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산굴
아라는 자리에 쓰러진 이준을 바라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사람이 말을 하면 들어야지…지나친 호기심은 몸을 해친다는 걸 아직 모르는 꼬마네.”
그녀는 가슴에서 굵은 밧줄을 꺼내더니, 준에게 다가와 그를 꽁꽁 묶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른이 말을 하면 들으라구…머리에 피도 안 마른게 겁도 없이.”
그 때, 기절한 줄 알았던 소년이 벌떡 일어나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뭐…뭐야!”
아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소년의 사타구니를 향해 발길을 날렸다. 그러나 소년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가볍게 손으로 그녀의 발길질을 막아내며, 오른 다리를 뻗어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를 걷어찼다.
“억…!”
강렬한 통증이 다리를 덮치자 아라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뱉었었다. 하지만 소년은 멈추지 않고 그대로 왼다리를 뻗어 아라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뒤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비키지 못해?”
“못하겠다면?”
하지만 아라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발버둥을 칠수록, 준은 더욱 세게 그녀를 억누를 뿐 이었다.
“이거 놔!”
“왜 나를 공격했지?”
“이거 놔! 이거 놓으라니까!”
“못 놓겠다면?”
준은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그녀를 노려봤다. 그녀가 자신을 공격한 것은 낭떠러지 아래에 있는 무언가 때문임이 틀림없었다.
“벼랑 아래에 뭐가 있는거지?”
“도…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이게 무슨 짓이야! 네가 나에게 이딴 짓을 한 걸, 용병들이 알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아?”
아라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 하고 말을 돌리자, 준은 그 벼랑 아래에 중요한 것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디 한 번 소리 질러 보시든가. 저 절벽 아래에 무슨 비밀이 있는지 모두에게 알리고 싶다면 말이야. 굳이 네가 말해주지 않아도 너를 묶어서 숨겨두고, 나 혼자 내려가면 그만이야.”
“너……”
“하지만 내가 너를 묶어두고 내려가면, 그 사이 마수들이 너를 먹어 치우겠지? 여긴 천둥산이, 혼자 일행과 떨어진 여자 하나가 마수에게 잡아먹히는 일 따위는 매일 같이 일어나지.”
협박이 제대로 먹혀 들었는지,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 이마를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나를 일으켜 세워! 아래에 뭐가 있는지 알려줄 테니까!”
준은 만일에 대비해 그녀의 손목을 꽉 움켜쥔 채 아라를 잡아 일으켰다.
“저 절벽 구석에는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산굴이 있어…나도 아직 들어가 보지는 못 하고 주위만 살폈지만…주위에 남겨진 흔적만 보아도 저 동굴은 대단한 실력의 강자가 머물렀던 흔적이 있어.”
“산굴? 그럼 방금 저기 들어가려고 한 거였어?”
아라는 준의 질문에 알아봤자 소용없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하지만 절벽이 너무 가팔라. 보통 실력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어.”
“그래?”
소년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듯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확실히 아래로 갈수록 경사가 심해져 보통 실력으로는 들어갈 수 없을 듯 했다.
“그만해. 이미 채집단에서 벗어난지 시간이 한참 지났어. 돌아가지 않으면 강재가 의심할걸? 어차피 천둥산에서 하룻밤을 머물러야 하니까, 저녁에 오는게 나을거야.”
그녀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준은 나무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동굴을 다시 한 번 확인하며 입을 열었다.
“강재? 그 늑대머리 용병단의 제2단장인가 뭔가 하는…?”
“그래.”
그녀는 불쾌한 듯 굳은 얼굴로 고개를 까딱하고는 다시 말을 돌렸다.
“넌 이름이 뭔데?”
“이준.”
“어떻게 할거야? 굳이 확인하겠다면 말리지는 않을게. 하지만 너도 누군가가 저 동굴에 대해 눈치 채기를 바라지는 않겠지?”
이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채집단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자, 강재가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지금 막 사람을 보내려던 참이었어요.”
아라의 말대로 강재는 그 잠깐 새를 못 참고, 사람을 풀어 그녀를 찾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다정한 표정으로 아라를 향해 걸어오다, 그녀의 뒤에서 낯선 사내가 따라 나오자, 잠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다정한 말투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이 형제는 누구지요?”
“용병 중 한 사람이에요. 방금 오는 길에 만났어요.”
아라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얼버무리며 걸음을 옮겨, 만약상회의 약초 채집꾼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강재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준에게 걸어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
“잠깐.”
준은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에 울컥하고 짜증이 치밀어 올라, 굳은 표정으로 강재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시죠?”
하지만 강재의 말투는 상당히 정중했다.
“하하, 악의는 없습니다. 이번 용병단 중 마지막에 합류한 젊은 2성투사 맞죠? 부하들 사이에서 칭찬이 자자하더군요. 아주 뛰어난 분이시라고…”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우리 늑대머리 용병단에 가입 할 생각 없어요? 우리 용병단은 당신처럼 자질이 훌륭한 단원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중한 말투와 달리 가온이나 기태와 닮은 그 사내의 눈빛을 보고,준은 이 자와 말을 섞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는 혼자서 다니는 게, 몸에 밴 사람인지라.”
“하하, 괜찮아요. 언제든지 생각이 바뀌면 저를 찾아오세요.”
“그럼 이만.”
소년은 자신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자리로 돌아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가소로운 자식…”
* * *
약초 채집단은 결국 해가 어두워 질 무렵이 돼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가운데가 오목하게 들어간 분지로, 그 안에서는 다양한 약초가 자라고 있었다. 약초의 효험 때문인지 분지 주위는 다른 곳에 비해 확연히 공기가 좋았다.
“모두들 여기에 자리를 잡도록 하세요. 주위의 약초들을 짓밟으면 안돼요.”
아라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다정하게 말을 건네자, 용병들은 신이 나서 큰 소리로 대답한 뒤 열심히 야영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준은 다른 사람들이 야영지를 만드는 동안 보초를 서며, 분지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러나 아무리 유심히 살펴도 자신이 원하는 약초는 이 곳에 없었다.
* * *
날이 완전히 어두워질 무렵이 되자 멋드러진 야영지가 완성됐다. 어느새 분지의 중앙에는 커다란 천막 몇 개가 세워지고, 용병들은 저녁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준은 여기저기 기웃 거리다가 중앙에 있는 몇 개의 천막 중 하나에 들어가 보았다. 준이 들어간 천막의 중앙에서는 아라와 강재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준은 두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가볍게 목례를 하고, 몸을 돌려 다른 천막으로 들어갔다. 강재는 그런 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웃으며 아라에게 말을 걸었다.
“저 친구는 아주 재능이 넘치더군요. 앞으로 큰 인물이 되겠어요.”
그러나 아라는 알 듯 모를 듯 애매한 태도로 ‘글쎄요.’ 라고 말한 뒤 약재를 점검해야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 중앙에 있는 가장 큰 천막으로 들어갔다.
강재는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주먹을 쥐며 기묘한 웃음을 지었다.
* * *
어둠이 깊어지고, 야영지의 모닥불이 타오르자 그림자들이 춤을 췄다. 밤이 깊어질수록 야영지에서는 장작이 타며 울리는 ‘타닥타닥’ 하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잠든 깊은 시각…두 개의 천막에서 그림자가 나와 산다람쥐처럼 잽싸게 수풀 속으로 뛰쳐들어갔다.
* * *
결국 두 남녀는 낮에 실랑이를 벌였던 그 장소로 돌아오는데 성공했다.
둘은 조심스럽게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횃불 두 개를 만들고는, 한 치 앞도분간할 수 없는 낭떠러지를 향해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아라는 가슴속에서 긴 밧줄을 하나 꺼내며 준에게 건네주었다.
“듬직한 사내가 있는데 내가 앞장 설 일은 없겠지?”
하지만 준은 그녀의 말을 들은척도 하지 않은 채, 한손에 횃불을 들고 다른 한손으로 밧줄을 잡아당겨 줄이 튼튼한지를 확인했다.
“같이 내려가야지. 언제 봤다고 너한테 목숨을 맡겨.”
“너…사내 녀석이 너무 치사한 거 아니야?”
아라는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크게 치켜뜨며 준을 노려봤다. 대부분의 용병들은 그녀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이 사내는 사사건건 만만하지가 않았다.
“사내라고 목숨이 두 갠가?”
“너……!”
“내려 갈 거야? 말 거야?”
“가!”
준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음을 지은 뒤 밧줄을 큰 나무에 묶고 나서 다시 한 번 밧줄을 잡아당겨 보았다.
“이제 내려가지?”
그러나 아라는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밧줄 하나를 꺼내들었다.
“나도 밧줄 있어. 네 도움 필요 없거든?”
“그래? 그럼 따로 가던지. 그 대신 독사나 마수가 튀어나와도 알아서 해결해. 난 잘 알지도 못 하는 여자를 위해서, 절벽에서 밧줄 사이를 건너 뛸 만큼 머리가 나쁘지 않거든.”
“나쁜 자식…너 벌 받을 거야!”
그녀는 분한 목소리로 준에게 밧줄을 집어던진 뒤 그에게 다가왔다.
준은 왼팔로 그녀를 단단히 감싼 뒤, 오른 손으로 밧줄을 잡고 천천히 절벽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이준은 조심조심 절벽을 내려가며 아라에게 산굴의 위치를 물었다.
“어때, 좀 보여?”
아라는 한참 동안이나 아래를 유심히 들여다 보더니, 손가락으로 조금 오른쪽을 가리켰다.
“아마 저 쪽인 것 같아.”
“꽉 잡아.”
준은 신중하게 몸을 움직여 오른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이동한 뒤, 아까 그녀가 가리켰던 곳을 가리켰다.
“횃불을 던져!”
발 아래 펼쳐진 아찔한 광경에 아라는 손을 덜덜 떨며 소년이 가리킨 방향을 향해 횃불을 힘껏 던졌다. 횃불이 산 벽에 부딪히자, 불꽃이 튀며 희미하게 산굴이 보이는 순간,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재빠르게 발끝으로 산 벽을 힘껏 차 뒤로 날아갔다.
쉬이익!
준이 뒤로 몸을 날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섬칫한 소리와 함께 정체불명의 물체가 방금 전까지 그들이 있던 곳을 스쳐지나갔다.
“젠장, 왜 이런 곳에 암사가!”
소년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자 아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암사는 뱀 모양의 1레벨 마수로, 납작하고 긴 체형을 이용해 날다람쥐처럼 활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생물이었다. 더욱 골치 아픈 것은 이름 그대로 몸이 돌처럼 단단해 일반적인 검으로는 상처조차 입힐 수 없는 마수라는 점이었다.
“암사라고? 그럼 어떡해?”
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절벽 위에 똬리를 틀고 다시 한 번 그들을 덮칠 준비를 하는 암사를 바라봤다.
“나한테 뿌렸던 그 약, 지금 가지고 있어?”
아라는 잽싸게 고개를 끄덕인 뒤 가슴속에서 하얀 가루가 담긴 공을 꺼내 이준에게 건네줬다.
“마지막 하나야. 아껴 써야 돼.”
소년이 아라에게 하얀 가루가 담긴 공을 건네받자, 암사가 기다렸다는 듯 새빨간 혀를 날름거리며 몸을 날렸다. 그러나 준은 암사가 날아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빨리 공격해, 이 바보야!”
결국 짙은 어둠속에서도 뚜렷이 대상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까지 마수가 날아오자, 아라는 다급한 마음에 이준의 등을 때리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야, 우리 죽어! 죽는다고!”
준은 그제야 손바닥을 펼쳐 손에 쥔 공을 화살처럼 쏘아냈다. 하얀 가루가 담긴 공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암사의 이마에 적중하자, 마수는 하얀색 가루에 뒤덮인 채 허공에서 발버둥 치다가 온 몸이 굳어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