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만이살길-47화 (47/818)

제47화. 다짐

은빛성 안 두 가문의 경제력 싸움은 결국 이씨 가문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3대 세력을 담당하던 한 가문의 몰락은 한동안 은빛성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가, 새로운 화재에 가려져 서서히 잊혀져 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화재란 바로 가람 아카데미의 입학 문제였다.

투기대륙의 유명한 고급학원 중 하나인 가람 아카데미는 투사가 되고자 하는 많은 소년 소녀들의 꿈 이었다.

가람 아카데미 출신이라면 모든 유력세력이 탐내는 인재였다. 일단 가람 아카데미에 들어가고, 무사히 졸업을 하기만 한다면, 그의 앞날은 탄탄대로인 것이다.

게다가 가람 아카데미는 투기대륙을 삼분하고 있는 3대 제국의 황실과도 은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었고, 세 제국이 100여 년간 전쟁 없이 평화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가람 아카데미의 영향력 덕분이라는 것은, 이미 대륙전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가람 아카데미에서는 매년 많은 스승님을 3대 제국에 파견해, 재능 있는 젊은이들을 발탁하고 있었다. 3대 제국 자국의 젊은 인재들 중 몇 명이나 가람 아카데미에 들어갈지를 기대했다.

어찌됐든 가람 아카데미는 운남종처럼 엄격한 규율로 제자들을 묶어두는 것이 아닌 만큼, 다른 국가의 종파에 들어가는 것과는 달리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귀국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결론적으로 가람 아카데미는 각 제국을 대신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해 각자의 국가로 돌려보내는 곳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 가람 아카데미는 신분과 지위를 중요시 하지 않기 때문에, 은빛성의 거지나 도둑들까지도 젊은이라면 누구나 기대에 부풀어 학생 모집 스승님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단한 가람 아카데미의 선생들이 며칠 후면 은빛성을 방문한다. 이 소식은 온 성을 들썩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기대에 잔뜩 부풀어 이제나 저제나 가람 아카데미 선생을 기다리는 다른 소년들과 달리 이준은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내고 있었다. 그는 곧 먼 길을 떠나게 될 것이니, 남은 시간 동안 미친 듯이 상처 치유 약을 정제해내야 했던 것이다.

본래 상처 치유약 따위는 정제하지 않는다던 약로도 이번만큼은 묵묵히 제자를 도와 미친 듯이 약을 제조해내고 있었다.

두 사제가 미친 듯이 약을 제조해내자, 현재 이씨 가문의 창고에는 1년은 팔고도 남을만한 양의 재고가 쌓여 있었다.

게다가 연금비약을 정제하는 과정은 굉장한 체력과 염력을 요하는 일인 만큼, 준의 염력 역시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불과 한 달이 안되는 시간동안 준의 염력을 다루는 솜씨와 불 조절 솜씨는 마치 다른 사람인냥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끊임없는 노력과 뛰어난 영혼탐지능력에 힘입어 현재 이준의 생명의 물약 정제성공률은 6할에 달했다. 6할이라면 경험이 제법 풍부한 2레벨의 연금술사들이나 가질 수 있는 성공률이었으니, 준의 발전속도가 얼마나 대단한지 약로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정제술 뿐만 아니라, 투사로서의 실력도 약로가 정성껏 정제해 주는 연금비약의 도움으로 일취월장하여, 마지막으로 약을 정제하던 날에는 결국 4성 투사가 될 수 있었다.

마지막 약재까지 정제를 다 한 후 이준은 약로에게 더 이상 우기지 않고 방에 돌아가, 꼬박 하루 밤낮을 죽은 듯이 자고 성에서의 마지막 날들을 맞이했다.

* * *

할 일 없이 마을을 어슬렁거리던 준은 사람들로 꽉꽉 들어찬 훈련장을 보고 기가 찼다.

‘어휴…고작 며칠 발버둥 친다고 갑자기 가람 아카데미에 들어갈 리가 없잖아…시작할거면 벌써 몇 년 전부터 그렇게들 했어야지…’

가람 아카데미에 입학하려면 18살 전에 반드시 염력 8단을 넘어야했다.

그런데 지금 이준이 보기에 훈련장에 있는 녀석들 중 조건에 부합되는 사람은 기껏해야 한 두 명밖에 없었다.

준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차고 머리를 저으며 뒷마당의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 안에는 익숙한 소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소년의 눈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이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고개를 숙인 것처럼 느껴졌다.

준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은에게 다가서자 은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그를 책망하는 듯한 말투로 말을 걸어왔다.

“오라버니…곧 떠난다면서요?”

그는 조용히 걸어가 이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익숙한 손길에 고개를 돌린 소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준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손을 뻗어, 정수리부터 머리끝까지 그녀의 긴 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가람 아카데미엔 안 갈 거예요?”

“응. 내가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나설아 때문인가요?”

거울처럼 맑은 눈동자에 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준은 이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그녀를 달랬다.

“그 날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약속을 했으니, 당연히 지켜야지. 만약 그러지 못하면 너도 날 우습게 생각할 거 아니야?”

이은은 준의 말에 원망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그 날 나설아를 죽였어야 했다고 되뇌었다.

“걱정 마. 일을 다 해결하면 가람 아카데미에 널 찾으러 갈게. 음…길어야 1년 반? 아니, 1년이면 돼!”

준은 자꾸만 눈물을 달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오라버니…저랑 있어요. 저도 1년 안에 오라버니가 그 계집애를 이길 수 있게 해줄 수 있단 말이에요.”

하지만 소년의 태도는 단호했다.

“걱정 마, 내 힘으로도 1년 뒤 운남종에 찾아가, 나설아를 이길 자신이 있어!”

이은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무언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준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 세게 자신을 부둥켜 앉자, 이은은 아무말도 하지 못 하고, 볼만 빨개져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은아. 걱정하지 마. 1년이야. 1년만 기다려줘.”

이준은 소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결국 이은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마침내 가람 아카데미의 스승이 은빛성을 방문하는 날, 이씨 가문의 마을은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져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은빛성 입구는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들어차 있을 것이 뻔했다.

“미쳤어 다들…가서 구경하면 합격이라도 되는 줄 아나?”

준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한가롭게 뒷산으로 걸어갔다. 그는 매일 같이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수련을 해왔다.

자신은 하늘이 두 쪽이 난다고 해도 이 시간에는 뒷산에 올라가 수련을 해야 했다.

* * *

이번 학생 모집 선생은 은빛성에 머물기는 하지만, 은빛성 근처 몇 개 도시도 책임지고 있다고 했다.

이튿날 이준 등이 지정된 광장에 도착했을 때, 광장은 셀 수 없이 많은 인파로 가득 차 있었다. 준은 태어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본 것이 처음이었다.

“흥, 별 수 없지?”

이옥은 답답해하는 이준의 모습을 보며 콧방귀를 꼈다. 그녀의 뒤에는 이안과 이은, 두 소녀와 함께 이혁의 모습이 보였다.

“언니, 언니한테 무슨 방법이 있어요?”

이씨 집안의 대표적인 견원지간이 또 다시 싸움을 시작할 것 같자, 이안이 웃으며 말을 돌렸다.

“이번에 은빛성에 학생 모집하러 온 책임자는 바로 우리 담당 스승님이셔. 그 분의 자랑스러운 제자인 이 몸에게는 당연히 방법이 있지.”

이옥은 상당히 신이 난 듯 자랑스러운 말투로 손을 들어 따라오라는 시늉을 했다.

“따라와.”

이준은 늘씬한 다리를 움직여 광장의 다른 쪽으로 걸어가는 이옥을 보며, 어깨를 한번 들었다 내리고는 천천히 그녀를 따라나섰다.

“그래, 내가 참자. 어디 무슨 방법인지 구경이나 해볼까?”

준이 웃으며 다가서자 이은도 미소를 지으며 이옥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넷은 이옥을 따라 큰 광장을 빙 돌아 마침내 광장의 서쪽에 들어섰다. 광장의 서쪽은 무장한 경비병이 두 겹 세 겹으로 두터운 벽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이옥은 동생들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뒤 앞으로 걸어가, 파란색 명패를 꺼내들었다. 그러자 경비 대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이옥에게 다가와 무언가 대화를 주고받더니 이준 일행을 향해 손짓을 했다.

두 쌍의 소년 소녀가 다가서자 중년의 군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들을 하나하나 훑어본 뒤 손을 들어올렸다.

“들여보내!”

묵직한 호령소리에 빼곡하게 들어찬 경비병들 사이로 작은 샛길 하나가 생겨났다.

이옥은 파란 명패를 집어넣고 대장에게 미소를 보낸 뒤, 당당한 걸음걸이로 경비 대장의 뒤를 따라 광장으로 걸어 나갔다.

준은 이옥의 뒤를 따라 경비병이 만들어낸 작은 길을 걸어가는 내내 으스스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경비병의 대부분은 지금의 자신보다 실력이 약할 것 이었지만,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거친 그들의 강인함과 살기는 자신과는 비할바가 못되는 것 이었다.

불과 몇 십미터 밖에 되지 않는 거리였지만, 준은 마치 그 100배는 되는 거리를 걸은 것처럼 피로를 느꼈다.

마침내 긴 인간벽의 끝이 보일 때 즈음, 세 아이의 손바닥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끝내 인간 벽을 뚫고 나온 이옥이 앞장 서서 걷던, 경비 대장을 향해 원망섞인 말투로 투정을 부렸다.

“선배님, 일부러 골탕 먹이시려고 이러시는 거죠?”

“하하, 이건 여린 스승님의 분부라 어쩔 수 없어. 뒷문으로 들어오려면 당연히 시험을 거쳐야 한다고, 다들 꽤 훌륭한데?”

중년 경비대장의 목석같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보아하니 여린 스승님께서 이번에 꽤 괜찮은 학생을 찾을 수 있겠어.”

그러거나 말거나, 이옥은 이미 다리가 풀려버린 이안과 이혁을 데리고 빠른 걸음으로 광장 안 쪽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광장 한 가운데로 걸어가니 초록색의 커다란 천막이 눈 안에 들어왔다.

천막 앞에는 시험을 보기 위한 어린 투사 후보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고, 몇 개의 통로를 지나자 시험에 통과한 젊은 남녀들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합격을 한 아이들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하나 같이 흥분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걸음걸이부터가 달랐다.

“옥아~!”

천막 안에 들어서자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빨간 옷을 입은 계집아이 하나가 뛰어와 깔깔거리면서 이옥의 허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살 좀 쪘나? 이 아가씨가, 좀 만져보자.”

“변태야, 저리 비켜!”

이옥은 웃는 얼굴로 갑자기 나타난 말괄량이 같은 소녀를 밀어낸 뒤, 몸을 돌려 그녀를 소개했다.

“이쪽은 가람 아카데미에서 나랑 가장 친한 친구 유희야. 4성 투사지.”

4성 투사라는 말에 흥미가 동한 준은 빨간 옷을 입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에는 밝은 기운이 가득했고, 갈색의 긴 곱슬머리를 대충 묶어 잔머리가 삐져나와 있는 모습이 여간 말괄량이가 아닌 듯 했다.

이옥은 다정하게 유희를 끌어당겨 마주 보며 웃었다.

“이 쪽은 모두 우리 가문 사람들이야. 얘는 이은. 어때? 이쁘지? 은이는 정말 예뻐. 그렇지만 너한테 관심은 없을 거야. 기대 하지 마. 그리고 얘는 이안이야, 역시 이쁘지? 얘는 내 친 동생 이혁이고 얘는…”

이준에게서 시선을 멈춘 이옥은 잠시 머뭇거리다, 유희라는 여자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쟤가 전에 너한테 말했던 이준이야.”

이옥의 소개에 따라 이은과 이안한테 눈길을 주던 유희의 두 눈이 반짝였다.

“와, 너희 가문에는 미인이 정말 많구나…우리 옥이 아가씨만 예쁜 게 아니었어! 아카데미에 가면 아주 인기 폭발이겠는데?”

두 소녀를 바라보던 유희는 준을 바라보자 넋을 이른 듯 중얼거렸다.

0