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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업만이살길-52화 (52/818)

제52화. 새로운 출발

유가 경매장 응접실.

“이런 물건들이 왜 이렇게나 많이 필요한 건데?”

주희는 준이 내민 두루마리를 펼쳐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며칠 뒤 수련을 떠나요. 일단 한 번 떠나면 1년은 돌아오지 않을거에요.”

“1년? 그렇게 오랫동안?”

그녀는 준이 요구한 물품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며 준과 대화를 나눴다.

“저도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 밖에 나가서 수련을 해야죠. 언제까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은빛성에 갇혀 있을 수도 없으니까요.”

주희는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맞아. 너 정도의 재능을 가진 아이가 이곳에 계속 처박혀 있는 건 시간 낭비지.”

투기대륙에서는 대부분의 수련자들이 성인식을 치르고 투사가 되고 나면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수행을 쌓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 준이 성을 떠나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주희는 두루마리를 모두 읽은 뒤 다리를 꼬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준을 바라보았다.

“그 신비한 분도 같이 가는 거야?”

“네. 그 분이 저의 스승님이세요.”

“역시…그럼 너도 이제 연금술사가 되는 건가? 아니면 이미?”

“이씨 가문의 상처 치유약, 그거 제가 정제한 거예요.”

이미 정체가 발간된 판에 굳이 주희를 속일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앞으로도 그녀의 도움을 받을 일이 많을 테니, 주희와는 조금 더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었다.

“흠, 그랬군. 곡니 아저씨가 ‘생명의 물약’을 보고 그 분이 정제한 것은 아닐 것 같다고 말하시더라구. 아저씨의 눈이 정확했네. 하지만 아직 그걸 네가 정제한 것 까지는 모르고 계셔. 어쨌든 조심하라는 차원에서 말해주는거야.”

주희의 충고는 일리가 있었다. 준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어나갔다.

“두루마리에 있는 물건들을 구해주시면 되요. 그리고 이번에는 꼭 돈을 받으세요. 이건 스승님의 뜻이기도 하구요. 앞으로도 가급적이면 공정하게 거래를 했으면 해요. 저는 필요한 걸 얻고, 누나는 돈을 벌고.”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가슴팍에서 골드카드를 꺼네 주희에게 건넸다. 카드 안에는 이씨 가문에서 상처 치유약을 팔고 남은 이윤의 절반인 40만 골드가 들어있었으니, 돈은 모자라지 않았다.

주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시녀를 불러 약재목록과 카드를 건넸다.

“제가 떠난 뒤에도 유씨 경매장에서 이씨 가문을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대신, 앞으로 누나가 도움이 필요하면 저도 꼭 도울게요.”

소년의 정중한 부탁에 주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럼, 누나 동생 하는 사이에 그 정도 의리는 지켜줘야지. 게다가 앞길이 창창한 연금술사에게 미리 잘 보여서 나쁠 것도 없고.”

주희의 시원스런 답변에 준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가 수련을 떠나며 역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아버지와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 문제도 한시름 덜었으니, 이제 정말 수련에 매진할 일만 남은 것이다.

“네가 다시 은빛성에 돌아왔을 때 어떤 놀라운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하고 있을게.”

준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를 표한 뒤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요. 그럼 이만 가볼게요. 아마 이제 1년간은 볼 수 없을 것 같네요.”

주희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준에게 다가가 다정한 표정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그녀의 말투에서는 왠지 모를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래, 몸 조심하고.”

준은 머리를 들어 눈앞에 선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본 뒤,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주희의 손을 꼭 붙잡았다.

“누나가 단지 수석 경매사가 아니라는거 알고 있어요. 그리고 누나야말로 몸 조심해요. 이 성에서는 온통 누나를 어떻게 하고 싶어 안달 난 남자들 천지잖아요.”

준의 말을 들은 주희는 잠시 머뭇거리며 얼굴을 붉히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준의 이마를 가볍게 손바닥으로 때렸다.

“이 녀석, 나한테 장난을 쳐? 너야말로 그런 생각 한 거 아니야?”

“아야! 아니에요!”

소년은 주희의 반격에 장난스런 미소를 지은 뒤, 마지막 인사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누나, 잘 지내요! 1년 뒤에 다시 봐요!”

주희는 시녀에게서 저장반지를 받아 경매장 밖으로 씩씩하게 걸어 나가는 준의 뒷모습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재미있는 녀석이야. 그래, 기대하고 있을게. 1년 뒤에 얼마나 날 놀래켜줄지 보자고.”

* * *

준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준아, 시간이 되면 가마제국 변두리에 있는 모래바람성에 들려 보거라. 그 지역에서 네 큰 형과 둘째 형이 ‘사막의 칼날’ 이라는 용병단을 만들었는데, 그 지역에서는 꽤나 이름을 날리고 있다고 하더구나.”

형들은 자신보다 먼저 성을 떠나 투사로서 제법 실력을 쌓은 상태였다. 준은 오랜만에 형들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준이 한참 앞으로의 일과 형들에 대해 생각하며 골목을 도는 순간, 낯익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천재 소년!”

“스승님? 원생 모집 현장에 안 가셨어요?”

본래 여린은 가람 아카데미의 신입생을 선발하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준은 때 아닌 만남에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두고간 물건이 있어서 가지러 왔어. 심사장은 은이가 지키고 있을거야.”

그녀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지금 떠나는 거야?”

“네.”

소년의 짤막한 대답에 여린은 다소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옥이랑 은이한테 작별 인사도 안 하고 그냥 이렇게 가게?”

“서운할 것 같아서요. 조용히 가는 것도 나쁘지 않죠. 어차피 1년 뒤면 다시 만날 텐데요 뭐.”

이준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자 여린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홀가분하게 가지만, 남는 사람도 생각해 줘야지.”

“……”

제자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멋쩍게 웃자,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1 년 뒤에 어떤 소년이 운남종에서 깽판을 쳤다는 소식을 듣기를 기다리마.”

준은 놀란 듯 두 눈을 껌뻑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요 며칠사이 누군가가 자신과 나설아의 파혼 문제에 대해 스승님께 말을 한 듯 싶었다. 준은 여린과 웃으며 잠시 대화를 나눈 뒤 방으로 돌아갔다.

* * *

방으로 돌아온 준은 베개 아래에서 저장반지 세 개를 꺼내 그 중 두 개를 가슴 안에 넣고, 보라색 저장반지 하나만을 손가락에 끼웠다.

가지고 갈 물건이 적은 것은 아니었지만, 하급 저장반지 세 개면 충분히 모든 물품을 집어넣을 수 있었다.

그는 문가에 서서 텅 빈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다 웃으며 방문을 닫았다.

소년은 자신이 떠나는 것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평소에 입던 옷을 그대로 입고, 평소 그대로의 걸음걸이로 마을을 나섰다. 소년이 마을을 벗어나는 순간까지 마을의 누구도 그가 사라진 것을 알지 못했다.

* * *

이은은 오늘따라 전혀 집중을 하지 못하고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여 하루 종일 초조한 상태였다. 늘 차분하고 조용하던 그녀가 그런 모습을 보이자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은아, 물이라도 좀 마셔.”

한 사내가 다정한 목소리로 이은을 불렀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말끔한 외모의 사내가 물잔을 내밀었다.

그는 이번 신입생 선발을 지원하기 위해 온 학생 중 가장 실력이 강한 자로, 많은 여학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은은 그에게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사내를 잠시 바라보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고맙지만 저는 됐어요.”

하지만 이은의 차가운 반응에도 그 남학생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오늘 신입생 선발도 네 덕에 무사히 끝났네. 네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정말 정신없이 바빴을 거야.”

“여린 스승님이 도와달라고 하셔서요.”

그러나 이은은 이번에도 귀찮다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짤막한 대답을 할 뿐 이었다.

“그랬구나. 여린 스승님께서 직접 부탁 하신 거야?”

“선배님, 죄송한데…오늘은 조용히 있고 싶어요.”

이은은 자꾸만 친한 척 말을 걸어오는 사내가 거슬려 참을 수가 없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이렇게까지 짜증이 치밀지는 않았을 텐데, 자신이 생각해도 오늘은 뭔가 이상했다.

“아 미안. 내가 말이 많았지? 그럼 쉬어.”

사내는 예상 이상의 차가운 반응에 당황했는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뒤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이, 준식. 드디어 맘에 드는 여자가 생긴 거야?”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간 준식이라는 사내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사람을 바라봤다. 그를 부른 것은 기태였다. 준식은 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 하고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런 완벽한 여자애는 처음 봐. 아카데미에 있는 어떤 아이도 저 아이랑은 비교할 수 없을 거야.”

준식의 대답을 들은 기태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쟤는 너한테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던데?”

제법 기분이 나쁠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준식은 개의치 않는 듯 계속해서 이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관심은 차차 가지게 만들면 되지.”

“그래? 저 여자애는 그 이준이라는 녀석과 사이가 좋아 보이던데. 이미 임자 있는거 아니야?”

“이준?”

준식이 고개를 돌려 처음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기태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겁도 없이 여린 스승님 하고 대결한 새끼 있잖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누가 스승님하고 대결을 해?”

기태는 모든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깜빡 했다는 듯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적당히 섞어 이야기를 꾸며냈다.

“아참, 넌 그 때 밖에서 지원자들 통제하느라 자리에 없었나? 어떤 겁도 없는 신입생이 시험에 합격해놓고 1년간 휴학을 하겠다고 선언하더군. 개인적인 일이 있다나 뭐라나…여튼 여린 스승님이 허락할 리가 없지. 그랬더니 내기 비슷한걸 걸더라고 건방지게. 결국 스승님이 열 받아서 이무기까지 써버렸다고. 물론 진심은 아니었겠지만…어찌됐든 신입생이 스승님의 이무기를 막아내더군…다들 난리가 났었지.”

준식은 기태의 말을 듣고 기분이 상했는지 이마를 찌푸렸다.

“그래? 어지간히도 건방진 놈이군…”

바로 그 때, 광장 밖에서 여린이 빠른 걸음으로 군중을 헤치고 걸어 들어와 이은에게 다가갔다.

“은아, 준이가 방금 성을 떠났다.”

“네?”

스승의 말에 이은은 멍한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슬퍼 하지마, 1년 이면 만날 수 있잖니.”

하지만 여린의 위로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소녀는 고개를 떨구며 허탈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오빠가…떠났군요.”

“괜찮니?”

이은은 여린의 질문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천막 밖으로 걸어 나갔다.

소녀는 천막 밖으로 나가자마자 곧장 기태와 준식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 맑은 눈으로 차갑게 둘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와 대련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뭐?”

준식은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한 듯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흠…그래, 예쁜 후배의 요구인데 기꺼이 들어줘야지. 내가 최대한 실력을 비슷하게 맞춰줄게. 너무 차이가 나면 연습이 안 되니까.”

이은은 자신이 먼저 대련을 요청해놓고도 그를 무시하듯 대꾸도 하지 않고 차가운 표정으로 다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기태는 그녀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낮은 소리로 준식에게 주의를 주었다.

“야, 너 조심해. 쟤 육성 투사야.”

그러나 준식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나도 두 달 전에 육성 투사가 됐어.”

“그래? 역시 대단하네…”

기태가 감탄하는 사이 준식은 음흉한 미소를 띠며 천막의 입구 사이로 비치는 이은의 몸을 위 아래로 훑었다.

“이건 나쁘지 않네. 여자라는 건 이럴 때 제일 약해지거든.”

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은을 바라보며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천막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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