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58화 (58/818)

제58화. 도주

아라는 그 독경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반면, 준은 그 물건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이준은 망설임 없이 알록달록한 두루마리를 그녀에게 건넸다.

“난 별로 필요 없을 것 같네. 나는 내 염력과 무투기를 단련하기도 바뻐. 익히려면 익힐 수야 있겠지만 시간이 아까워.”

소년이 시원스럽게 두루마리를 넘기자, 아라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근데…네 손에 든 물건이 뭔지는 좀 알려주지? 정말 안심할 수 없는 여자구만.”

이준의 날카로운 지적에 아라는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가 멋쩍게 웃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그녀의 손 안에는 초록색 가루가 담긴 작은 봉지가 쥐여져 있었다.

“그게…”

“됐어. 여자의 몸으로 남자와 단 둘이 보물을 찾는데, 제 몸 하나 지킬 수단은 있어야지.”

“고마워.”

그녀는 혀를 내밀고 애교스럽게 웃으며 초록색 봉지를 집어 넣었다. 준은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조차 없다는 듯, 즉시 두 번째 상자의 자물쇠에 열쇠를 밀어 넣으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 초록색 가루는 무슨 용도로 쓰이는 거야?”

“이건 몇 가지 최면작용이 있는 약초를 혼합하여 만든 거야. 흡수하기만 하면 반나절 동안 잠에 취하게 돼. 그런데…대단찮은 약이라 실력 있는 투사라면, 염력으로 독을 몰아낼 수 있어.”

아라가 멋쩍게 대답했다.

“치명적인 독약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그래도 그렇게까지 나쁜 여자는 아닌가봐?”

입을 삐죽거리며 비아냥거리던 소년의 얼굴이 환해졌다.

“열렸어!”

두 번째 상자 안에는 검은색 두루마리가 들어있었다.

준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두루마리를 꺼내들었다.

“3격 상, 비행 무투기 : 매의 날개?”

소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 번 두루마리에 적힌 글자를 읽고 나서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비행 무투기?”

하지만 아라는 비행 무투기가 뭔지 모르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행 무투기는 무슨 물건인데? 처음 들어보는데?”

“이 무투기를 익히면 날 수 있다고! 정말 몰라?”

준의 설명을 들은 아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늘을 날아? 그건 투령급 이상의 투사들만 가능한 것 아니야?”

투기대륙에서 하늘을 날 수 있는 능력을 가지려면, 적어도 투령급은 되어야 했다. 그나마 투령급의 투사라고 해봤자, 아주 짧은 거리를 날 수 있는 수준이었고, 투왕이나 투황급의 강자는 되어야, 자신의 염력으로 날개를 형성해 진정한 의미에서 하늘을 날 수 있었다.

하지만 비행 무투기를 익힌 자들은, 독특한 염력 운용법을 통해 투령급의 실력을 갖추지 않아도, 하늘을 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검은색 두루마리를 품에 끌어안고, 아라를 노려봤다. 준의 그런 아이 같은 모습을 처음 본 아라,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말았다.

“알아. 이건 네꺼라는 거지? 너도 애는 애구나…하늘을 나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거니?”

“응, 이건 양보 못 해.”

이번에는 아라가 별 관심이 없다는 듯,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 마지막 하나야. 빨리 열어 보고 돌아가야 돼.”

그녀는 마지막 함을 가리키며 준을 재촉했다.

“알았어.”

준은 비행 무투기를 얻었다는 사실에 콧노래까지 부르며 마지막 열쇠를 붙잡았다.

드디어 마지막 자물쇠에 열쇠가 들어가는 순간…소년은 갑자기 이마를 찌푸리며 몸을 돌려, 바위 문의 입구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누가 들어왔어.”

“뭐라고?”

아라는 준의 갑작스런 행동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럴 리가 없어. 여기는 우리 둘 밖에 몰라.”

“아니, 한 두 명이 아니야.”

아라를 노려보는 소년의 눈동자는 확신에 차 있었다. 아라는 억울하다는 듯 손을 저었다.

“지금 나를 의심하는 거야?”

소년은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황급히 열쇠를 집어들고, 마지막 상자를 열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긴장한 탓인지 좀처럼 자물쇠를 열 수가 없었다.

“젠장!”

준은 다급한 마음에 두 손으로 상자를 들어 올리려 했지만, 상자는 푸른 바위에 단단히 붙어있어, 도저히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젠장! 이미 들어왔어.”

이번에는 아라 역시 인기척을 느꼈는지 밀실의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하하, 아라님, 고맙게도 길을 안내해줬네요. 보아하니 내가 얻은 정보가 사실이였네!”

이윽고 밀실의 입구에 사람 그림자가 비추고…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재……!”

* * *

강재와 그의 수하들은 밀실 안에 들어서자마자, 밀실의 유일한 출입구인 바위 문을 막아섰다.

“이거 미안하게 됐네.”

아라는 이를 악물로 차가운 눈빛으로 강재를 쏘아봤다.

“나를 미행한 거야?”

“미행이라고는 못하지. 며칠 전에 당신이 보물이 있는 동굴을 찾았다는 정보를 얻었거든. 다만 정확한 위치를 몰라서, 조금 헤매다 보니 생각보다 늦었을 뿐이야.”

사내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자, 아라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악을 썼다.

“너 설마 수진이를……!”

“하하, 걱정하지 마. 당신의 시녀는 무사해. 난 정말로 당신에게 호감이 있다고. 당신이 아끼는 시녀는 털끝하나 상하지 않았어. 하지만 당신도 참 신중하지 못 하군. 그런 이야기를 그깟 시녀에게 미주알 고주알 털어놓다니…”

“이런 망할 자식!”

“미안해. 하지만 이 물건들은 우리 늑대머리 용병단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야. 이것만 있으면 우리는 청산마을을 장악하고, 외부로 세력을 확장할 수 있거든. 나 정도 되는 사내가 이따위 작은 마을에 만족해서는 안 되지.”

“개자식……”

아라가 이를 악물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한 자세를 취하자, 강재는 아쉽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라. 이러지마. 나는 정말로 당신이 좋다구. 어차피 당신이 내 부인이 된다면 늑대머리 용병단은 당신 것이 될 거야. 부디 나에게 거친 수단을 동원하게 하지 말아줘.”

짐짓 다정한 말투로 그녀를 배려하는 척하는 강재의 말투를 듣자, 아라는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꺼져, 너 같은 사내의 아내가 되라고? 상상만 해도 역겨워.”

그러나 강재는 아라의 거친 말에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그건 아직 당신이 내 매력을 몰라서 그래.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당신도 자연스럽게 나를 사랑하게 될 테니까.”

말을 마친 강재는 혀를 끌끌 차며 준을 바라봤다.

“쯧쯧…내가 낮에 우리 식구가 되라고 제안하지 않았던가? 이제 너무 늦었어. 그러게 어른이 말하면 들어야지. 아쉽게 됐군. 재능이 있는 것 같던데.”

“대투사 한명도 없는 용병단 주제에 잘난 척은. 주제 파악이 안 되는군. 너 정도 사내는 널리고 널렸어. 오히려 너 정도 사내에게는 이 산골 마을도 과분할 정도지.”

강재는 어린 투사의 독설에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역시, 어린놈이라 그런지 상황 파악이 잘 안되나?”

준은 강재의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고, 바위 문을 막아선 늑대머리 용병단의 투사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지금 자리에 나타난 용병들은 하나 같이 4성 투사나 5성 투사였고, 강재는 6성 투사였다. 지금 자신의 실력으로는 4성 투사 한명이 한계였다. 등에 짊어진 수련용 검을 벗는다고 해도 6성 투사 한명과 호각을 이루면 다행이었다. 염력을 제한 당하건 말건 확실히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마음속으로 약로를 불러보았다. 하지만 약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신의 비밀병기가 반응이 없자, 소년은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강재는 자신만만하던 준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는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렸다.

“큭큭…내가 그 동안 너만한 투사하나 못 봤을 것 같나? 너만큼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재능 있는 놈을 몇 명인가 봤어. 확실히 대단하지. 그 나이에 2성 투사라니…하지만 말이야…재능 있는 어린 투사라고 죽음이 피해가는건 아니거든. 다 자란 호랑이라면 모를까, 호랑이 새끼는 늑대에게 물려죽을 수도 있단다.”

“늑대라면 모를까, 호랑이 새끼가 개에게 물려죽지는 않겠지.”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소년의 태도에 강재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대단해, 대단해. 그래, 그래. 그럼 네 앞에 있는게 개인지 아닌지 곧 알 수 있겠군.”

말은 대차게 했지만, 준 역시 이 상황을 벗어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자리를 무사히 벗어나기 위해 꾀를 짜내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 서 있던 아라가 은밀하게 무언가를 건넸다.

‘최면가루…!’

준은 머리를 살짝 끄덕인 뒤 빠르게 밀실의 내부를 둘러보다가,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월광석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작해! 저 자식은 죽이고, 아라는 절대 다치지 않도록 조심해! 저 여자는 내 여자야!”

소년이 아직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기도 전에 강재의 명이 떨어지고, 곧바로 다섯 명의 용병이 칼을 뽑아들고 걸음을 옮겼다. 나머지 다섯은 여전히 바위 문 곁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젠장…능숙하군.’

여전히 꽉 막힌 바위문을 보며 이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차라리 전원이 동시에 달려들었다면, 조금은 더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

‘할 수 없나…’

준은 신속하게 염력을 운용해 아라에게 건네받은 약 봉지를 집어던졌다.

펑!

약봉지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녹색 가루가 밀실 안에 흩날리자 강재는 즉시 입을 틀어막았다.

“호흡을 멈춰! 입구를 내주지 마라. 진철! 너는 저놈을 공격해!”

우두머리의 냉철한 판단에 용병들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기습의 결과는 준이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형편없었다. 하지만 아직 그가 준비한 비장의 수가 남아 있었다.

이준은 한 손으로 아라를 잡은 뒤 월광석을 향해 손을 펼쳤다. 그러자 벽에 걸려있던 월광석이 순식간에 그의 손바닥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소년은 잽싸게 손바닥을 돌려 월광석을 저장반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밀실을 비추던 월광석이 하나 사라지자, 실내는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준은 멈추지 않고 잇달아 다른 월광석을 빨아들였다. 하나, 둘, 셋…마지막 월광석까지 저장반지에 들어가자, 석굴 안은 완전히 어둠에 잠기고 말았다.

……

밀실 안에 칠흑같은 어둠이 내리는 순간, 준은 아라를 붙잡고 즉시 입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당황하지 마! 불씨를 꺼내! 모두 움직이지 말고 서 있어. 입구에 있는 놈들은 문을 지나려는 사람이 있다면 무조건 죽여라!”

이번에도 강재의 명령은 정확했다. 하지만 용병들이 불씨를 꺼내는 순간, 거센 바람이 일며 누군가가 그들의 가슴을 내리쳤다.

“억…!”

“입구에 도착했어. 빨리 막아!!”

입구에 있는 용병들은 즉시 무기를 움켜쥐고 공격태세를 갖첬다. 하지만 그림자는 이미 용병들을 그대로 지나쳐 가장 뒤에 서 있는 강재를 향하고 있었다.

“단장님, 그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강재는 두 다리를 벌려 자세를 취하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초록색 염력이 그의 주먹에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염력을 끌어올림과 동시에, 가슴팍에서 작은 월광석 조각을 하나 꺼내 바닥에 던졌다. 미약한 빛이었지만 적의 위치를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월광석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두 개의 그림자가 그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거목의 주먹!”

강재는 고함소리와 함께 그림자를 향해 전력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젠장…!’

준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등에 짊어진 검을 붙잡았다.

수련용 검이 저장반지로 되돌아가는 순간, 그의 혈관에 해일처럼 염력이 용솟음쳤다. 이윽고 주먹을 쥐고 염력을 끌어올리자,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속도로 무시무시한 염력이 폭발하듯 그의 주먹으로 밀려들었다.

“태초의 힘!”

퍼어엉!

두 투사의 주먹이 맞닿은 순간, 강재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이 호랑이가 아니라 호랑이 새끼라며 비웃었던 소년의 실력은, 놀랍게도 6성 투사인 자신과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준의 실력은 아직 그에게 미치지 못했다. 그는 전력으로 준을 막아서며 다급하게 수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이 자식을 죽여! 어서!”

“어서! 지금 나와 대치하고 있단…억!”

쾅!

바로 그 때, 다시 한 번 묵직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