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화. 피의 연꽃 열매
소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태초의 힘 : 근접 공격 무투기, 공격력 매우 강함. 무투기를 완성하면 공격에 여덟 배의 힘이 실림. 완성했을 때의 위력은 2격 단계 하 수준의 무투기와 비슷한 공격력을 갖게 됨…이었지 아마?’
“여덟 배의 힘…인건가요?”
준의 대답에 약로는 지긋이 웃음을 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그런데 말이야. 그 여덟 배의 힘이라는 것이 수련을 쌓으면서 천천히 쌓여가야 하는데, 너는 지금 얼마나 강해진 것 같으냐? 태초의 힘을 사용하면서 한 번이라도 그 속에 감춰진 힘을 느낀 적이 있느냐?”
“숨겨진 힘…… 이요?”
“그래, 네가 그 숨겨진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면 가온 따위는 상대가 될 수 없었겠지.”
숨겨진 힘이라는 말에 준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그 숨겨진 힘은 어떻게 하면 수련 할 수 있는 건가요?”
“네 무투기에는 힘만 있지 기교가 부족하다. 태초의 힘의 진정한 위력을 끌어내려면 힘만으로는 부족해.”
스승의 의미심장한 말에 준은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그런 중요한 것을 왜 말해주지 않았단 말인가.
“아니 스승님…그런 좋은 게 있으면, 빨리 말씀을 해주셔야지 왜 이제…”
약로는 또 다시 준의 말을 끊으며 설명을 이어갔다.
“이놈아, 말해준다고 될 일이란 말이냐. 그 때는 말해줘도 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매번 내가 모든 것을 가르쳐주면 너는 언제쯤 홀로 설 수 있겠느냐? 진정한 강자가 되려면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아니 그래도…스승님…”
“어허, 눈 감고! 집중!”
준은 또 다시 따지고 들려다 스승의 호통 소리에 한숨을 내쉰 뒤, 다리를 꼬고 앉아 눈을 감았다.
* * *
준은 한참 동안 조용히 명상에 잠겼다가 약로의 말들을 떠올리며 손을 들었다. 그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염력을 끌어 모으자 주먹이 향한 자리가 누르스름하게 타들어가며 나무 둥치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직…우지직…
소년이 계속해서 염력을 운용하자 그가 만들어낸 균열을 따라 계속해서 힘이 전달되며, 나무의 점점 깊은 곳 까지 균열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우지직!
준은 계속해서 균열을 따라 염력을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나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염력이 전달된 순간, 그는 전력을 다해 염력을 폭발시켰다.
쾅!
그러자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나무가 뒤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굵직한 나무 기둥이 안에서부터 폭발한 듯 기묘한 형상으로 부러져 나갔다.
“이럴수가!”
준은 자신의 무투기가 가지고 있던 진정한 힘에 자기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고 말았다. 물론 아직까지는 능숙하게 사용할 수 없었고, 소모되는 염력도 만만치 않아 하루에 두 번 이상은 사용할 수 없을 듯 했지만, 그 위력은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이거야말로 태초의 힘의 진정한 위력이었군요!”
소년이 눈을 반짝이며 스승을 올려다보자, 스승은 흐뭇하게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처음치고는 꽤 훌륭했지만 아직 진정한 위력을 끌어냈다고 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다. 숨은 힘이 폭발하기까지 너무 오래 걸려. 능숙한 투사라면 그 힘이 폭발하기 전에 막아버리고 말게다. 게다가 지금 네 힘으로는 하루에 두 번이면 끝이겠지. 뿐이더냐, 실전 중에 태초의 힘을 사용하는 것 외에 전혀 염력을 사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실전 레벨에서 사용할 수 있는건 한 번이 한계일게다. 결국 얼마나 적재적소에 필살의 일격을 꽂아 넣을 수 있느냐가 승부를 가르겠지.”
준은 스승의 정확한 지적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제 염력의 양을 늘려야 한다. 우선 천둥산에 도착하면 연금비약을 정제하기 위한 약초를 찾는 일부터 시작하자꾸나. 연금비약의 도움이 없다면 결국 염력을 쌓는 속도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연금비약이라는 말에 준은 잠시 무언가가 떠오른 듯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음…나설아도 당연히 연금비약의 도움을 받겠죠?”
“그렇겠지. 하지만 상관없다. 가한제국의 멍청이들은 고하가 대단한 연금술사라고 여겨 ‘단왕’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만, 내 눈에 그 놈은 이제 막 애송이 티를 벗은 초짜에 불과해.”
스승은 이번에도 ‘단왕’ 이라 불리우는 가한 제국 최고의 연금술사 고하를 여지없이 까내렸다. 하지만 준은 이미 여러 차례 약로의 실력을 확인했기 때문에, 그의 이런 호언장담이 허풍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자나 깨나 이 물건을 메고 다녀라. 잠이 드는 순간에도 이 물건을 몸에서 떼지 말아야 한다.”
쿵…
약로의 말이 끝나게 무섭게 준의 검의 형상을 한 시커먼 철기둥 같은 것이 반지에서 나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철기둥이 떨어진 자리에는 검의 크기와 어울리지 않게 바위라도 떨어진 듯 깊은 구멍이 생겨 있었다. 준은 그 물건을 짊어질 것을 생각하자 자기도 모르게 식은 땀이 흘렀다.
“이건 무슨 물건이에요?”
“이것은 투기대륙 전체에서도 몇 없는 귀한 금속을 천지의 불꽃으로 제련해 만들어낸 수련용 검이다. 가한제국에서는 절대로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지. 이 물건은 아주 단단하고 무거울 뿐 아니라, 염력을 억누르는 효과를 가지고 있지.”
약로의 설명에 준은 두 눈이 휘둥그레져 철기둥을 바라보았다.
“염력을 눌러준다고요?”
“그래, 네가 이 물건에 완전히 적응하는 순간, 너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있을 게다. 그리고 그 때 비로소 너는 2격의 무투기를 익힐 자격이 있는 투사가 되는게지.”
2격 무투기라는 말에 준은 다시 한 번 눈을 빛냈다.
* * *
작열하는 태양에 대지조차 그 거대한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긴채 신음하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와 거리는 마치 거대한 찜솥 같았다. 거리 위의 행인들은 쉴 새 없이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욕을 할 기운조차도 없을 정도의 끔찍한 폭염이었다.
“스승님, 너무 무거워요. 게다가 이걸 짊어지면 몸 속의 염력 흐름까지 느려지니, 하루면 갈 수 있는 거리를 이틀 동안 꼬박 걸어도 도착하질 못 한다구요.”
숨을 헐떡거리며 말을 하는 준의 온 몸은 땀으로 젖어, 마치 강물에라도 빠졌다가 나온 듯한 꼬락서니였다.
“어허…이제 막 수행을 시작했는데, 벌써 우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준은 약로의 잔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저장반지를 만지작 거렸다.
“하… 더 이상은 안 되겠어요. 연금비약의 힘을 빌려야겠어요.”
녹색 저장반지가 반짝거리자, 그 속에서 푸른색 기력의 조각 하나가 영롱한 빛을 뿜으며 그 자태를 드러냈다. 준은 조심스레 주위를 살핀 후, 연금비약을 집어삼킨 뒤 나무에 기대, 약효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연금비약의 약효가 온 몸 곳곳으로 스며들어, 전신에서 힘이 샘솟는 듯 했다.
수행을 시작한지 이틀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준은 자신의 등에 짊어진 무지막지한 검을 벗어던지면 6성 투사라도 이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휴…확실히 효과는 있으니까…’
불과 이틀 만에 준은 자신의 육체와 염력이 놀라운 속도로 진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힘들어도 이 원수 같은 정체불명의 쇳덩이를 내려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내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해가 뉘엿뉘엿 지고, 달이 얼굴을 드러낼 무렵, 준은 마침내 천둥산의 입구에 위치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천둥산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의 이름은 청산마을이었지만, 사람들은 종종 이 마을을 용병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실제로 청산마을에는 마을의 주민들보다 용병이 더 많을 정도였다.
준은 마을에 들어서자마자 약재 점포를 찾아 거리를 돌아다녔다. 마을 안에 늘어선 크고 작은 건물들에는, 하나 둘 등불이 들어오고 있었고, 준은 그 중에서 가장 크고 좋아 보이는 약재상을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니 가게 안에는 제법 손님이 많았고, 점원들도 손님을 받느라 정신이 없어보였다.
소년은 조용히 혼자 투명한 유리 선반에 놓인 약재들을 천천히 훑어보다가 작은 옥병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처치유약? 이런 곳에도 연금술사가 있나…?”
그는 가게 안에 늘어선 다양한 약재와 약병을 구경하다가 실망한 듯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자신이 찾는 귀중한 약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가야하나…’
살만한 것을 찾지 못 해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문을 나서려던 준은, 가게 가장 구석진 곳의 선반에 들어 있는 노란색 물체를 발견하고는 즉시 점원을 불렀다.
“저 물건을 좀 꺼내볼 수 있을까요?”
점원은 준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귀찮은 표정으로 물건을 꺼내들었다.
“황금 연꽃 열매, 낮은 레벨의 약재입니다. 가격은 천 골드입니다.”
점원은 말을 마치고 다시 한 번 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마도 준의 행색으로 보아 그만한 돈이 없을 것 이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소년은 점원의 태도를 무시하고, 흥분한 눈빛으로 노란색 열매의 표면을 살짝 긁어보았다. 그러자 열매의 표면에 핏방울 같은 붉은 액체가 미묘하게 배어나왔다.
준은 그 붉은 액체를 보자마자 마른 침을 삼키며, 액체를 손가락 끝에 묻혀 냄새를 맡아보았다.
‘역시, 이건 황금 연꽃 열매가 아니라 피의 연꽃 열매야!’
“녀석…보는 눈이 제법이구나.”
약로는 반지 안에서 준의 눈썰미를 칭찬했다.
준의 염력 수련법인 ‘불개’가 진화하려면 반드시 천지의 불꽃을 삼켜야 한다. 하지만 천지의 불꽃은 사람은 물론이고 금속조차 녹일 정도의 열을 가지고 있기에, 불꽃을 흡수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매우 많았다.
그리고 천지의 불꽃을 흡수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피의 결정이었고, 피의 결정을 정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의 연꽃 열매가 필요했다.
“실례지만 황금 연꽃 열매가 더 있나요? 조금 더 필요해서요.”
점원은 소년이 황금 연꽃 열매가 더 있냐고 묻자, 갑자기 친절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그러죠.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신이 난 점원은 다급히 가게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들고 왔다.
“지금 저희 점포에 총 53개의 황금 연꽃 열매가 있는데, 전부 구입하시겠습니까?”
준은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그가 들고 온 상자를 들여다보았다. 아쉽게도 그가 들고 온 상자 속에는 피의 연꽃 열매가 보이지 않았다.
소년은 아쉬운 표정으로 나무 상자에서 대충 황금 연꽃 열매 20여개를 집어든 뒤, 자신의 손에 있던 피의 연꽃 열매를 끼워 넣었다.
“포장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손님, 총 2만 3천 골드입니다.”
준은 골드를 점원에게 건네며, 황금 연꽃 열매에 대해 물었다.
“가게의 약재들은 모두 천둥산에서 얻어 온 건가요?”
“네, 여기 천둥산은 약재가 매우 풍부합니다. 우리 만약상회에는 전문 약재 채집단이 있습죠. 하지만 천둥산맥은 워낙 위험한 곳이니, 약재를 캐러갈 때 마다 용병단을 고용해야 합니다.”
소년은 점원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인 뒤 몸을 돌려 가게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어느새 약재상 입구에는 무언가 구경거리라도 있는 듯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어 도저히 나갈 수 상태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