 뗀 이준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검은 날개를 살며시 만져보았다. 비록 그림이었지만 한올한올 깃털의 촉감이 살아있는 것이 마치 진짜 날개 같았다.
신기한 마음에 다시 한 번 날개를 만지던 준은, 갑자기 불에 손을 데인 어린 아이처럼 깜짝 놀라 손을 뗐다.
“말도 안 돼!”
준은 날개에서 느껴지는 마수의 흉포한 기운에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스승님, 스승님, 이거 이상해요! 이 날개, 영혼이 느껴져요!”
소년은 도저히 믿을 수 없어 즉시 스승을 불러냈다.
“뭐야, 진짜 영혼이 들어있군. 하지만 의식은 없다. 걱정하지 말거라.”
허공에 나타난 약로 역시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의식이 없다고요?”
“허…이런 것은 나도 처음이구나. 아마도 이 비행 무투기를 만들 때, 무언가 특별한 비술을 사용한 모양이다. 상태를 보니 비행 마수의 영혼과 날개를 뽑아낸 뒤, 그것을 합쳐 두루마리에 담은 모양이다.”
5레벨 마수의 영혼이 담겨있다는 말에 준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그럼…이거 수련하면 큰 일 나는 거 아닌가요? 5레벨 마수의 영혼이라구요.”
약로는 잠시 두루마리를 들여다보다 웃음을 지으며 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음…아니다. 영혼이 담겨있기는 하지만, 자의식이 없어. 사용할 때 조심하기만 하면 별 일은 없을 것이다.”
약로의 말을 들은 이준은 조금 안심이 됐지만, 여전히 불안했다. 5레벨 마수라면 웬만한 인간보다도 머리가 좋았다.
그는 다시 한 번 천천히 두루마리를 읽어나갔다.
“날개 속의 영혼이 수련하는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다. 그 공격을 막아내면 수련을 계속할 수 있지만…아니면 포기하라고? 스승님, 이거 진짜 괜찮은거 맞아요?”
“으이그…평소에는 그렇게 배짱 좋게 이거 내놔라 저거 내놔라 하던 놈이, 왜 이리 담이 작아졌누…이놈아 그럼 투령급이나 되야 가질 수 있는 비행능력인데, 날로 먹으려 했느냐. 너 정도의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면, 의식도 없는 5레벨 마수의 영혼에 먹히지는 않는다. 걱정하지 말래도.”
준은 다시 한 번 약로에게 안전한지를 물은 뒤, 천천히 손을 내밀어 날개를 만졌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두루마리속의 날개에서 매의 영혼이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졌다. 이윽고 귀청을 찢을듯한 마수의 비명 소리가 송곳처럼 그의의식을 파고들었다.
처음으로 영혼 공격을 받은 준은 새하얗게 질려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영혼 공격은 정신력 싸움이나 다름 없느니라!”
준은 스승의 호통 소리에 이를 앙다물고, 영혼 탐지 능력을 활용해 머릿속에 울려퍼지는 끔찍한 마수의 울음소리를 몰아내려 발악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끔찍한 비명 소리가 잦아들고 갑자기 가슴속에서 여태껏 느껴본 적 없던 강렬한 살의가 치솟았다.
“그가 너의 마음을 좌지우지 하지 못하게 정신을 가다듬거라. 그렇지 못하면, 너는 살기만 가득 찬 야수로 변하게 될 것이다!”
소년은 가슴속에서 불길처럼 일어나는 분노와 살의를 다스리기 위해, 다시 온 정신을 집중했다.
* * *
그렇게 5레벨 마수의 영혼과 줄다리기를 한지 30여분…마수는 더 이상 저항하기를 포기했다. 실력으로 치자면 준은 5레벨 마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 했지만, 이미 오랜 세월 특별한 비술에 의해 쇠퇴한 마수의 영혼은, 준의 강력한 영혼을 이길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영혼의 싸움이 끝나자, 준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염력이나 체력은 조금도 필요하지 않았지만, 영혼의 힘을 겨루는 것은 육체를 사용한 전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피로를 선사했다.
“성공…했어요?”
“그래. 너는 이제 이것을 수련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셈이다.”
약로가 인자한 웃음을 짓자, 준은 다시 한 번 두루마리 안에 그려진 날개를 만져보았다. 마수의 영혼은 더 이상 준을 공격하지 않았다.
소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비행 무투기를 익히기 시작했다.
두루마리에서 설명한 궤도를 따라 염력을 조종하자, 두루마리위의 검은 날개에서 환하게 빛나며 검은색과 보라색의 빛줄기가 솟아나와, 번개처럼 준의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두 갈래의 빛줄기는 준의 혈관을 따라 이동해, 척추 언저리에서 멈춰서더니 어깨 죽지를 타고 등 전체로 퍼져나갔다.
“으아아악!”
준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에 자기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어찌나 이를 세게 물었는지, 입안에서 비릿한 피 내음이 느껴졌다.
“으아아악! 이게 뭐야!”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준은 온 몸의 혈관이 갈가리 찢기는 듯한, 통증을 견디지 못 하고, 끝내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