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희귀한 약초
암사의 묵직한 몸뚱아리가 땅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절벽위까지 들려오자, 아라는 그제서야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며 준을 바라봤다.
“흥…건방진 꼬맹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실력은 제법 있나보네?”
하지만 그녀는 아직도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은 듯, 가느다랗게 손끝을 떨고 있었다.
준은 그녀의 반응을 무시한 채 목적지를 뚫어져라 바라봤다. 동굴 주위에 쌓여있는 돌덩이와 나무들을 보니 그냥 들어가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는 다시 한 번 염력을 끌어 모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강력한 염력이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와, 동굴 앞의 돌덩이와 나무들을 쓸어버렸다.
소년은 숨을 몰아쉬며 깨끗해진 동굴의 입구를 바라봤다. 어느 새 그의 이마에는 식은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나무와 돌덩이가 사라지고 달빛이 비추자, 산굴의 형상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의 입구는 그다지 크지 않아 기껏해야 사람 한 두 명이 지나갈 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았고, 동굴 안은 매우 어두웠지만 그 안에서 은은하게 신비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준은 흥분으로 눈을 반짝이며 아라를 안은 채, 발 끝으로 산벽을 차며 벽을 타고 날 듯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 * *
동굴 앞에 도착한 아라는 준의 가슴에서 빠져 나오자마자, 기대 가득한 표정으로 동굴을 들여다 보았다.
준은 말 없이 나뭇 가지를 주워 불을 붙인 뒤, 어두운 동굴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라는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를 악물고 성큼성큼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기는 소년의 뒤를 따라갔다.
동굴 안은 이 세상이 아닌 듯 고요하고 어두웠고, 으스스한 한기까지 감돌고 있었다.
음산한 기운에 겁을 먹은 아라는 두 팔로 자신의 몸을 문지르며, 혹여라도 동행과 떨어질까 준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다.
적막 속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긴지 10여분, 아라가 적막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려는 찰나, 앞서 가던 이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아!”
겁을 먹은 나머지 준과 너무 딱 달라붙어 걷던 아라는, 갑자기 소년이 걸음을 멈추자 그만 그의 등에 몸을 부딪히고 말았다.
“더 이상 길이 없어.”
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눈앞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방향에는 은은한 노란 빛을 내뿜는 바위 문 하나가 서 있었다.
아라는 이마를 문지르며 앞으로 나아가, 바위 문을 자세히 살핀 뒤 입을 열었다.
“바위 문 뒤에 우리가 원하는 게 있을 거야. 안 그래?”
준은 동의를 구하는 듯한 아라의 말을 무시한 채, 바위문을 만지고 두드려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너무 두꺼워. 적어도 무투사 정도는 되야 깰 수 있을 거야.”
아라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준을 흘겨봤다.
“멍청하게 힘을 쓸 생각만 하지 말고 머리를 써 봐. 바위 문에서 노란색 빛이 나오는걸 보면, 분명 비밀장치가 있는 거야.”
“장치를 해제할 줄 알아? 나무 속성이나 흙 속성의 염력이 없으면, 장치를 해제할 수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거기 관련 된 책을 좀 읽어봤을 뿐이야. 뛰어나게 잘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한 번 찾아 봐야지.”
아라는 소년의 질문에 건성건성 대답을 하며, 천천히 바위 문 이곳저곳을 조사했다.
준 역시 무언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이 있을까 횃불을 들이대고 바위 문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바위 문과 주위의 벽을 만지고 샅샅이 훑어보기를 10여 분, 마침내 무언가를 발견한 아라가 환한 웃음을 지었다.
“찾았어!”
반가운 소식에 고개를 돌리자, 몸을 구부리고 앉아 바위 문 아래에 붙어 있는 작은 돌멩이를 만지작 거리는 아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주먹만한 돌 하나를 들어 옆으로 옮기자, 육중한 소리와 함께 바위 문이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바위 문이 완전히 열리자, 은은한 빛이 밖으로 퍼져 나오며 주위의 어둠을 깨끗이 몰아냈다.
아라는 뒤로 두 걸음 정도 물러서더니 준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준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돌멩이 몇 개를 주워, 바위문 안에 뿌려본 뒤 잠시 동안 기다렸다가 발걸음을 옮겼다. 아라는 준의 이런 주도면밀함에 질린 듯 혀를 끌끌 찼다.
“너…조심성 끝내준다.”
“칭찬 고마워.”
두 사람이 바위문 안에 들어서자 시야가 갑자기 환해졌다. 바위 문 안에 숨겨진 밀실에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월광석이 박혀 있었고, 중앙에는 해골이 놓인 커다란 의자가 놓여있었다.
시선을 앞으로 향하자, 의자 앞에는 푸른 빛을 띤 긴 바위가 있었고, 바위 위에는 자물쇠로 굳게 잠긴 돌로 된 상자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다시 눈을 돌리자, 밀실의 세 모퉁이에는 여기저기에는 금은보화와 보석들이 쌓여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수십만 골드는 되어 보였다.
준은 다시 천천히 방 안을 둘러보다가 밀실의 한쪽 구석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밀실의 마지막 모퉁이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고, 그 화단에는 각종 화초와 식물들이 자라고 있었다.
아라 역시 그 화단을 발견하자 믿을 수 없다는 듯 화단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은 방안에 있는 금은보화 따위보다 화단에 있는 약초가 훨씬 귀하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본 것이다.
“보라색 난초, 백년삼에 얼음 연꽃까지…?”
그녀는 홀린 듯 화단에 심어진 식물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감탄을 금치 못 했다.
바로 그 때, 화단 중앙에 있는 기묘한 약초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신선초!”
기묘한 약초의 하얀색 줄기는 투명한 막으로 감싸져 있었고, 빨간 꽃송이는 마치 살아있는 불꽃처럼 새빨간 빛을 자랑하고 있었다. 게다가 은은한 안개가 식물의 주위를 떠다니고 있으니, 그 약초는 마치 이 세상의 물건이 아닌 듯 신비한 분위기로 둘러싸여 있었다.
준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신선초를 바라봤다. 신선초와 피의 연꽃 열매는 매우 희귀한 약초라, 1년 내내 찾아 헤매도 찾을 수 있을지 확신하기가 어려운 약초였다.
“너도 이 약초를 알아?”
이준이 흥분한 눈빛으로 신선초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자, 아라가 의아한 듯 물었다.
“응, 내가 찾던 물건이야!”
“너 정말 밉상이구나? 어떻게 한 눈에 제일 귀한 걸 골라내지?”
아라는 팔짱을 끼며 못 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선초는 이 화단에 있는 약초 중에서도 가장 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신선초를 손에 넣어야 했다. 불개를 진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피의 결정이 필요했고, 신선초는 피의 결정의 제조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재료였다.
소년이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자, 아라는 불안한 듯 방어 자세를 취했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신선초는 내가 가지는 걸로 하고, 나머지 약초 중 7할을 네가 가져. 어때?”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아라에게 더 이득이 되는 거래였다. 아라는 혹시라도 준이 거래조건을 바꿀까 싶어 즉시 머리를 끄덕였다.
준은 저장반지 속에서 가장 정교하게 만들어진 옥병 몇 개와 삽을 꺼내 조심스레 신선초를 파서 옥병 속에 집어넣었다.
“후우…”
신선초를 다시 저장반지 속에 집어넣고 나서야, 준은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손에 든 삽을 아라에게 건넸다.
아라는 이마를 찌푸리며 삽을 받아들었다. 낮에 소년에게 자신이 절벽에 내려갔던 것을 들키지만 않았더라도 수십만 골드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이 진귀한 약초들은, 모두 자신의 소유가 될 수 있었다. 그녀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삽을 받아 진귀한 약초들을 모두 파내, 자신의 옥병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신선초를 손에 넣은 준은 눈길을 돌려 방안을 다시 훑어보다가, 의자 앞에 놓여있는 바위로 걸어가 돌로 된 상자를 살펴봤다. 상자를 봉인해둔 자물쇠에는 마치 방금 전까지도 사람의 손길이 머물렀던 듯 온기가 남아있었다.
‘신기하군…분명 평범한 금속으로 만든 건 아니야. 힘으로는 안 되겠는 걸…?’
준은 다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해골의 손가락에 걸린 세 개의 검은색 열쇠를 발견하고는, 입맛을 다시며 해골에 다가가 열쇠를 잡아당겼다.
후둑.
그러나 오랜 세월에 의해 극도로 약해진 해골의 팔은 약간의 힘조차 이기지 못 하고, 부러져 버리고 말았다.
‘으으…죄송합니다 선배님!’
죽은 사람이니 큰 의미는 없지만, 준은 왠지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머리를 숙여 시체에게 사과를 한 뒤, 바닥에 떨어진 팔을 제대로 올려두려고 팔 뼈를 땅에서 주워들었다.
“어?”
그의 손에 들린 뼈는 기묘할 정도로 묵직했다. 준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즉시 손에 든 뼈다귀를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그러자 뼈에 작은 구멍이 나있고, 그 속에 낡은 두루마리 하나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소년은 열심히 약초를 캐내고 있는 아라를 흘깃 훔쳐보고, 잽싸게 그 두루마리를 빼내 자신의 저장반지 안에 집어넣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자신의 이상한 행동을 눈치채지 못 한 듯 했다.
이준은 속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세 개의 상자를 향해 걸어갔다.
* * *
열쇠를 들고 함 앞에 선 이준은 다시 한 번 온기가 느껴지는 금속 자물쇠를 어루만지다가 아라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빨리 와. 혼자 열었다고 또 삐지지 말고.”
“그래도 양심은 있네.”
아라는 약초를 담은 10여 개의 약병을 가슴에 안고 걸어와, 그 중에 몇 개를 준에게 건네주며 아쉬운 듯 눈을 내리깔았다.
“자, 이건 네 거야.”
준은 잽싸게 약병을 저장반지 안에 집어넣은 뒤, 아라의 눈앞에다 열쇠를 흔들어보였다.
“그럼 이제 열어도 되지?”
“열어.”
준은 세 개의 열쇠 중 하나를 골라 첫 번째 상자의 자물쇠에 집어 넣어보았지만, 그 열쇠는 자물쇠 안으로 반쯤 들어가다가 막혀버렸다. 두 번째 열쇠도 마찬가지였다.
“아니야.”
마지막 열쇠를 밀어 넣자 드디어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열렸어!”
“빨리 열어 봐.”
아라는 흥분으로 눈을 반짝이며 당장이라도 상자를 열 기세였다. 그러나 준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고 조용히 뒤로 몇 발짝 물러선 뒤, 손바닥을 오므렸다. 그러자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상자의 뚜껑이 둘을 향해 날아오다 바닥에 떨어졌다.
준은 뚜껑이 열리고 나서도 1분 정도를 가만히 떨어져 지켜보다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그제서야 상자에 다가갔다.
아라는 소년의 이런 조심성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넌 천둥산에 버려놔도 밖에서 보다 훨씬 잘 살겠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사내 녀석이 참.”
아라는 이준을 흘겨보며 앞으로 걸어와,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상자 안에는 알록달록한 무늬의 낡은 두루마리가 들어있었다. 아라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를 한 눈에 알아봤는지 잽싸게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준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이게 뭐야?”
“독약 제조법이 들어있는 독경…”
“독경?”
준은 아라의 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두루마리의 옆에는 ‘칠색독경’ 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칠색독경? 독약을 만드는 방법을 쓴 책이 진짜 있긴 있구나. 그럼 이걸 남긴 사람도 의술사인 거야?”
투기대륙에서는 의술사와 독술사만이 독을 다뤘다. 하지만 독술사 역시 의술사와 마찬가지로 연금술사보다는 지위가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