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유희
“저 아이가 네가 말했던 염력 3단에 머물러 있다던 사촌 동생이야? 잘 생겼다……”
“어?”
친구의 한마디에 이옥은 당황한 듯 입을 삐죽거리며 유희의 허리를 꼬집어댔다.
“네 얘기 흘리고 다닌 거 아니야. 언젠가 잠꼬대를 하면서 얘한테 들린 것뿐이라고…”
하지만 준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능글맞게 웃으며 이옥을 바라보았다.
“설마 꿈에서도 내 생각을 하는 거야? 부담스럽게…왜 그 날 나의 손길…”
“이 자식이! 입 안닥쳐!”
준의 놀림에 이옥의 얼굴이 새빨개져 늘씬한 다리를 치켜들자, 준은 살짝 몸을 피하며 싱글벙글 웃을 뿐 이었다.
살짝 몸을 피하며 이준이 손을 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손길? 손길? 무슨 손길?”
유희가 호기심이 가득 찬 얼굴로 짓궂게 묻자, 이옥은 다시 한 번 그녀를 꼬집었다.
“아, 아파! 이런 독한 년, 옛 연인에게 이렇게 모질게 대하다니…”
유희는 빨갛게 달아오른 팔을 들어 올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장난치지 마. 얘네 데리고 시험장에 가야 된단 말이야.”
이옥이 유희를 가볍게 밀치며 핀잔을 주자, 유희가 가볍게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호호, 알았어. 따라와. 데려다 줄게.”
유희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웃으며 걸어가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 맞다. 이번 학생 심사에 기태도 왔어. 오는 길에 4성 투사가 됐다고 하던데?”
유희는 즐거운 듯 말했지만 이옥은 쓸데없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녀석은 왜 왔어?”
“우리 옥이님을 만나러 왔겠지. 오는 길에 내내 누구 생각만 했다던데.”
유희가 장난스레 웃음을 짓자, 이옥은 이마를 찌푸리며 몸을 돌려 이준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왜? 아니야. 싫어. 나는 싫어.”
이준은 이옥이 무언가를 부탁하려는 표정을 하자, 세차게 고개를 휘저은 뒤 재빨리 천막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왜? 너랑 무슨 사이인 척이라도 하라고? 사양할게. 나는 관심 없어.”
“어…? 옥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잠깐 떨어져 있던 사이에 네 매력 지수도 같이 떨어져 버린거야? 지금 거절 당한 거 맞지? 우와! 지금 거절 당한거야! 그치?”
유희의 유치한 말장난에 이준이 헛웃음을 짓자, 이옥은 툴툴대며 애먼 땅바닥을 발끝으로 툭툭 찍어댔다.
“쟤가 좀 이상한거야. 쟤는 말이지…하여간 이상해. 그 계집 말고 1년 안에 염력 8단에서 3성 투사가 되는 사람이 어딨 냐고…”
유쾌한 아가씨는 친구의 불평에 눈을 크게 뜨고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 * *
이옥은 한가롭게 천막을 향해 휘적휘적 걸어가는 준의 뒷모습을 무서운 표정으로 노려봤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까지 거절을 할 건 없지 않은가.
그녀가 속으로 역시 빌어먹을 놈이라고 준을 욕하는 사이 어느새 천막이 코앞이었다.
천막 안으로 들어서자 10여명의 남녀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여유로운 태도로 미루어보아, 그들도 가람 아카데미의 학생임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늘 밖에서는 20 여명의 젊은 남녀가 작열하는 태양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긴장한 표정으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군기가 바짝 든 모습으로 보아 아마도 방금 밖에서 심사를 받고 들어온 신입생들인 듯 했다.
“옥아! 우리 옥이다!”
“옥이? 옥이?”
천막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여학생들은 이옥을 발견하자 이산가족이라도 만난 듯 달려 나와 그녀를 에워싸고 수선을 떨었다.
계집애들의 꺅꺅 거리는 소리에 준은 머리가 울리는 듯해 짜증이 솟구쳤다.
‘밖에서는 잘 하고 다니나보네…’
불같은 성품으로 유명한 이옥이 아카데미에서 이리도 친구가 많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으이구, 얘들아. 우리 좀 우아해지면 안될까?”
이옥은 너도 나도 달려들어 끌어안는 계집아이들을 하나하나 떼어내며 연신 웃음을 지었다.
“아이 참! 오늘 소개해 줄 애들이 있단 말이야!”
결국 이옥이 소리를 지르며 뒷쪽을 가리키자, 그제서야 소녀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호오…이건 또 아주 예쁜 병아리들이네.”
하지만 그녀들의 시선은 주로 이안과 이은에게 향해 있었다. 묘하게 소외감을 느낀 이혁은 멋쩍게 고개를 까딱하고는 이준을 바라보았다.
“어머, 이건 또 왠 미남?”
다음은 이준이었다. 이옥의 친구들은 준수하고 앳된 얼굴에 묘하게 깊은 눈빛을 가진 소년을 발견하고는 다시 농을 던지기 시작했다.
“호오…이쪽이 동생이야? 사촌동생? 누구야?”
활기가 넘치다 못 해 혼이 쏙 빠질듯한 소녀들의 수다에 준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이옥은 친구들의 짓궂은 장난에 아니라고 손을 흔들다가, 갑자기 볼에 홍조를 띠기 시작했다.
“아이…그러지마…우리 준이는 이런 거 싫어한단 말이야…”
얼굴만 예쁘고 몸매만 그럴싸했지 언제나 선머슴 같던 이옥이 갑자기 혀짧은 소리를 내며 몸을 배배꼬자, 소녀들은 놀라운 표정으로 이옥을 바라보았다.
친구들도 이옥의 이런 수줍은 모습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 이옥의 말투나 태도는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의 모습이었다.
이은과 이안, 이혁 셋 역시 이옥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너무 놀라 눈만 껌뻑일 뿐 이었다.
게다가 ‘우리 준이’ 라니, 언제부터 이씨 가문의 두 철천지 원수가 ‘우리’가 됐단 말인가.
이 상황에서 가장 어이가 없는 것은 이준이었다. 그는 이옥의 애교를 보자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옥은 전에 없던 다정한 태도로 준에게 다가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 하도록, 몸으로 얼굴을 가르며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기까지 했다.
“어……”
갑작스런 이옥의 행동에 주위 사람들 모두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카데미 제일의 인기인 중 하나인 이옥이었지만, 그녀는 한 번도 남자에게 나긋나긋한 태도를 보인 적이 없었다.
“옥아…오랜만이야.”
모두가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 하고 있을 때, 뒤에서 투박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회색 옷을 입은 준수한 청년 하나가 다정한 표정으로 이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미소는 어딘지 모르게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인상을 풍겼다.
사내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이옥은 더욱 다정하게 준에게 달라붙으며 회색 옷을 입은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래, 오랜만이네.”
“응.”
기태라 불린 청년은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힐끗 보더니,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준을 위아래로 훑었다.
“하하, 이 분들은 모두 네가 데려온 분들이야?”
청년은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섰지만 이옥은 대답조차 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심드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얘네들 시험 받으라고 데려왔어.”
“오, 그렇구나.”
기태는 웃으며 머리를 끄덕인 뒤 가슴속에서 주먹만한 붉은색 수정구를 하나 꺼내들었다.
“마침 여린 스승님께서 이 수정구를 주셨어. 그럼 시험을 진행하면 되겠네. 이게 없었으면 꽤 오래 기다려야 할 뻔했어.”
이옥은 무언가 못마땅한 듯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리를 돌려 낮은 목소리로 시험에 대해 설명했다.
“이 시험은 아주 간단해. 실력이 염력 8단이 되면 자동적으로 빛이 나오고, 그러면 첫 시험을 통과한 거야.”
준은 자꾸만 다정한 척을 하는 이옥을 흘겨보며 그녀의 팔을 떼어냈다.
“알았으니까 이것 좀 놓고 얘기해.”
이옥은 이번에도 사랑에 빠진 소녀를 연기하며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얌전히 준의 손을 놓았다.
“알았어…남들 앞에서는 안 그럴게.”
이옥의 다소곳한 태도를 목격하자, 수정구를 붙잡고 있는 기태라는 청년의 손에 핏줄이 섰다.
“이은이랑 너희들 먼저 시작해.”
준은 이옥에게 잡혀 뻐근해진 손목을 돌리며 이은을 향해 다정하게 말을 건넸다.
이은과 이안, 이혁 등이 앞 다투어 손바닥을 붉은 수정구에 가져다대니 수정구에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세 사람이 성공한 뒤 이준이 마지막으로 손을 올리자, 이번에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것 봐. 자격도 안 되는 애들을 데리고 왔겠어?”
이옥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자, 기태는 멋쩍게 웃으며 수정구를 집어넣었다.
“널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규정이라서 진행하는 거야. 하하. 너무 그렇게 화내지마.”
기태는 수정구를 집어넣은 뒤, 땡볕에 앉아있는 젊은이들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첫 시험에 통과한 것을 축하해. 이제 여러분은 밖에서 30분 정도 기다려 줘.”
“기태, 지금 뭐 하는 짓이야?”
기태의 한마디에 이옥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옥아, 너도 모집 규정을 잘 알잖아. 요즘 애들 성격이 점점 급하고 불 같아서, 시험을 볼 때 이런 인내의 과정도 필요한 거야. 다 나중에 학원 생활에 도움이 되라고 하는 거지.”
청년이 짐짓 어쩔 수 없는 척을 하자, 이옥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몰아부쳤다.
“흥, 아무 것도 모르는 신입들한테 그런 말을 한다면 나도 관여할 생각은 없어. 하지만 내가 데려 온 애들한테 그 따위 규정이니 뭐니 그 딴걸 따져야해?”
“이건 규정이야.”
기태의 태도는 단호했다. 이미 이준에게 다정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 심사가 꼬일대로 꼬여 있었던 그는, 이옥이 자신에게 큰 소리까지 지르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흥, 있으나 마나한 규정이잖아. 그걸 뻔히 알면서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돼?”
이옥과 기태의 의견이 충돌하자 소녀들이 이옥의 편을 들고 나섰다.
“흐음…… 미안한데 그들은 내 시험에 통과한 사람들이야. 그러니 내 맘이지. 너희들도 알텐데.”
기태가 다시 한번 가식적인 웃음을 짓자, 이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좋아. 그럼 옥이 널 봐서 전부 나갈 필요는 없고, 한 사람만 대표로 나가는 게 어때? 음…보자, 그럼 이 분이 나가서 기다리는 걸로. 하하, 사나이가 피부 좀 타는 것 정도는 대수도 아니지.”
기태의 손가락이 네 명의 후보자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준 앞에서 멈춰섰다.
“비켜, 준이가 왜 나가! 내가 직접 여린 스승님을 찾아서 말할 거야. 네가 뭔데 여기서 감 놔라 배 놔라야!”
이옥과 기태가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천막 한쪽에서 한 무리의 남자들이 히죽히죽 웃으며 걸어 나왔다.
“어이쿠, 기태 형, 여기 분위기 좀 싸한데?”
“아, 별 거 아니야. 여기 새로 온 학생이 밖에 못 나가겠다고 하네.”
기태가 수정구를 집어넣으며 짤막하게 말하자, 사내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허, 이런 건방진…기태 형, 우리가 도울만한 거라도 있어?”
기태를 거들며 나선 사내의 가슴에는 별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기태는 잠시 그 사내를 바라보다가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웃음을 지으며 이옥을 바라봤다.
“그럼 좋아. 못 나간다면 안 나가면 되지. 하지만 밖에 저렇게 많은 신입생들이 보고 있는데, 여기 몇 사람만 안 나가면 저 애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며 눈앞의 청년의 어깨를 두드린 뒤 이준을 바라보았다.
“나가지 않겠다면, 여기 대철이와 한번 겨뤄보는 게 어때? 물론 그를 이기라는 건 아니고, 20번만 그의 공격을 받아내면 돼.”
기태의 제안에 소녀들이 일제히 욕설을 퍼부었다. 이건 누가 봐도 기태가 준과 이옥을 질투해 벌이는 유치한 복수극 이었다.
하지만 이옥은 친구들과 달리 차분하게 이준을 바라볼 뿐, 기태의 의견을 반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