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운남종
……
1~2분이나 지났을까, 몇 번인가 투닥거리는 소리가 들리다가 천막 안이 잠잠해졌다.
‘벌써 끝났나…역시 저 녀석은 대단하군. 아무리 그래도 상대도 6성 투사인데 말이야.’
기태는 속으로 준식의 실력에 감탄하며 천막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어…?”
그러나 천막을 열어 제치고 나온 것은 준식이 아니라 이은이었다.
그녀는 얼음장 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그를 한 번 훑더니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녀의 옷에는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았다.
‘뭐야…이렇게 쉽게 이겼다고? 같은 6성 투사를?’
기태는 놀란 표정으로 이은을 바라보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에 있는 것은 단순한 분노나 적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명백한 살의였고, 그 살의가 향한 대상은 자신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선배님…저는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을 아주 싫어해요.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물론이고 때리는 것조차도 별로 좋아하지 않죠.”
소녀의 아름다운 입술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새어나오자 기태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녀의 눈조차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저는 누가 준 오라버니에 대해 나쁘게 얘기하는 걸 가장 싫어해요. 지금 확실히 말해둘게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준 오라버니에 대한 험담이고, 뒤에서 누군가가 오라버니에 대해 험담을 하면…제가 싫어하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어요. 부디 제가 싫어하는 일을 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저도 제가 싫어하는 일을 할 일이 없을 거에요.”
기태가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공포감에 젖어 있는 사이, 그의 눈에 등을 돌려 걸어가는 소녀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
기태는 잠시 멍하니 이은을 바라보다가 급히 천막 안으로 달려갔다.
천막 안에는 새우처럼 몸을 구부리고 기절한 준식이 처참한 모습으로 널부러져 있었다.
잘생긴 그의 얼굴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퍼렇게 멍이 들어있었고, 바닥에는 새빨간 핏자국과 함께 새하얀 11개의 치아가 나뒹굴고 있었다.
* * *
구름으로 뒤덮여 신선이라도 살 듯한 아득한 산마루를 지나 고고하게 우뚝 선 산의 정상. 그 정상의 끝자락에 자리한 검은 바위 위에는 눈처럼 새하얀 치마를 입은 여인이 눈을 감고 수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나설아 스승님. 어르신께서 운남종에 오셨습니다.”
시녀 하나가 여인이 눈을 뜰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다가 공손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무슨 일로?”
나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산 아래를 지긋이 둘러보고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 * *
“아버지, 오셨어요? 오실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지…”
“흥, 지금 네가 이 아비가 온다고 반기기나 한단 말이냐? 나는 네가 진율희의 제자가 되고 나서, 진씨로 성을 바꾼 줄 알았다.”
사내는 딸의 얼굴을 보자마자 씩씩거리며 화를 냈다.
“아버지, 1년 만에 만난 딸에게 꼭 이래야 겠어요?”
나설아가 서운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조금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 더욱 매섭게 쏘아붙일 뿐 이었다.
“뭐? 집? 집에 가? 감히 집에 돌아갈 수나 있겠어?”
“왜요? 집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되묻는 딸을 보자 아버지는 분통이 터졌다.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아버지의 반응을 보자 그녀는 짐작가는 것이 있는 듯, 눈을 피하며 대답을 피했다.
“설마…”
“그래, 할아버지가 가문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을 네 멋대로 깨놓고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지금 할아버지가 네 낯짝을 보면 어떻게 하실 것 같으냐?”
그러나 나설아는 별 일 아니라는 듯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자신의 아버지 나원철을 바라봤다.
“아버지 진정 하세요.”
“진정? 지금 나더러 진정하라고?”
그는 딸의 뻔뻔한 반응에 화를 주체하지 못 하고, 바닥을 내리치며 고함을 쳤다.
“가문의 가장 큰 어르신인 할아버지께서 친히 약속하신 것을 어른들과 한마디 상의 없이 깨뜨리고 진정?”
자신의 말을 완전히 무시하고 화만 내는 아버지의 태도에 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화를 냈다.
“그건 할아버지 결혼이 아니라 제 결혼이에요!”
그러나 그녀의 반발은 아버지를 더욱 화나게 만들 뿐 이었다.
“이게…어디서 말대답을 하는 게냐! 내가 네 속을 모를 줄 알고? 이준이라는 아이가 실력이 떨어지니 제 멋대로 군 것 아니냐? 이제 어쩔게냐! 너도 그 아이가 어떻게 변했는지 들었겠지?”
나설아 역시 이준의 소식을 알고 있었는지, 이 대목에서는 나원철의 시선을 피하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도 알아요. 하지만 그렇게 변할 줄은 몰랐네요. 저도 좀 신기했어요.”
“신기해? 할아버지께서 어찌나 노발대발 하셨는 줄 아느냐? 할아버지의 명이다. 당장 은빛성으로 찾아가 그에게 사과하고 파혼을 취소해!”
“사과? 사과요? 내가 왜 사과를 해요!”
파혼을 취소하고 사과하라는 말에, 나설아는 다시 발끈해 화를 내기 시작했다.
“네가 일을 벌였으니 네가 수습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
“안가요!”
“나설아!”
“흥! 그 이준이라는 녀석이 제 입으로 3년 후에 찾아온다고 했으니, 그 날 대결을 해보면 될 것 아니에요!”
나원철의 호통에 그녀는 꼬리를 밟힌 고양이마냥 앙칼지게 받아치며 악을 썼다. 최근 사람들이 자신과 이준을 비교하는 통에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예민해져 있던터라, 아버지의 말을 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떨궈도 모자랄 판에 도리어 성을 내는 딸을 보자, 나원철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분노로 온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벌떡 일어나 솥뚜껑처럼 커다란 손을 치켜들며 나설아에게 다가섰다.
“형님! 진정하십시오!”
나원철이 방문했다는 소식에 황급히 달려온 도담이 이 장면을 보고 번개처럼 달려와 나원철의 앞을 막아섰다.
“도담, 너 지난번에 이씨 가문을 방문할 때 네가 설아를 데리고 갔다며!”
도담은 차분한 태도로 흥분한 나원철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하, 형님 걱정 마십쇼. 그리고 설령 설아를 보내 사과를 한다 쳐도, 두 가문의 관계가 다시 회복 될지 아닐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3년 뒤의 약속은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게 또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려고!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해? 설아를 말리지는 못 할 망정!”
“고하 선생이 최근 설아를 위해 준비한 약 조합표의 마지막 약재를 찾아 친히 떠나셨단 말입니다. 그 연금비약은 위대한 선조들이 남긴 귀한 것입니다. 고하 장로님께서 그 연금비약을 정제해내기만 하면, 그 이준이라는 아이는 절대 설아의 수련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거예요.”
“약 조합표?”
“아직 자세한 것은 말씀 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이 조합표는 고하 장로께서 작년에 우연히 산 속에서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고하 장로가 보증한 연금비약입니다. 설아는 본래 재능이 뛰어난 아이입니다. 거기에 고하 장로가 제조한 연금비약을 사용해 수련할 텐데, 뭐가 그리 걱정이십니까 형님?”
나원철은 한숨을 내쉬며 도담을 바라보다가, 나설아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그럼 네 멋대로 하거라. 그러다가 패하기라도 하면 우리 가문에서는 더 이상 너를 나씨 가문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을 테니.”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씩씩거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도담은 성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원철의 뒷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고 난 뒤에야 한숨을 내쉬며 나설아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이 일을 어쩔게냐?”
“흥, 어쩌긴 뭘 어째요? 어차피 제가 이기면 되는거 아닌가요?”
나설아는 그런 일 따위는 개의치 않는다는 듯 당당한 태도였지만, 도담이 기억하고 있는 이준은 절대 만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설아야. 진짜 그 아이와 붙어서 이길 자신이 있는게냐?
“아저씨, 아저씨도 저를 못 믿으세요? 제 유일한 걱정은 그놈이 약속대로 운남종을 찾을 배짱도 없을 거라는 것뿐이에요.”
나설아는 도담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또 다시 세간의 불쾌한 소문이 떠올라, 울컥 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 * *
은은한 모닥불이 어슴푸레 어둠을 밝혀주는 깊은 숲 속, 한 소년이 나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장작으로 모닥불을 헤집고 있었다.
그는 장작 한 개비를 집어 불속에 던져 넣으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저희 대체 어디로 가는 거죠?”
“천둥산.”
약로의 짤막한 대답에 준은 의문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빛성 근처에도 천둥산으로 가는 길이 있잖아요. 왜 굳이 이렇게 돌아가는 거에요?”
스승의 대답에 제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천둥산의 동쪽이다. 여기로 가로 질러 가면 타르사막이 나오지, 그곳이 우리의 최종목적지다.”
“천둥산을…가로질러요?”
약로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지만, 준은 걱정이 되는 듯 안색이 어두워졌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허허”
“지금 제 실력으로는 아직 어린 1레벨 마수(魔獸) 정도도 간신히 상대할 수 있어요. 외곽을 지나는 것도 위험하다구요…”
그러나 스승은 결정을 무를 생각이 없어보였다.
“진정한 투사가 되기 위해서는 목숨을 건 싸움을 해봐야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소년은 천둥산의 무시무시한 마수들을 떠올리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하아…”
“한숨 쉬지 말거라. 나는 천둥산맥에서 널 무투사 수준까지 끌어올려 볼 생각이니.”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였다. 천둥산에서 1년이라니…준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스승에게 수련 계획을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그럼 1년 내내 천둥산에서 수련을 하게 되는 건가요?”
“아니, 천둥산에서 수련을 마치면 타르사막으로 간다.”
“타르사막……?”
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하긴 정말 목숨이 위험해지면, 스승님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게다가 그 정도의 고난도 없이 어떻게 강해지겠어.’
소년은 스승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다른 문제로 이야기를 돌렸다.
“스승님, 그럼…약속하신 무투기는…”
“이 녀석 매일 조르는 게 귀찮지도 않느냐? 기다려라. 천둥산에 들어가면 바로 가르쳐주마. 이곳에서는 아직 보는 눈이 많다. 그리고 흡장이나 척력장은 몰라도, 태초의 힘은 아직 걸음마 단계이지 않느냐.”
자신의 무투기가 걸음마 수준이라는 말에, 준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네? 태초의 힘이요? 무슨 말씀이세요, 지난번에 가온 녀석 팔 부러뜨리는거 보셨잖아요. 게다가 제 입으로 말하기는 민망하지만…제법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다구요.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걸음마 수준이라니…”
그러나 약로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준의 말을 반박했다.
“이그…쯧쯧쯧, 겨우 3성 투사 놈 팔을 부러뜨려 놓고, 네 팔도 마비가 오지 않았더냐. 그 자식이 네 실력을 얕봤기에 망정이지…그놈이 제대로 대비를 했더라면 네 팔은 무사했겠느냐?”
약로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수긍했다.
“그렇긴 했죠…”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태초의 힘은 2격의 하 단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공격력을 가진 무투기다. 제대로만 쓸 수 있다면 자기보다 2~3레벨 이상 강한 상대도 거뜬히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졌지. 하지만 너는 비슷한 레벨인 상대에게 사용하고도 상처를 입을 뻔 했지 않느냐.”
이준은 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잘 생각해 보거라. 내가 너에게 태초의 힘을 전수해 줄 때, 네 머릿속에 어떤 정보가 흘러들어갔지?”
소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